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March 9, 2023

김정희 필 세한도(국보), 조선시대 문인화를 대표하는 작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정희 필 세한도(歲寒圖, 국보)’이다. 조선후기 문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글과 그림이 함께 남겨져 있는 것으로 제주도 유배시절 변함없는 정성을 보여준 역관 이상적에게 그의 신의를 한겨울의 소나무로 표현하였다. 후에 이상적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교유관계를 가졌던 중국 문인들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평가인 많은 발문을 받아와서 더욱 가치있는 작품이다.

그림은 한채의 집을 중심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는 여백으로 처리하여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위쪽에 ‘세한도歲寒圖’라는 제목과 함께 ‘완당阮堂’, ‘우선시상蕅船是賞’이라는 글씨를 적고 도장을 찍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세한도, 추사 김정희, 조선 1844년, 국보>

제주도 유배 중인 스승 김정희에게 제자인 역관 이상적은 연행에서 얻은 최신 서적과 김정희 지인들의 편지를 꾸준히 보내드렸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신의를 메마르고 찬 기운이 감도는 속에서도 싱싱한 잎이 솟아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로 표현하여 서화일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인화의 대표작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이상적은 이에 감격하고 연경으로 가지고 가서 평소 교유관계를 맺고 있던 장락전, 장록 등 청내의 명사에게 글을 받아서 <세한도>의 가치를 드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그림 양쪽에는 제주도 유배시절에도 변함없어 추사 김정희와 중국문인들 간의 편지를 전해주면 변함없는 신의를 보여준 역관 이상적에 대한 느낌을 글로 적어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글>

OLYMPUS DIGITAL CAMERA<왼쪽 글>

그대가 지난해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 두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 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는,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이런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 일 터인데, 잇속을 좇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한는 처신을 돌이켜 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 살았던 급암과 덩당시 같이 어질었던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형편에 따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물며 하비현의 적공이 대문에 방을 써 붙였다는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쓰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장악진, 오찬 발문, 조진조의 발문>

OLYMPUS DIGITAL CAMERA<반준기, 반희보, 김준학, 반증위, 품계분의 발문>

반증위의 발문, 반증위는 반준기, 반희보 형제의 육촌으로 그들처럼 대수장가였으며 특히 금석학과 서예를 좋아하여 이 분야를 많이 수집했다.옹방강 문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상적과 반씨 문사들간의 교유를 주도했다.
“김정희는 바다밖의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 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 속에 걸려들었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리오? 풍진 속 세상을 개탄하다가 일찍이 어린 친구 알게 되었네. 높은 의리 돈독하긴 언제나 같고 겨울에도 그 맹세는 변함이 없네. 소나무와 잣나무를 닮아서인지 타고난 성품마저 곧고 단단해. 시들지 않는 바탕 그림 그려서 도타운 그정에 보답하였네. 우진 선생 부탁으로 반증위가 쓰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반희보의 발문, 반희보는 소금장사로 큰 부를 축적한 오흥 반씨 집안 출신이다. 이후 청나라 소주의 문학과 예술을 주도하는 대가문으로 성장했다. 반준기와형제로서 함께 서화를 많이 모았으며 이상적에게 집안 문사들의 서화를 선사했다. 그는 발문에서 세한도를 보고 예찬의 필치를 떠올렸다고 썼다.
“원나라 화가 에찬의 필이 담긴 한 폭의 그림 만리 길 배를 타고 건너 왔다네. 동심 담아 고사의 뜻을 전하니 신물이라 태평한 시절 오겠지. 산골짜기 있는 재목 어찌 버리며 얼음 설 겪은 절개 더욱 굳어라. 내가 부친 줄 없는 소리 감상하시고 바다 건너 산마루에서 몸조심하길 <세한도>에 시를 써서 바치고 우선 존형 문단의 교정을 청한다. 오현 반희보”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왕조, 조문경, 지경용, 요복중의 발문>

OLYMPUS DIGITAL CAMERA<장목의 발문>

OLYMPUS DIGITAL CAMERA<장요손의 발문>

장요손의 발문(1845년). 장요손은 청나라 학자로 이상적과는 1836년에 처음 만났으며 이후 그에게 보낸 편지가 40~50여 통에 이를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상적과 서화를 주고 받았는데, 그를 통해 김정희의 서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장요손은 전각에도 뛰어나 김정희는 그가 새긴 ‘동해순리’인장을 높이 평가했다.
” 우선 인형과 헤어진 지 8년이 되었다. 갑진년(1844) 겨울에 사신으로 연경에 왔는데, 을사년(1845) 봄 1월에 오찬(장요손의 매형)의 정원에 초청하여 술을 마셨다. 연경의 선비 17명이 모여 옛일을 이야기하고 문장을 논하며 모두 즐거워했다. 우선이 김추사 선생이 그린 <세한도>를 보여주며 제영을 부탁했다. 급히 율시 두수를 짓고, 추사 선생과 한묵을 통한 마음으로의 교유를 생각했다. 언제쯤이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더욱 슬플 따름이다. 양호 장요손이 기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장목의 발문(1845년). 장목은 완원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학자로서 하소기, 조진조, 진경용 등 당대 명유들과 교유했다. 김정희가 존경했던 명말청초의 실증주의 사상가 고염무의 사당을 짓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저술한 고염무의 연보인 ‘고정림연보’와 완원이 새로 저설한 ‘시서고훈’을 김정희에게 보내겠다고 발문에 적었다.
“예전에 언젠가 서유지에게 완당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네. 기인은 바다밖에서 오고 감춰둔 책 동쪽에서 빛이 났다네.(중략) 완당이 존경한 완원선생이 이 책 보더니 기쁘고 놀라 가져다 출판을 기획했는데. (중략) 원본을 소중히 보관한 곳은 용마루 치솟은 문선루였네. 완원은 그 아래 살았는데 저술을 늙을수록 더욱 많아져 (중략) 옛 주석에서 사라진 경전 발라냈다네. 완원이 새로 저술한 ‘시서고훈’이 완성되었다. (완원께서) 한 질을 멀리까지 보내주시니 속된 귀가 잠시나마 호강했다내. (중략)”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국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국보)이다.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내항아리와 외항아리로 구성되어 있다. 외항아리는 풍만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卍자무늬, 연꽃무늬, 국화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내항아리는 홀쭉한데 뚜껑에는 육각형 무늬가, 몸통에는 국화무늬가 있다. 1970년 고려대학교 구내에서 공사를 하는 중에 발견되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외항아리, 조선 15세기, 국보>

