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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박물관, 백제 불교에 대해 잘 설명해 놓은 박물관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 부여 중심부 정림사 절터에 있는 정림사지박물관이다. 정림사지는 남북조시대 북위(北魏) 수도였던 낙양성을 참조하여 성왕이 사비성을 건설할 때 세운 사찰로 사비시대 백제 불교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정림사지박물관은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백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내용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출토유물이 많지 않기때문에 모형이나 그림 등을 통해 백제불교와 정림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로 전시실을 구성하고 있어 고고학박물관이라기보다는 역사박물관 성격이 강한 곳이다.

전시실은 백제불교문화관과 정림사지관을 구성되어 있다. 백제불교문화관은 불교의 전래과정과 사비성의 사찰분포, 사찰건축, 불교공예 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로 전시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정림사지관은 절터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정림사를 1/12로 축소복원하였으며, 절터에서 출토된 불상편 등을 전시하고 있다. 실제 전시유물은 많지 않은편이지만 백제불교에 대해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박물관이다.

<백제 마지막 도읍이었던 부여 중심부 정림사지 절터에 있는 정림사지박물관>

<박물관 마당>

 박물관의 규모는 크지 않고 전시 유물은 많지 않지만 백제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내용의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유물을 전시한 고고학박물관이라기보다는 백제불교 전문박물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첫번째 전시공간>

불교의 전래 역사와 백제 역대왕의 불교 관련 이야기들을 설명해 놓고 있다.

<전시 내용>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적 사료에 기록된 백제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신문형식으로 적어 놓고 있다. 백제 불교 역사를 다양한 측면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고 있다.

<성왕이 노라사치계를 파송하여 왜에 불교 전파(552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이 전시실에서는 사비시대의 백제 사찰의 가람입지(泗沘時代 伽藍立地)에 설명을 볼 수 있다.

가람배치
가람은 불탑외에 불상을 모셔둔 금당(金堂), 불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출가자들의 공간인 강당(講堂), 승려들이 머무는 승방(僧房), 사찰의 출입문격인 남문과 중문, 범종을 걸어둔 종루 등 각종 건물이 들어서고 일정한 배치 양식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문과 강당을 잇는 회랑(回廊)을 조성해서 불탑과 금당의 성역을 만들었고, 성역주위에 승방과 기타 건물을 배치하였다. 중국의 가람 배치에 영향을 받은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가 독특한 양식의 가람 배치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가람 배치 양식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간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중국 영녕사(永寧寺)
영녕사는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洛陽)에 있었던 대표적인 사찰이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따르면 탑은 519년 효명제 때 준공되어 영희 3년(534) 낙뢰로 소실되었다. 영녕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가면서 남향한 중심축선 위에 남문, 9층목탑, 불전, 강당 등의 건물을 순서에 따라 일직선으로 배치된, 남북시대의 대표적 1탑1금당식 가람배치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낙양 영녕사 가람배치>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洛陽)에 있었던 영녕사(永寧寺)의 가람배치이다. 남문.목탑.불전.강당이 1직선으로 배치된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대표한다. 백제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정림사를 세울때 참조했던 사찰이다.

백제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인 1탑1금당 양식으로 567년에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왕실에서 발원한 사찰이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이 주위를 회랑이 감싸고 있으며 회랑에는 공방지가 마련되어 있다. 절터의 동서북쪽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중문지 밖의 서쪽 배수로에는 석교와 목교의 흔적이 남아 있고 동쪽에도 석교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일반 강당지와 달리 한 지붕아래에 좁은 통로로 연결된 구조가 다른 2개의 방으로 이루어 진 것이 특이하며 공방지로 추정되는 2군데의 건물은 이 절만의 특수한 기능성을 말해준다.


능산리사지 배치도

사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羅城)바깥쪽 능산리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는 능산리사지이다.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인 1탑1금당 양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능산리사지 절터. (2010년 모습)

<능산리 사찰(재현)>

부여 백제문화단지에는 대표적인 백제사찰로 능산리사지를 복원해 놓고 있다. 발굴조사결과를 반영하여 당사 사찰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있다.

일본 사천왕사(四天王寺, 시텐노지)
일본의 초기 가람배치의 전형인 1탑1금당 형식의 전형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을 중심선상에 배열하고 회랑은 중문에서 강당에 이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민달천황 588년, 사공(寺工), 노반박사(鑪盤博士),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 등의 백제기술자들이 도래하여 설립하였고, 그 양식 역시 백제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또한 목탑을 축조함에 있어서도 백제의 5층의 양식을 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사천왕사.

