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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사적), 백제 사비도성(泗沘都城)의 중심 사찰

백제를 대표하는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옛절터인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定林寺址, 사적)이다. 정림사는 백제 사비도성(泗沘都城) 중심부에 위치하는 중심사찰로 경주 황룡사와 비슷한 성격의 사찰이다. 이 사찰이 건립된 시기는 백제가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이다. 정림사는 새수도를 건설할 때 도성, 궁궐 등과 함께 도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 세운 공공시설 중 하나이다. 정림사는 백제 궁궐(부여읍 구아리와 관북리 일대)에서 정남방향으로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큰 길이 남북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나 당나라때 존재했던 투루판의 교하고성이나 고창고성에서도 큰 절이 도심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변으로 광장과 상업지역이 형성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이나 이슬람국가 도시들이 대성당이나 모스크를 중심으로 광장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구조라 할 수 있다.

<부여 정림사지(사적)>

정림사는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정림사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는 백제 사차라을 대대표하는 사찰의 공간배치이다. 발굴조사 결과 사찰 규모는 동서 약62m, 남북 약120m 정도이며 중문, 탑, 금당, 강당, 동서회랑과 동.서.북편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절터에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민무늬토기편이 출토된 청동기시대 문화층과 정림사 창건 이전의 백제시대 문화층과 고려시대 문화층도 확인되었다. 이는 정림사 창건이전에도 공방시설을 조성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절터에서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중 ‘정림사(定林寺’)라는 글자가 적힌 것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사찰이름이 확인되었다. 오층석탑이 남아 있던 고려시대까지 지역의 중심사찰로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들어가는 길>

정림사는 백제가 사비성 주변에 세었던 많은 사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성 궁궐 남쪽편 도심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정림사지 발굴조사 당시 사진과 가람배치>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축선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과 승방이 경내를 둘러싸고 있다. 도심에 위치하고 있어 사찰의 규모는 넓지 않지만, 목탑대신 석탑을 조성하여 경내 공간을 넓게 하였다.

<정림사지 박물관에 전시된 모형>

<2008년 발굴작업 중일 때 절터 모습>

<‘정림사’가 새겨진 암키와>

이 사찰 이름의 유래가 된 유물이다.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에 중건되어 지역의 중심 사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가치, 사비도성의 중심지 정림사(定林寺)
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충청도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사비도성은 지역을 중앙.동.서.남.북의 5부로 나누고 그 안에 왕궁.관청.사찰.민가 등을 두어 구분하는 도시계획이 이루어졌다.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던 시기의 도성의 모습이 중국 사서 『주서(周書)』 백제전에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림사지는 사비시대의 사찰들 가운데 가장 중심에 위치하여 도성과 나성을 조성할 때 일정한 계획하에 조명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림사지와 관북리 왕궁과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와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 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백제 왕실 내지는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성의 공간으로 정림사지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사비도성>

사비도성에는 많은 절과 탑이 세워졌는데 정림사는 그 중에서도 제일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사비성의 도시계획은 중국 북위(北魏) 낙양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된 유적 등을 참조하여 그린 옛 사비도성의 모습>

북쪽에 부소산성과  왕궁을. 남쪽에 궁남지 연못을 두고 있다. 도시 전체를 나성(羅城)이 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중심에 정림사가 있다.

성왕이 정림사를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정림사는 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비시기 대표적인 사찰이다. 성왕은 541년(성왕19) 사비로 천도한 사실을 중국 양무제에게 알리고 사비도성의 국가적인 상징물을 건립하는데 필요한 장인과 화가 등을 지원받아 정림사를 세웠다. 성왕은 국내의 정치적 안정을 통해 훌륭한 덕을 얻고,백제를 포함한 가야제국까지 그 덕이 미쳐 가야가 백제에 복속되기를 기원하였다. 아울러 천하의 모든 백성이 해탈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정림사를 창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정림사에서 예불을 올리는 장면(모형)>

당시는 신앙의 대상이 불상이 아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었다. 목탑에 비해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정림사의 가치, 건축학적 측면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 상에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정형의 1탑1금당식 가람 배치 구조이다. 이 가람 배치 구조는 고대 일본 가람조영의 모태가 되어 백제식과 동일한 일본의 사천왕사(시텐노지, 四天王寺) 양식을 낳았다. 정림사지는 복도가 건물을 감싸는 배치 형태이다. 다만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이 아닌 북쪽이 약간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또한 중문 바깥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최고(最古) 연못이며 이러한 연못의 존재는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도 정림사지는 금당의 이중기단, 강당지 및 회랑지의 와적기단, 석탑부의 판축기법 등 고대 가람의 특별한 형식을 보여주어 백제 건축의 사료적 의의를 갖는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옆에서 본 모습>

정림사는 중문.탑.금당.가람이 남북축선으로 일련로 배치된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백제를 대표하는 가람배치로 일본 사천왕사 건축양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서역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로마의 공공건물인 바실리카나 신전 등과 비슷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중국과 우라나라 궁궐의 정전 영역 또한 이와 비슷한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정림사를 복원 모형 또한 궁궐 정전영역과 거의 유사하다.