OLYMPUS DIGITAL CAMERA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내항아리, 조선 15세기, 국보>

<출처>

  1. 안내문,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청자 퇴화점문 나한좌상(국보)

강화도 국화리에서 발견된 청자 퇴화점문나한좌상(국보)이다. 나한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얼굴은 눈썹과 눈이 수려하고 코는 오똑하다. 옷의 주름에 백토를 사용하여 점을 찍어 퇴화점문 나한좌상이라 부른다.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상형청자로 고려청자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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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상, 고려 12세기, 국보>

고려는 불교는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된 여러 용구와 경배의 대상을 청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강진 사당리, 부안 유천리, 용인 보정리 가마터 등에서 보살상을 청자로 제작한 예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향유했던 도자문화의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조선왕조 실록 정족산사고본(국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조선왕조 47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방대한 역사책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실록은 왕과 관련된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경제,군사 등을 비롯하여 민간생활까지의 다양한 내용들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역사책이다. 조선사회는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인 사관을 두어 왕이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실록의 편찬은 왕의 사후에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근간으로 해서 당시의 모든 자료를 참조하여 실록을 작성했기때문에 그 내용의 객관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정족산사고본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이관, 규장각도서로 편입되었다가, 1928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관리되었으며, 1990년 규장각이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었다.

국보_제151-1호_조선왕조실록-정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 사고본(국보)>

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 도 완성되어 인터넷 등을 통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조실록(복제본, 필사본), 숙종 실록(복제본, 활자본), 서울대 규장각>

원래 사초는 실록작성시 제출하여 실록완성시 세검정에서 세초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초 작성자가 개인적으로 복사본을 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등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인조대의 문란상을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조 무인사초>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정족산 사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8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통신.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국왕 사후에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한 것이 대대로 축적되어 이루어졌다. 실록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사초와 시정기, <승정원일기>, <일설록> 등 정부 기관 기록, 개인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들은 내용을 직필한 것으로, 사관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였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있던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에 보관하였는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춘추관과 충주.성주사고의 실록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전쟁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재간행하여 춘추관.정족산.태백산.정상산.오대산 등 네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중국이나 월남 등 다른 국가의 실록과 비교해 볼 때,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존.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등록되었다. 현재 규장각은 정족산본 1,187책, 오대산본의 낙질 27책, 기타 97책 등 총 1,311책의 실록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정족산본 실록은 전주사고본에서 이어진 것으로,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일본이다. (안내문, 서울대 규장각, 2010년)

<출처>

  1. 안내문, 서울대 규장각,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김홍도 필 군선도 병풍(국보)

서울 용산구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 필 군선도 병풍(국보)’이다. 도교에 관련된 초자연적인 인물을 그린 도석인물화로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원래 89폭의 연결된 병풍그림이었으나 지금은 3개의 족자로 분리되어 있다. 외뿔소를 타고 있는 노자를 중심으로 하선고, 남채화, 장과로, 조국구, 한상자, 문창, 종리권, 여동빈, 이철괴 등 팔선(八仙)이라 불리는 도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거의 등장한다. 기존의 신선도를 보고 따라 그렸으나 호방한 필치로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 걸작이다. 인물의 구성, 감정이 살아있는 인물의 묘사 등 그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맨 앞에 하선고(何仙姑)와 영지버섯을 단 남채화(藍采和)가 표현되어 있다. 여장을 하고 있는 듯한 두 신선들의 모습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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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 1, 2폭>

 두번째 3, 4, 5폭으로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을 보는 장과로(張果老), 딱딱이 모양 판을 치고 있는 조국구(曺國舅), 대나무 통을 든 한상자(韓湘子)를 표현하고 이다.

OLYMPUS DIGITAL CAMERA<3, 4, 5 폭>

6, 7. 8폭은 외뿔소를 타고 있는 노자, 천도복숭아을 든 동방삭, 종이를 들고 걸어 다니면서도 글을 쓰는 문창, 머리를 깎은 종리권, 머리에 두건을 두른 여동빈(呂洞賓), 호리병을 든 이철괴(李鐵拐) 등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6, 7, 8폭>

신선들(群仙圖), 김홍도, 조선 1776년,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맨 앞에 하선고(何仙姑)와 영지버섯을 단 남채화(藍采和),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을 보는 장과로(張果老), 딱딱이 모양 판을 치고 있는 조국구(曺國舅), 대나무 통을 든 한상자(韓湘子), 외뿔소를 타고 <도덕경>을 든 노자(老子), 천도복숭아을 든 동방삭(東方朔), 종이를 들고 걸어 다니면서도 글을 쓰는 문창(文昌), 머리를 깎은 종리권(鐘離權), 머리에 두건을 두른 여동빈(呂洞賓), 호리병을 든 이철괴(李鐵拐) 등이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3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