백제 사찰의 양식과 기술 등을 받아들여 세운 대표적인 사찰로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정림사지(定林寺址)는 사비도성 건설시 평지에 설립된 사찰이다. 사비왕궁에서 궁남지로 연결되는 주작대로의 우측에 배치하기 위하여 서남측의 낮은 곳은 메우고 동북측은 깎아 내어 평지를 조성한 후 남북자오선상에 연지.남문.중문.금당.강당을 배치하였다. 특히 이곳은 절터의 남측에 금성산 계곡부에서 형성된 실개천이 동서로 관통되고 있는 점을 고려, 절터의 대지보다 4m 정도 낮은 곳에 연지를 조성하여 자연스럽게 입.출수(入出水)가 되도록 자연을 이용하였다. 사비백제 시대 사지(寺址)는 남측에 자연스럽게 물가와 접하도록 한 것이 특징으로, 능산리사지, 군수리사지 전면에 저습지가 형성되고 있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도성 중심부에 위치한 정림사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찰로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 신도시를 조성할 때 세운 사찰이다. 당시 북조 북위(北魏)의 수도였던 영녕사(永寧寺)를 참조하였다. 1탑1금식 백제사찰의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곳으로 일본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영향을 주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부여 정림사지 절터.

서복사지(西腹寺址)는 산의 경사면에 터를 닦고 건축한 독특한 형태로, 산 아래 남문에서 높이 10여미터의 급경사로 이루어진 계단을 통하여 절로 진입하는 산지구릉상의 가람입지 환경을 지니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부소산성 서문 밖의 서남측 방향에 해발고도 47m 정도의 경사지점이며 남북 52m, 동서 35m 규모로 풍화암반토를 깎아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그곳에 중문.목탑.금당을 배치하였다. 가람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며 목탑자리에서 금동제 과판(銙板)이 출토되어 백제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강당을 건축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백제말기에 건축되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명(寺名)이 전해지지 않아 지형을 반영한 부소산 서복사지라 불린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서복사지

백제 왕궁 뒷편 금강(백마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사진 언덕에 세워진 산지사찰이다. 강당이 없고 목탑, 금당이 일렬로 배치된 작은 규모의 사찰이다.

금강사지(金剛寺址)는 사비도성 근방에 위치한 사찰로, 왕흥사지, 호암사지, 임강사지와 함께 앞쪽으로 강을 두어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며 배후에 사나이 있어 경승이 장엄하고 화려한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가진 대표적인 사찰이다. 물은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천이며 배후에는 지천의 강줄기와 병행하여 해발 80~90m의 구릉산록이 남북으로 길게 달리다가 우회하여 절터를 포요하는 형상이다. 절을 건축하기 위하여 산과 강사이의 충적지를 남북 150m, 동서 170m로 네모나게 구획하여 최대높이 3m로 성토하는 대단위 토목공사를 시행한 후, 그 위에 중문.금당.강당.승방을 배치하였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금강사의 이름이 새겨진 암기와의 출토로 금강사지라 불리고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금강사지

또 다른 사찰 유형으로 금강부근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갖춘 경치좋은 명승지에 자리잡은 금강사지(金剛寺址)이다. 1탑1금당식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고구려 사찰

북조를 통해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 사찰을 1탑3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사신도(四神圖)처럼 중국 한나라의 천문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가운데 팔각형 목탑을 두고 동.서.북에 금당을 배치하고 남쪽에 중문을 열어두고 있다. 신라초기 사찰은 분황사도 이런 형태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백제 사찰

백제 사찰은 중문.탑.금당.가람이 남북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된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가 3탑3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데 이는 1탑1금당씩 3개의 독립된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 형태이다.

신라 사찰

 신란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이후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분황사의 경우 고구려와 비슷한 1탑3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데 반해 황룡사는 1탑3금당식이지만 금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의 경우 감은사지나 사천왕사지에서 볼 수 있는 쌍탑일금당식 사찰이 많이 세워졌다.