<정림사지 입구>

중문(中門)
석탑에서 남쪽으로 19.98m 거리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 초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석 밑에 깔았던 적심석은 거의 그대로 발견되었다. 적심은 지표면에서 20~30cm 깊이에 위치해 있었다. 기단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그 흔적을 그대로 인정하여 기단크기를 설정할 경우 너무 크기 때문에 이는 중문의 기단으로 보기 어렵다. 금당의 기단폭을 중문에 적용하면 기단 폭은 기둥 중심에서 약 3자 정도가 된다. 이 수치를 적용하면 기단의 크기는 동서 길이 13.1m, 남북너비 약7.7m가 된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3칸에 11.3m, 측면 1칸에 5.3m이다. 이 수치는 적심석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중문은 정면 3칸에 측면은 회랑과 같은 폭의 1칸 규모이다. 지붕은 양쪽 용마루 끝에 치미를 올린 팔작지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중문 앞 연못>

중문 앞에는 동.서 양쪽으로 연못을 파서 다리를 건너가게 하였다. 정림사지 연못은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연못이다.

<중문지(中門址)>

 석탑기단에서 남쪽에 있다. 초석을 놓았던 적심석(積心石)은 동서 2열로 배치되어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기와를 쌓아 기단을 조성한 와적기단(瓦積基壇)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깬돌을 이용하여 구축되었다.

<모형으로 복원한 중문>

중문은 앞면 3칸에 치미가 있는 팔작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문 양쪽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회랑(回廊)
석탑과 금당을 에워싸고 있는 회랑은 동서 길이 52.2m이고 남북길이는 83.5m이다. 강당과 금당사이의 동편 회랑터에서 11개소의 적심석이 발견되었다. 동회랑터 남단은 훼손되어 기둥 간격을 알 수 없다. 서회랑터는 석탑과 금당 사이 부분의 기단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기단 폭은 약 5m 정도가 된다. 동회랑의 적심석 보간 길이가 약 42m이며 이를 서회랑에 적용해 본다면 기둥 중심에서 양 기단 끝까지는 각각 40cm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회랑지>

회랑지는 중문지에서 강당지까지 연결되는 합원형식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회랑이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고 볼 때 동서너비 약40m, 남북길이는 82m인 것으로 산정된다. 따라서 적심석의 간격으로 보아 회랑지의 평면은 정면 2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출처:부여군청>

<중문 동쪽 회랑>

<동쪽편 회랑>

<중문 서쪽 회랑>

<서쪽편 회랑>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 국보,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이 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다.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 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등을 따로 만들어 짠 탑으로 부분 재료를 보면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정돈된 형태나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백제탑의 시원 양식으로 이를 본 뜬 탑이 충남지역에 많이 만들어졌다. 1층 몸체 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공적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중문을 들어서면 회랑으로 둘러싸인 경내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전의 사찰들은 목탑을 세웠는데, 정림사지에는 석탑을 세웠다. 화재에 취약하고 유지보수가 힘든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석재를 이용하여 목탑을 모방한 탑을 세웠는데, 석탑 고유의 조형미가 창조되었다.

<1층탑신 몸돌에 새겨진 글씨 탁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局碑銘)’라는 제목으로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새긴 전승기념문이다. 내용은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의자왕을 비롯하여 7백여명을 중국에 압송하였다는 내용과 백제 땅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할 당시 37주, 250현에 모두 24만호, 620만 명이 살았다고 적혀 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석탑은 낮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탑신을 오층으로 쌓았다. 목탑을 그대로 모방한 미륵사지석탑이나 분황사지석탑에 진일보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금당지(金堂址)
석탑 중심에서 북으로 26.27m 떨어져 금당의 중심이 자리잡고 있다. 다만 건물의 남북 중심선이 서쪽으로 24cm 치우쳐 있다. 기단은 2중기단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기단 중 상층 기단은 훼손되어 규모를 알 수 없으나 하층기단은 적심석이 발견되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정면은 7칸에 18.75m이고 측면은 5칸에 13.8m이다. 하층기단의 적심석을 기준으로 기단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동서 20.55m, 남북 15.6m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초석이 놓일 경우 약간의 오차를 감안해야 한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불상을 모시는 금당이 있던 건물터>

하층기단에 남아 있는 적심석의 배치로 보아 건물은 앞면 7칸, 측면 6칸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지 발굴 사진>

기둥이 있었던 자리로 놓였던 심초석을 볼 수 있다.

<모형으로 복원한 금당>

일본 나라 도다이지 금당이나 화엄사 각황전, 궁궐 정전과 비슷한 형태이다.

