Daily Archives: March 6, 2023

안동 봉정사 대웅전(국보)

경북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봉정사 주불전인 대웅전(국보)이다.  1962년 수리과정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조선전기 이전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다포계 공포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다포계 공포의 구성이나 건물의 형태 등에서 조선초기 이전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건물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내부에는 조선초기에 칠한 단청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동 봉정사 대웅전(국보)>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현판과 지붕을 받치는 공포>

SANYO DIGITAL CAMERA<옆면 공포>

SANYO DIGITAL CAMERA<팔작지붕>

봉정사대웅전(내관)<내부>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안동 봉정사 대웅전, 국보
이 건물은 봉정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건물 앞에는 축대를 높이 쌓고 그 뒷면에는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세웠으며 내부도 마루를 깔았다. 중앙 뒷면에 높은 기둥 2개를 세워 그것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만들었다. 기둥 사이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건립된 이후 변경되었으나 공포의 구성에서 힘있고 단순한 수법은 초기의 다포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단청은 건립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퇴락하여 2000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안내문, 안동 봉정사, 2009년)

<출처>

  1. 안내문, 안동 봉정사,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에 있는 불전인 극락전(국보)이다.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다. 건물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극락정 중수상량문>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때(1363년)에 지붕을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통 목조건축물은 건축 100~150년 후에 지붕을 수리하는 사례로 볼 때 12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실상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여겨진다.

SANYO DIGITAL CAMERA<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쪽에 분합문이 있는 조선시대 불전 건축물과는 달리 가운데 출입문이 있고 양쪽에는 창문이 있는 벽면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불상을 모신 닫집이 있으며, 바닥에 전돌을 깔았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때 건축 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흔치 않은 건축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극락전 현판>

SANYO DIGITAL CAMERA<지붕을 받치는 공포>

SANYO DIGITAL CAMERA<모퉁이 공포>

SANYO DIGITAL CAMERA<옆면>

내부에는 불상을 모시는 닫집이 있으며, 바닥은 원래 전돌이 깔여 있었다.

내부_가구와_닫집
<극락전 내부 닫집>

SANYO DIGITAL CAMERA<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안동 봉정사 극락전, 국보
이 건물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1972년에 실시한 보수공사 때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 후 첫 수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이며, 그 뒤 조선 인조 3년(1625년)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다. 원래는 대장전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의 고격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돌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매입했으며, 전면과 후면 중앙칸에 판문을 달았고 양쪽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다. 불당의 중앙 뒤쪼게 2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안내문, 안동 봉정사, 2009년)

<출처>

  1. 안내문, 안동 봉정사,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리에 있는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이다. 갈기비(碣碑碑)는 간략한 형태의 석비를 말하는데 이 석비은 머릿돌, 비몸, 거북받침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고려 현종 때(1021년) 이곳에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을 세우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비이다. 사찰의 창건에 관한 내용만 비문에 남아 있고 사찰은 폐사되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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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

비몸돌 앞면 윗쪽에  ‘봉선홍경사갈기’는 이름이 적혀 있고,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이 새겨져 있다. 해동공자로 불렸던 고려시대 유학자 최충이 글을 지었고 백현례가 썼다고 한다. 고려초에 만든 비석이지만, 글자가 또렷히 남아 있어 지금도 읽어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머릿돌과 비몸 윗부분>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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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비몸>

받침돌의 머리는 어룡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머리에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생긴 날개를 새겨 생동감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어룡모양을 하고 있는 머리>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뒤에서 본 모습>

이곳은 호남지역으로 연결하는 교통로가 위치하고 있다. 당시 교통의 요지이지만 마을이 없고 주변에 습지가 많아 도적이 자주 출몰하여 여행객의 안전을 위하여 절과 숙소인 원(院)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이 석비와 작은 석탑 부재만이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비가 있는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옆에 있는 옛 석탑 부재>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국보,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
1021년(고려 현종12)에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026년(고려 현종17)에 세운 비이다. 이곳은 호남과 한양을 잇는 갈래 길로 교통의 요지였으나, 갈대가 무성한 못이 있고, 사람이 사는 곳과 떨어져 있어 강도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어려웠다. 이에 현종이 불법을 펴고 갈가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을과 광연통화원이라는 숙소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사찰의 이름 앞에 봉선이라 붙인 것은 현종의 부왕 안종의 뜻을 받들어 지었기 때문이다. 최충이 비문을 지었고, 백현례가 썼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인 귀부와 이무기를 조각한 덮개돌인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어룡의 머리가 정면을 보지 않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조각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천안시청, 2014년)

<안내문>

  1. 안내문, 천안시청, 2014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서울 숭례문(국보), 한양 도성의 정문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숭례문(국보)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이자 남문에 해당되는 성문으로 남대문이라 불리기도 했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때(1396년) 처음 축조되었으며, 세종 때(1447년) 개수공사를, 성종 때(1479년) 문루와 홍예를 헐고 크게 다시 지었다. 2008년에도 방화로 큰 피해를 입고 다시 수리하였다. 숭례문은 화강암으로 쌓은 기단위에 건립되었는데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우리나라 성문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출입문으로 홍예문을 두고 있으며, 바깥쪽 옹성을 쌓지는 않았다. 문루는 2층 누각형 건물인데 웅장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다포계이다. 단청은 적(赤),녹(綠)의 두 색을 많이 사용했다. 최근에 화재로 문루가 소실되었다고 하나 원래 있던 석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문루를 수리하였다고 하여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성곽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 숭례문(국보), 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2000년대 이전 숭례문은 차도로 가로막힌 교통섬이었으나, 인도가 연결되면서 명실상부한 성문이 되었다. 2008년 방화로 소실된 문루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으며 주변 성곽도 일부 복원했다.

OLYMPUS DIGITAL CAMERA<2006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숭례문 문루는 누각 형태로 되어 있는 읍성 성문과는 달리 방어를 위해 나무로 만든 총안을 두고 있다. 붉은색과 녹색을 위추로 한 단청에 다포계공포를 사용하고 있지만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다. ‘숭례문’이라 적힌 현판은 세로쓰기로 적혀 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문루와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방향>

OLYMPUS DIGITAL CAMERA<추녀마루 잡상>

좌우 성벽은 조선초기에 쌓에 옛 석축이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복원한 부분도 있다. 바깥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과 달리 옹성을 두지 않고 조선초기 한양도성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성문은 아치형으로 석축을 쌓은 홍예문으로 웅장하고 견고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내부 천장>

OLYMPUS DIGITAL CAMERA<성문(안쪽)>

OLYMPUS DIGITAL CAMERA<큰돌로 쌓온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 복원한 부분>

숭례문을 들어서면  경복궁과 관아인 육조거리가 있던 광화문으로 큰길이 연결된다. 오른쪽으로는 남대문시장, 종로와 광통교지역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례문 남쪽 서울역으로 연결되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남대문시장과 광통교로 연결되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남산으로 연결되는 성벽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서소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보이는 숭례문>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숭례문>

서울 숭례문, 국보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 그 후 세종30년(1448), 성종10년(1479), 고종 연간에 큰 수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매일 밤 인정(10시 무렵)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날 아침 파루(4시무렵)에 문을 열었는데, 이때 문루에 종을 담아 그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몸소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숭례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곤 하였다.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 구조가 견실하여 조선초기의 건축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는 좌우 성곽이 철거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해체보수를 하였다. 2008년 2월10일 방화사건으로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하였으며, 이때 좌우 성곽도 함께 복원하였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3년)

<출처>

  1. 안내문, 서울시청,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