탑의 이해
탑이란? 사찰에 모셔진 ‘탑(塔)’은 고대인도어의 ‘스투파(stopa)’에서 유래된 것으로, 죽은 이를 화장한 뒤 유골을 묻고 그 위에 흙이나 벽돌을 쌓은 Dome 형태의 무덤을 지칭한다. 불교에서의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이며, 부처가 깃든 성스러운 곳으로 에배와 수행의 대상이다. 탑을 세우는 것은 부처의 진리를 널리 세상에 보이는 과정이기에 불교의 융성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져 불교미술조형품의 백미로 자리잡았다.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다른나라의 탑

인도의 스투파(Stupa)
스투파의 기본형은 원통형의 기단 위에 사발을 엎은 모양의 복발을 얹고, 그 위에 상자 모양의 평두, 지체 높은 사람이 쓰는 우산모양의 산개(傘蓋), 장식된 짧은 기둥인 찰주(刹柱)를 세운 형상이다. 기단의 둘레를 난순(欄楯)으로 에워싸고 난순의 4방에 탑문을 설치한다. 복발 부위를 돌며 예배할 수 있게 하였고, 표면은 부처의 행적과 전생이야기를 여러 빛깔로 채색된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주요 유품으로는 인도의 바르후트 및 부다가야의 탑, 산치 제 1.2.3탑, 아바라바티탑 등이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인도 스투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스투타는 사발을 얹은 복발형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을 엎어놓은 것 같은 통도사를 비롯한 적멸보궁과 종형승탑에서 볼 수 있다.

스투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중국의 전탑(塼塔)
중국의 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이 주류를 이룬다. 평면의 형태는 원형부터 12각, 8각, 6각, 4각 등 매우 다양한데, 실은 모두 원형에서 온 것이며 이것은 불교 법륜(法輪, 진리의 수레바퀴) 사상의 상징적 표현이다. 특히 인도의 스투파 특유의 상승감과 수직성을 더욱 강조하여 아래의 층단 수를 늘리며, 누각식 건물로 변형되었고, 기존 스투파형태는 누각의 최상층 중심에 올려진 특성을 갖는다.

벽돌로 쌓은 다양한 형태의 전탑

*전탑(塼塔):중국의 황하유역에 발달된 퇴적층의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아 만든 탑.

일본의 목탑(木塔)
뒤늦게 불교가 전해진 일본은 그 탑의 양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한국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다만 재료적 풍부함과 빈번한 지진의 탓으로 무너질 위험이 있는 석조보다 목조를 선호하였고, 다각형 평면을 만드는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사각형 평면을 선호하였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일본의 목탑.

한국과 함께 목탑을 받아들였으며, 지진이 많은 자연적 특징때문에 목탑이 선호되었다.

한국의 탑들

목탑(木塔)
불교의 도입기인 삼국시대의 탑은 돌을 깎은 기단 위에 나무로 세운 누각형식의 탑이었다. 백제는 뛰어난 건축기술을 바탕으로 거대한 목탑을 지었으며 그 흔적이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나 금강사지(金剛寺址)에 남아 있다.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에도 양쪽의 석탑 가운데 거대한 목탑이 있었으며, 백제 기술로 지은 일본의 목탑에서 그 규모와 형상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도 평양의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에서 8각의 목탑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신라에도 백제 기술자 아비지가 지은 황룡사9층목탑이 있었다. 하지만 화재나 온습도, 병충해에 약한 나무의 특성상 목탑은 조선시대의 법주사 팔상전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목탑

삼국시대 불교를 도입하던 초기 사찰에는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목탑이 세워졌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석탑이, 고려시대 이후에는 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불상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남아 있는 목탑이 거의 없다. 조선후기에 중건된 법주사 팔상전이 목탑의 형식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불전이다.

법주사 팔상전.

목탑의 양식이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다.

