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후대 석탑의 전형이 된 백제 석탑

삼국시대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 중심부 정림사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이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6세기 말에 세워졌는데, 정돈된 형태나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인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고려초 이를 본 뜬 탑이 충남과 전라지역에 만들어졌다. 1층 몸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공적을 새겨 넣었다.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局碑銘)’라는 제목이 적혀 있어 ‘평제탑(平濟塔)’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이 탑은 석재를 사용해서 목탑의 형태를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이 목탑을 원형에 가깝게 구현했는데, 이 탑은 형식과 건축방식을 모방하되 건축의 용이성 등을 고려하여 탑의 형태를 단순화하여 주요 특징들을 묘사하면서 석탑만의 독특한 조형미를 재창조했다.

<왼쪽 본 모습>

<오른쪽에서 본 모습>

탑은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를 하고 있다.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졌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단과 1층탑신>

기단을 낮게 사용하고 1층탑신을 높게 사용하였다. 몸돌 모서리에는 안쏠림과 민흘림이 반영된 기둥을 세우고 안쪽에는 2개씩 판석을 연결하였다. 지붕돌은 얇은 판석을 여러장 쌓아 목탑의 지붕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통일신라 석탑이 1개돌로 몸돌이나 지붕돌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탑은 제작방식에서 목조건축물의 특징들이 많이 남아 있다.

<탑신부>

탑신 2층부터 위로 올라 갈수록 몸돌의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한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지붕돌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다. 통일신라 석탑은 하나의 돌을 깎아서 지붕처럼 보이게 지붕돌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비례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한 때문이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이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다.(정림사지박물관, 2015년)

<옆에서 본 모습>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기존 목탑을 그대로 재현한 미륵사지 석탑이나 분황사지 석탑과 달리 석탑 고유의 조형미를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석탑은 구성요소간에 수리적으로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기때문에 안정감과 석탑 고유의 조형미를 주고 있다. 석굴암을 비례적 특징을 실측하여 밝혀낸 일제강점기 일본인 건축가가 이 석탑도 실측하여 그 특징을 밝혀냈다고 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구조와 비례적 특징>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의 구조
여러 장의 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귀퉁이 기둥돌)와 탱주(지탱하는 돌)를 하나씩 세웠다. 1층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롤로 민흘림양식이 분명한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장씩 판석을 끼웠다. 탑신 2층부터 몸돌을 윗면으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한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옥개석(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옥개받침(지붕받침)을 두었는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든다. 옥개석(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고, 옥개받침(지붕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히 다듬어 간략화된 공포(栱包) 형태를 재현한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한 단의 탑신받침을 놓았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석을 두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여 축조하여 외견상 목조건물과 유사하다. 안정감 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탑(높이 약8.8m)이다. (정림사지박물관, 2015년)

1층 탑신 몸돌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局碑銘)’라는 제목으로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새긴 전승기념문이 있다. 내용은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의자왕을 비롯하여 7백여명을 중국에 압송하였다는 내용과 백제 땅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할 당시 37주, 250현에 모두 24만호, 620만 명이 살았다고 적혀 있다.

<1층 탑신 몸돌에 새겨진 글씨, 1번째>

<글씨 탁본>

<2번째>

<3번째>

<4번째>

<새겨진 글씨 중 의자왕과 관련된 내용>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局碑銘)
정림사지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에 새겨진 당나라장군 소정방의 전승기념문이다. 비문은 4면 모두에 새겨져 있으며 중국 낙주 하남의 권희소가 쓰고 당 현경5년(660) 8월13이에 완성하였다. 내용은 백제 31대 의자왕, 왕자 융, 효 등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과 국변성 이하 7백여명을 중국에 압송하였다 하고 당나라는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고 당시에 백제영토에는 24만호에 인구620만이었다고 적고 있다. 백제 멸망당시에 사비성이 칠일동안 밤낮으로 불에 타 거의 건조물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당군은 철수에 앞서 사비궁터에 있었던 부여석조와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전승문을 새기었든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지박물관, 2015년)

정림사(定林寺)는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적으로 중요시되었던 사찰이다. 건물들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기존의 사찰들이 금당 앞에 거대한 목탑을 두고 있는데 반해 정림사는 석탑을 두고 있다. 이는 금당 앞 마당에서 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하여 여유있는 공간이 확보되는 혁신적인 공간배치가 되었다. 이런 장점때문에 이후 사찰들은 석탑을 조성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사찰 공간배치를 대표하는 가람배치가 되었다.

<정림사지>

<2008년 정림사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되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림사지박물관, 2015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부여 정림사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