강당지(講堂址)
강당은 금당에서 북쪽으로 31.7m 떨어진 지점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 석탑으로부터는 59.97m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석탑으로부터 남북 중심축선을 그으면 동편으로 약 20cm을 벗어나 있다. 금당은 중심축선에서 서편으로 약간 치우친 반면 강당은 동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특이하다. 강당은 고려시데 들어와 재건된 것이다. 기단의 구성으로 보아 원래 백제시대 강당이 있었으나 폐허된 후 고려시대 재건하면서 기단을 새로 조성하고 백제시대 적심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강당은 백제 때의 강당 크기를 거의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강당지>

현재 강당지 자리에는 석불좌상의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강당은 고려시대에 중건하면서 석불을 모신 불전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의 불전은 백제의 강당보다 작게 조성되었다. 강당지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합장식 와적기단과 평적식 와적기단으로 구축되었다.

<강당지 발굴 사진과 와적기단>

<건물 내부>

건물 내부에는 고려시대 정림사를 중건하면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보물)이 있다. 불상은 심하게 마모되고 파손되어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지만 두손의 표현을 볼 때 비로자나불로 추정하고 있다.

<모형으로 복원한 강당>

앞면 7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서편건물지
서편건물지는 강당지 서측으로 1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동편건물지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동편건물지와 같은 정면(남북길이) 39.3m, 측면(동서너비) 12.1m인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의 훼손상태가 심각해 일부에서만 기와열이 확인되었다. <출처:부여군청>

<강당과 회랑을 연결하는 서편 건물터>


<서편 건물터 발굴사진>

동편건물지
동편건물지는 강당지 동측으로 1.2m의 간격을 두고 있다. 건물의 남단은 동회랑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며 북측의 건물과 4m 정도 떨어져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남북길이) 39.3m, 측면(동서너비) 12.1m로 강당의 규모와 비슷하다. 기단은 평적식 와적기단으로 구축되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동편 건물지>


동편 건물지 발굴사진

북승방지(북쪽에 있는 승방지)
강당지의 북측기단에서 약 7m 지점에 위치한다. 기단토는 적갈색사질토와 황갈색사질점토를 반복하여 다진 성토층이다. 기단은 와적으로 구축하였으며, 건물 내부에 적심토가 잔존하며 동북측 모서리에 계단지가 보인다. <출처:부여군청>

<강당 뒷편 북승방지 건물터>

<북승방지 건물터 발굴사진>>

정림사지 초석(礎石)
초석이란 기둥으로부터 전달되는 하중을 받아 기단부와 지반으로 전달하는 기초 석재를 초석이라고 한다. 초석은 판축을 한 후 작은 돌들을 견고하게 마련하여 올리는데 초석 윗면은 주좌라 하여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기도 한다. 방형초석은 64.5×65.5cm의 정방형에 가까운 초석면을 가공하였고 윤곽을 바로 잡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높이 3cm 한단 각출하였다. 석재의 두께는 26cm이다. 원형초석은 현재로는 파손을 입어서 부정원형을 이루고 있으나 주위의 윤곽을 일단으로 각출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사용된 원형초석으로 짐작된다. 직경은 51cm 내와이며 석재의 두께는 약30cm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 절터에 발굴된 초석 

연꽃무늬수막새, 백제

연꽃무늬 청자항아리 조각, 청자 항아리조가,  청자 대야조각, 중국 남조, 수~당.성왕이 정림사 를 건립할 때 중국 양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청자를 비롯하여 도자기 파편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벼루, 백제

무늬없는 전돌, 등잔, 백제

그릇다리, 백제

정림사지 소조상은 원래 어디에 봉안되었을까?
정림사지에서는 100여점 이상의 흙으로 빚은 인물상편이 출토되었다. 소형과 중형의 소조상은 목탑 내부의 벽면을 장식하는데 쓰인 것으로 발원자가 다양한 사람을 거느리고 불교에 귀의함을 나타내는 예불도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출토된 대형 편들은 금당에 봉안된 불상의 파편으로 상각된다. 소조상은 고운 태토를 사용하여 대부분 머리와 몸체를 별도로 제작한 다음 기다란 나무를 꽂아 결합하였다. 소형은 거푸집을 이용하여 만들었고, 중형 이상은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 소조상은 모두 흑색, 백색, 자색 등으로 채색을 하였으며, 황갈유가 시유된 것도 발견된다. <출처:부여박물관>

불상의 귀와 손,

작은 소조불상 머리

소조인물상.

소조인물상은 흙으로 빚은 인물상인데, 당시 서역에서 주로 만들었던 불상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남조를 통해서 서역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다.

부처 몸 꾸미개.

부처 몸 꾸미개

정림사 절터

이곳에 정림사가 세워지기 전 공방이 있었던 건물터

부여 정림사지, 사적,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출처:부여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