부여의 백제목탑
우리나라 탑의 초기양식으로 여겨지는 목탑(木塔)은 단어의 뜻 그대로 목재로 건립한 탑파(塔婆)를 말한다.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목탑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다 소실되고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백제의 목탑지는 부여 능산리사지 목탑지와 왕흥사지 목탑지, 신라의 목탑지는 경주 황룡사지 목탑지, 고구려의 목탑지로는 평양 청암리사지 목탑지가 대표적이다. 현재 목탑 양식을 전해주는 유례로서는 조선후기(17세기초)의 건축물인 법주사 팔상전(八相殿)이 있을 뿐이다. 삼국 중에서 목조 건축이 가장 발달되었던 백제는 조탑(造塔) 기술 역시 뛰어났다. 당시 신라는 황룡사9층 목탑을 세울 때 백제의 건축가인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하여 건립하였으며,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백제의 건축가와 승려들이 건너가 일본 최초의 가람인 아스카사(飛鳥寺)에 목탑을 세웠다. 백제의 왕도, 부여에는 백제의 찬란했던 흔적을 말해주는 여러 목탑지가 확인되었으며, 목탑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남아 있는 기단부 등의 흔적과 주변 출토유물을 통해 그 규모와 뛰어난 기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왕흥사지 목탑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기와 사리공양구 내 유물은 백제사를 재조명할만한 뛰어난 문화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부여의 목탑지로는 군수리사지, 금강사지, 능산리사지, 부소산성 서복사지, 용정리사지, 왕흥사지가 확인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복원해 놓은 능산리사지 목탑.

삼국시대 백제의 목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백제 목탑지

전탑(塼塔)과 모전석탑(模塼石塔)
흙으로 만들어 구운 벽돌을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전탑이 넓은 지역에 상당한 양으로 제작된 반면 우리나라는 특정지역, 특정시기에만 제작되었다. 그 이유는 벽돌을 쌓아 만듬으로써, 석탑에 비해 영구적이지 못한 재료적인 한계와, 표현에 있어서 한국 특유의 곡선을 표현하지 못하는 조형적인 한계 때문이다. 하지만 문양을 찍어내는 틀을 이용하여 전탑을 이루는 벽돌 하나하나마다 무늬를 새긴 장식적 조형성이 엿보인다. 현존하는 전탑은 안동 신세동 전탑, 동부동 전탑, 분황사의 안산암을 벽돌처럼 얇게 다듬어 만든 모전석탑 등이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전탑

중국에서 주로 세워졌던 벽돌로 쌓은 전탑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일부 만들어졌다. 석탑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지고 지붕을 비롯하여 곡선적인 표현에 어려움이 있어 선호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전탑인 안동 조탑동오층전탑

석탑(石塔)
탑의 영원성을 추구한 결과물로, 돌을 이용하여 만든 탑이다. 석탑은 목탑의 재료적 한계를 극복할 화강암의 채취가 용이한 지리학적 환경, 민간암석신앙이 발달하던 인문학적 환경, 그리고 이들을 다룰 수 있는 건축적.조각적.기술적 환경, 이 세가지 요인의 결합체로 한국만의 독창적인 석탑으로 탄생된 것이다. 그 형태를 살펴보면 목탑의 가구식구조(架構式構造)로, 크고 작은 석재들을 조각해 조립하였고, 사리가 모셔진 집을 상징해 건물을 상징화한 세부장식들이 엿보인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석탑의 구조,

석탑은 크게 구조물을 지탱하는 기단부, 사리를 봉안하는 탑신부, 장식적인 여러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상륜부로 이루어진다. 석탑은 석재를 이용하여 목탑을 모방하는데서 출발했는데, 간략화 등 여러 과정을 통해서 석탑만은 독특한 조형미를 창조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불국사 삼층석탑.

조각수법이나 비례 등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백제계 석탑
백제계 석탑이란 백제시대 만들어진 탑과 백제의 영역인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나타나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탑을 말한다. 백제인들은 중국 남조의 목조탑 양식을 완숙하나 백제의 건축기술로 번안하여, 신성한 바위를 연상시키면서도 주변에 흔한 돌을 재료로 변하지 않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통일신라시대 사라졌던 백제계 석탑은 고려시대 들어 정림사지석탑을 모범으로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지방호족의 세력을 인정하면서 고려문화로 포섭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호족들은 지역색이 뚜렷하고 개성이 있는 탑을 만들며 백제 문화의 부흥을 꿈꾸었다. 백제계석탑은 목탑을 화강암으로 번한한 데서 시작하낟. 마감 석제의 각을 죽이고 직선에 가까운 곡선을 써서 부재의 이용이 선적이고 부드럽다. 백제계탑은 기단부가 약화되어 있다. 비로 지상에서 솟아난 듯한 느낌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의 날씬함까지 더해져 탑에 상승감을 준다. 이에 비해 신라계 석탑은 안산암을 주재료로 전탑향식을 모방한 분황사모전석탑에서 시작하여 불국사 석가탑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날카로운 직선과 옥개석과 처마의 짧은 거리가 강건하고, 탑이 층 단위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면적이다. 기단 역시 신라계 석탑은 초층, 중층의 2중 기단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기단부가 매우 크고 강해 보인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미륵사지 석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석재를 이용하여 목탑을 모방하여 쌓은 초기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특징: 목탑의 가구수법을 충실히 번안, 거의 모든 부재를 낱개로 사용, 완만한 체감율
  • 옥개부: 3~4단의 내쌓기 기법의 옥개받침, 얇고 넓은 옥개석이 추녀곡선부분에서 가볍게 반전, 옥개석 한층이 많은 낱개 돌
  • 탑신부: 문안에 십자형 내부공간, 초층 우주의 민흘림과 안쏠림, 탑신의 귀솟음, 탑신 한층이 많은 낱개돌
  • 기단부: 낮은 이중기단, 초석과 계단이 있는 목조건축적기단

