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숭례문(국보)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이자 남문에 해당되는 성문으로 남대문이라 불리기도 했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때(1396년) 처음 축조되었으며, 세종 때(1447년) 개수공사를, 성종 때(1479년) 문루와 홍예를 헐고 크게 다시 지었다. 2008년에도 방화로 큰 피해를 입고 다시 수리하였다. 숭례문은 화강암으로 쌓은 기단위에 건립되었는데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우리나라 성문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출입문으로 홍예문을 두고 있으며, 바깥쪽 옹성을 쌓지는 않았다. 문루는 2층 누각형 건물인데 웅장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다포계이다. 단청은 적(赤),녹(綠)의 두 색을 많이 사용했다. 최근에 화재로 문루가 소실되었다고 하나 원래 있던 석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문루를 수리하였다고 하여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성곽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숭례문(국보), 바깥쪽>
<안쪽>
2000년대 이전 숭례문은 차도로 가로막힌 교통섬이었으나, 인도가 연결되면서 명실상부한 성문이 되었다. 2008년 방화로 소실된 문루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으며 주변 성곽도 일부 복원했다.
<2006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 모습>
<안쪽>
숭례문 문루는 누각 형태로 되어 있는 읍성 성문과는 달리 방어를 위해 나무로 만든 총안을 두고 있다. 붉은색과 녹색을 위추로 한 단청에 다포계공포를 사용하고 있지만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다. ‘숭례문’이라 적힌 현판은 세로쓰기로 적혀 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한다.
<문루와 현판>
<안쪽 방향>
<추녀마루 잡상>
좌우 성벽은 조선초기에 쌓에 옛 석축이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복원한 부분도 있다. 바깥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과 달리 옹성을 두지 않고 조선초기 한양도성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성문은 아치형으로 석축을 쌓은 홍예문으로 웅장하고 견고해 보인다.
<성문(바깥쪽).
<성문 내부 천장>
<성문(안쪽)>
<큰돌로 쌓온 석축>
<바깥쪽 복원한 부분>
숭례문을 들어서면 경복궁과 관아인 육조거리가 있던 광화문으로 큰길이 연결된다. 오른쪽으로는 남대문시장, 종로와 광통교지역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숭례문 남쪽 서울역으로 연결되는 길>
<남대문시장과 광통교로 연결되는 길>
<남산으로 연결되는 성벽이 있던 자리>
<서소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이 있던 자리>
<남쪽에서 보이는 숭례문>
<옆쪽에서 본 숭례문>
서울 숭례문, 국보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 그 후 세종30년(1448), 성종10년(1479), 고종 연간에 큰 수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매일 밤 인정(10시 무렵)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날 아침 파루(4시무렵)에 문을 열었는데, 이때 문루에 종을 담아 그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몸소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숭례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곤 하였다.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 구조가 견실하여 조선초기의 건축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는 좌우 성곽이 철거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해체보수를 하였다. 2008년 2월10일 방화사건으로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하였으며, 이때 좌우 성곽도 함께 복원하였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3년)
<출처>
- 안내문, 서울시청, 2013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