백제전형석탑인 정림사지오층석탑

석재로 목탑의 구조를 모방해서 쌓았지만 석탑고유의 조형미가 창조되었다.

  • 특징:목조번안 석탑을 넘어 복격적인 석탑의 모습, 낱개돌을 쓰면서도 목조탑보다 부재를 생략하거나 간략히 정돈, 체감률이 다소 급함
  • 옥개부: 각진돌 위에 모죽임 돌을 얹어 부드러워진 옥개받침, 두꺼운 각형의 탑신과 암석, 평평한 얇은 옥개석이 추녀곡선에서 가볍게 반전
  • 탑신부: 우주의 민흘림과 안쏠림
  • 기단부: 낮은 이중기단, 초석과 계단이 있는 목조건축적 기단

고려시대 순수백제석탑인 장하리삼층석탑

통일신라 멸망 이후 백제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줄 의도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에 비해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떨어진다.

  • 특징:전체적으로 정림사지오층석탑 모방, 낱개돌을 조립해 구성, 체감률이 급하고 규모가 작음.
  • 옥개부: 옥개받침의 숫자가 1,2개로 줄어듬, 평평하고 얇은 옥개석이 추녀곡선에서 가볍게 반전,
  • 탑신부: 층탑신 우주의 민흘림과 안쏠림, 두껍고 각진 탑신괴임과 옥개받침,
  • 기단부:단층기단

고려시대 절충양식석탑인 담양남산리 오층석탑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으나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 특징:백제계 석탑에 신라석탑 양식을 부분적으로 차용, 대부분 5층이상, 옥개석 체감비는 적고 탑신 체감비는 커서 가늘고 높음, 전라도 지역에 성행
  • 옥개부: 좁고 둔해진 신라식 옥개석이 모서리에서 가볍게 반전
  • 탑신부: 낱개돌을 조립한 백제탑적 요소
  • 기단부:단일석기단 혹은 단층기단 두 개를 합친 높은 이중기단


백제계 석탑 분포도

석탑을 세우는 모습

백제의 사리장엄(舍利莊嚴)
사리(舍利)는 부처님의 진신(眞身)을 상징한느 고귀한 예배대상이다.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불교도들은 진귀한 재료를 가지고 정성을 기울여 사리를 아름답게 장엄하여 왔다. 장엄(莊嚴)이란 불교적인 것을 화려하고 엄숙하게 장식하는 것을 뜻하며,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는 사리기에서부터 그와 함께 납입되는 각종 유물 즉 공양품에 이르기까지, 사리에서 탑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의 것을 말한다. 백제의 사리장엄구로는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불상2점과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널리 알려졌는데,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용기는 발견되지 않아서 한국의 사리용기는 신라 분황사(634)와 황룡사(645) 사리기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지만 2007년 부여 왕흥사지(577)에서 백제의 사리용기가 처음 발견되었고, 그 연대가 신라 사리용기에 비해 57년이나 앞서기 때문에 한국 사리용기의 기원이 백제에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작업 중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백제 석탑의 사리장치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엄장구.

석탑에서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공과 사리엄장구 봉안상태

군수리사지, 1934년 발굴
군수리사지는 백제 사찰로서 최초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1탑1금당식의 백제 사찰의 기본적인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1936년 목탑의 심초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지표 아래로 약 1.2m 깊이에서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되었고 0.3m 더 내려간 곳에서 납석제불좌상.금환.소옥 등이 출토되었다. 심초석은 여기서 다시 0.3m 밑에서 확인되었으나 사리공은 마련되지 않았으며 사리용기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목탑지에서 발굴된 불상을 사리구, 공양구, 지진구 나아가 사리의 대용품 개념으로 보는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부여 궁남지 서쪽에 위치한 군수리사지.

1930년대 목탑지 심초석 아래에 금동보살입상을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지만 사리를 담는 그릇이 발견되지 않았다.

군수리사지 목탑지와 심초석.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유물

능산리사지, 1995년 발굴
능산리사지는 능산리고분군과 나성 사이에 위치하며 1탑1금당식의 전형적인 백제가람배치를 보여준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1995년 목탑지 조사당시 심초석의 동쪽에서 비스듬히 넘어진 채로 출토되었다. 화강암을 이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윗면이 둥글고 아래가 평평한 형태이다. 사리기를 봉안하기 위한 감실의 앞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백제 창왕(위덕왕) 13년(567)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심초석 주변에서 금속유물과 소조불, 그리고 유리제품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심초석 위에 별도의 사리장치를 만들어 놓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공주가 사리 장엄구를 발원한 점과 사리장치의 형태, 봉안위치와 방법 등에서 당시 백제 의례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능산리사지 목탑지와 심초석.

석조사리감이 출토되었다.

능산리사지 목탑지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사리감.

능산리 출토 유물

왕흥사지
1934년 『王興』명 기와편이 발견되면서 사찰의 이름을 찾게 된 왕흥사(王興寺)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사찰이다. 2007년 목탑지 심초석(사리장치석)의 사리공에서 청동제사리함, 은제사리병, 금제사리병이 출토되었다. 불사리를 봉안하는 사리기는 『대반열박경』 등의 불교 경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여러가지 재질을 이용하여 내부로 갈수록 귀한 재질의 용기로 중첩하는데 왕흥사지 사리기 역시 이러한 사리봉안의 전형을 보여준다. 청동함 동체의 명문을 통해 왕흥사의 창건이 577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창왕(위덕왕)이 부왕인 성왕을 위해 능사(능산리사지)를 세운지 꼭 10년 뒤의 일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왕흥사지 절터.

중문, 목탑지, 금당지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건너편에 부소산성이 보인다. 부소산성 중턱에 서복사지가 있다.

사리엄장구가 출토된 목탑지 심초석(복제품). 석제사리장치 뚜껑(복제품), 사리공(舍利孔),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복제품, 보물

금제사리병, 은제사리호, 청동제사리합. 청동제 사리합에는 “정유년(577)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를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왕흥사지 사리공양구
왕흥사지 목탑의 심초석(사리장치석) 남쪽면을 중심으로 다량의 사리공양구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대부분은 장신구이며 재질은 금, 은, 동합금, 옥, 유리, 철 등 다양하다. 금제품으로는 목걸이와 귀걸이, 탄목금구, 금모장식, 구슬, 금실 등이 있으며, 동합금으로 만든 젓가락, 팔찌, 동전 등과 비녀, 곱은옥 등 옥제품도 있다. 특히 운모로 아주 얇게 만든 연꽃모양장식이나 지름 5mm의 작은 옥에 구멍을 뚫어 이은 정교한 기술은 발달된 당시의 세공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공양구를 통해 백제왕실 및 귀족사회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목탑지 심초석에 출토된 다양한 사리공양구.

백제 석등, 찬란한 진리의 불을 밝히다.
석등은 돌로 만든 등으로 불을 사용하여 어두운 곳을 밝히는 기구로서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한다. 불빛은 어두운 밤 사물을 비추는 도구인 동시에 부처님의 진리를 비쳐줌으로써 중생들을 깨우치고 불가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불가에서 석등은 조명시설인 동시에 신앙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조형물이다. 등(燈)은 불교가 성립되기 오래전부터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사찰 가람의 중요 구성요소로 흡수되어 부처의 지혜와 해탈, 자비와 재생 등의 이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불교의례에 있어서 등을 밝히는 행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화엄경(華嚴經)』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의하면 등은 등명(燈明) 하나 하나가 수미산(須彌山)과 같으며 등유(燈油)는 마치 대해(大海)와 같아 등(燈)공양이야말로 최고의 법공양(法供養)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불설미륵하생성경(佛說彌勒下生成經)』에는 그 자체가 미륵불의 화신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석등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중요한 조형물로 건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부여 가탑리와 익산 미륵사지 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역시 선도적 역할은 사비 백제 사람들의 몫이었더너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등은 온전하게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대체로 평면이 사각형인 지대석을 놓고 복련(伏蓮)의 연꽃무늬가 장식된 하대석(下臺石)을 올린 다음 간주석(竿柱石)을 세우고 앙련(仰蓮)이 장식된 상대석을 올려 화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나갈 수 있도록 한 화사석(火舍石)과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연꽃무늬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어 화려하지 않지만 정연하며 정제된 백제 장인(匠人)의 뛰어난 수법을 알 수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백제 석등의 구조

가탑리사지(街塔里寺址) 석등, 국립부여박물관

1983년 부여 가탑리사지 시굴조사에서 석등 하대석이 발견되었다. 8엽의 단판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앙에 낮은 8각턱을 만들고 가운데 네모 구멍을 팠으며 그 중앙을 지름 7.5cm의 원공이 관통하는 이중의 간주공을 갖추고 있다. 연꽃무늬는 폭이 넓어지는 형태로 대체로 길쭉하면서도 매우 늘씬한 모습이다. 음각으로 표현하였음에도 전체적인 볼륨감이 풍부하며 엷고 부드러운 표현수법으로 백제 장인의 능숙한 석재 가공기술을 보여준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정치리사지(鼎峙里寺址) 석등,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공주시 탄천면 정치리사지에서 출토된 석등 하대석 부재이다. 네모꼴의 하대석과 원구형의 연화대가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방형의 하대석은 두께가 얇은 판석으로 익산 미륵사지 동원 석등 하대석과 거의 동일한 구조와 형태를 하고 있다. 세장한 1단의 연잎은 원래 12엽으로 추정되며 사이엽은 하단에 일부 표현되었다. 상면에는 간주공으로 보이는 큰 네모구멍이 관통하고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제석사지(帝釋寺址) 석등,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1942년 “帝釋寺”라고 새겨진 명문기와가 출토되면서 알려진 제석사지는 그 터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남아 있다. 제석사지 석등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위쪽 중앙에 8엽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추녀마루가 비스듬히 내려오면서 끝에 살짝 반전을 주어 조형미를 더하고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미륵사지 석등,

익산 미륵사지 석등은 불가(佛家)에서 제일 으뜸으로 치는 등공양이 백제에 실현된 유적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람배치에 있어서 석등의 위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중원(中院).동원(東院).서원(西院) 등 3탑.3금당으로 조성된 미륵사지에는 모두 3기의 석등이 각각의 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백제의 기단기술(基壇技術)
기단은 건물을 짓기 전 기초가 되는 땅을 단단히 하고 높여 건물을 돋보이게 하고 습기나 침하를 막는 기술이다. 백제는 고유의 뛰어난 건축기술을 바탕으로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와적기단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왕궁, 사찰, 일반건물 등 거의 모든 건물에 사용된 와적기단은 일본으로 전파되어 교토의 견원폐사, 나라의 회외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백제의 판축기법(板築技法)
백제 장인들이 건축물의 지반을 다지기 위해 사용한 기법은 흙을 한켜 한켜 다져 쌓아 여러 겹으로 단단하게 다진 판축기법으로 한 켜의 다짐 두께는 약 3~8cm이다. 먼저 백제 건축장인들은 다지고자 하는 지반의 크기를 정하고 흙을 파냈다. 깊은 것은 10자 이상이 되기도 하고 넓이는 적어도 건물 크기보다 컸다. 일단 흙을 파낸 구덩이에 10~20cm 가량의 흙을 뿌린 뒤 몽둥이같이 생긴 ‘달고’를 이용해 흙을 다졌고, 때론 석회와 마사, 점토질 흙을 섞어 나무뿌리조차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기법은 이미 한성시대 풍납토성.몽촌토성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는 초기부터 상당히 보편화된 기법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백제의 뛰어난 판축기법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한성백제기 풍납토성

 축석기단(築石基壇), 자연석이나 가공석을 첩첩히 쌓아 막음하는 기단이다.

 가구기단(架構基壇),

깎은 돌을 이용하여 석탑을 쌓듯이 위아래 긴돌(장대석)로 된 지대석을 눕혀 깔고, 그 위에 평평한 면석을 세우고 사이를 기둥 모양의 우주석을 세우고 또 다시 그 위에 갑석을 덮어 마감하는, 마치 돌을 목조가구처럼 쌓아 만든 발달된 수법의 기단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와적기단(瓦積基壇),

백제에서도 문화가 융성한 사비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와적기단은 돌이나 흙과 같은 자연재료 외에 와편을 가지고 기단을 쌓을 만큼 기와술이나 판축술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백제인들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국 남조와의 교류.일본에의 기술전파를 말해준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백제의 기와

삼국시대 기와를 제작하는 모습

백제의 목조건축기술

보와 도리걸기

주심포 공포

하앙식 조립도

불상이란? ‘깨달은 자(覺者)’라는 의미를 가진 부처, 붓다(buddha)를 조각(彫刻)이란 형식으로 형상화하여 불교의 예배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며,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법을 쉽게 보여주고 터득하게 하는 점에서 교화(敎化)의 감동을 주는 매개체가 된다.

백제의 불상
백제의 불상은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되었지만, 불교가 대중화된 6세기에 이르자 백제인들에 의해서 직접 제작되었다. 특히 불상의 조형성은 사비시대 성왕(聖王)의 불교중흥정책과 맞물리며 정점에 이른다. 백제의 불상들은 우아하면서도 날씬한 체구, 길면서 팽창된 얼굴, 부드러운 양감 등 귀족적 미의식을 보여주면서도 얼굴 가득한 미소로 편안암과 유쾌함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불상은 당대 중국의 남조(南朝) 문화의 특성을 받아 들이는 동시에 그를 뛰어넘는 백제화를 이루었고, 일본의 불교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여래상과 보살상의 부분 명칭

백제 불상 특성

1. 삼존불(三尊佛), 삼존불은 가운데 여래를 좌우에서 보살이 모시거나, 가운데 보살을 본조으로 좌우의 두 여래가 모셔진 형식의 불상을 말한다. 백제에서는 법화경 사상에 따라 석가여래와 다보.미륵보살 삼존불, 제화갈라보살과 석가불.미륵불, 혹은 관음보살과 아미타여래.약사여래 삼존불이 만들어졌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정지원’이 새겨진 삼존불, 보물, 부여 부소산.

광배 뒷편에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해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는 글이 적혀 있다. 개인이 불상을 만들어 공양하던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시대 말기 간략화된 형태의 불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2.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튼 상태의 보살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것으로 미래불인 미륵이 도솔천에서 정각(正覺)에 잠긴 모습이라 여겨진다. 백제인은 불교의 엄격한 계율을 중시함으로써 백제 땅에 미륵극락정토를 실현하겠다는 미륵신앙적 의지를 반가사유상에 표현하였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삼국시대

그 섬세한 표현과 뛰어난 조형미로 석굴암 본존불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불상이다. 1920년대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나 그 근거는 없으며, 일본의 아스카시대에 만들어진 목조반가사유상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3.보주를 든 보살, 봉보주보살상(捧寶珠菩薩像)은 보주를 양손에 마주 든 보살이다. 화엄경(華嚴經)이 전래되면서 유행한 관음신앙에 따라 중국에서 관음보살의 표식이 정해지기 전의 백제만의 방식이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중 우협시 보살상.

중국에서 관음보살입상이 형태가 정형화되기 이전 백제만의 보살입상이다.

불상제작과정.

정림사지 유물 전시실로 연결되는 통로

정림사 모형.

발굴조사된 결과를 바탕으로 재현한 당시 사찰의 모습이다.

백제 사비성 중심부에 있던 국가적인 사찰로 백제 사찰 건축의 모범이 되었던 곳이다.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축으로 일렬로 배치된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목탑 대신 석탑을 세움으로 공간적을 넓어 보인다. 후대에 세워진 궁궐 정전 영역과 비슷하다.

정림사에서 석탑을 중심으로 예불을 올리는 모습.

발굴된 유적이나 사료 등을 참조하여 재현한 삼국시대 사비성.

북쪽 부소산성 아래 궁궐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과 서쪽에 큰 연못을 두고 있다. 궁궐과 궁남지 사에는 주작대로가 있으며, 그 중심에 정림사가 있다.


부여현지도,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편 中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局碑銘),

정림사지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에 새겨진 당나라장군 소정방의 전승기념문이다.

정림사지초석, 정림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건물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