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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박물관, "부여의 옛 이야기"

정림사지박물관에서는 “부여의 옛 이야기”라는 제목을 부여지역 역사를 보여주는 특별전시를 개최하였다. 기증유물을 중심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부여지역의 역사를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사시대 부여지역은 송국리유적지를 비롯하여 여러곳에서 주거유적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시대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여러 유적지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출토유물은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금번 전시에서는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늘날 부여는 조선시대 부여현, 임천현, 홍산현, 석성현과 공주목 일부가 합쳐진 지역이다. 조선시대 유물을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과 명문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 초상화 등 조선시대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주로 전시하였다. 금번 전시는 유물들이 역사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지는 않지만 지역을 간략하게 소개할 수 있는 소박한 전시회였다.

“부여의 옛 이야기”

정림사지박물관에서는 “부여의 옛 이야기”라는 제목을 부여지역 역사를 보여주는 특별전시를 개최하였다. 기증유물을 중심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부여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박한 전시회였다.

선사시대의 부여
부여는 인류가 문명활동을 전개한느데 매우 유리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백제가 천도하기 이전부터 화려한 선사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백마강 구비를 따라 펼쳐진 너른 평야는 일찍부터 선주민의 삶의 터전으로 정착되었던 지역이었다. 특히 청동기시대에는 선진농법을 기반으로 풍부한 농업잉여생산물이 확보되어 소위 송국리형 문화를 창출하였다. 송국리유적에서는 주거지와 고분이 발굴되고 비파형동검과 바라진 아가리, 배부른 몸통, 납작한 밑을 가진 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등의 성과를 거두며 한반도의 청동기시대사에 송국리형 토기와 송국리문화권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형성하였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부여지역 출토 석기편,

석검과 화살촉, 청동기시대

백제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으로서 6대 123년 간 백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부여에는 선사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나 그 역사적 중심은 백제시대이다. 부여에는 수많은 불교유적을 비롯하여 고분유적, 관방유적 및 생활유적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되어 있다. 그 중 불교문화는 사비백제기 문화의 총아라 할 수 있을 만큼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침류왕 원년(384)이지만, 사비시기에 이르러 만개하여 사비도성과 백제후기 문화의 바탕은 불교가 중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는 정림사지, 능산리사지, 군수리사지, 왕흥사지, 금강사지, 용정리사지, 외리사지, 가탑리사지 증이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연화문수막새편, 백제

삼족토기와 직구소호, 백제

고려
통일신라와 고려에 이르러 중앙체제의 견제 속에서 부여의 위상은 약화되었으나 문화적 전통은 지속되었다. 불교문화로 대표되던 부여의 문화도 부침을 겪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야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지방마다 특색을 가진 다양한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부여에는 정림사, 무량사 등의 사찰과 부여 장하리삼층석탑, 무량사오층석탑 등의 백제계 석탑이 세워졌다. 또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임천 성주산의 보광사도 고려시대의 이름난 큰 절이었으며 이 사실은 보광사 대보광선사비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토기매병, 흑갈유소병, 흑갈유편호, 고려시대

청동대부완, 고려동경, 비녀,고려시대

상감국화문대접, 앵무문청자대접, 상감청자팔각접시, 고려시대

조선
부여의 조선시대 유적은 다른 시대에 비해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하여 지방마다 향교와 서원 등을 세웠는데 부여에도 부여향교, 석성향교, 임천향교, 홍산향교를 비롯한 유교관련 유적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부여현, 석성현, 홍산현 관아 등이 있으며, 민속자료로 지정된 민가건물인 부여 민칠식가옥, 부여 정계채가옥 등이 있다. 조선시대 가마유적으로 나령리, 지선리, 운치리, 갓점골, 현미리, 청남리, 가화리 백자 가마 등이 조사되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조선시대 고지도 속의 부여 (부여현, 임천현)

홍산현, 석성현

망새기와(임천관아), 벼루, 조선,

분청사기조화초화문편병(기탑리 건물지), 등잔(부소산성), 청화백자소호(송학리),

민칠식 가(家)
부여 민칠식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92호로 부여읍 중정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사대부가의 주거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보수할 때 발견된 기와로 보아 적아도 숙종31년(1705)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수는 상량문에서 “숭정기원후사기축”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순조29년(1829)에 크게 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사랑채, 안채가 함께 이어져 본채를 이루고, 그 앞에 행랑채, 곳간채 등의 부속채가 달려 있으며, 본채 서측 편에 조금 떨어져 별채가 자리잡고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여흥민씨,
고려중엽에 중국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민칭도(閔稱道)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생긴 명문가로 본관은 여흥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다. 고려후기 신진사대부명문가로 시작하여 왕실과의 혈연관계를 지속하고, 수많은 공신을 배출하였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문가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민칠식가옥

고문서

정언욱 가(家)
정언욱(鄭彦郁, 1713~1787)은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사문, 본관은 동래이다. 영조17년(1741)에 급제하여 사간원 헌납(獻納), 사헌부 지평(持平), 승정원 부승지 등을 거쳐 사표가 되었다고 한다. 문중 후손들 사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하여, 정언욱의 후손들은 특별히 ‘부여정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다. 정언욱의 저술로는 일기 17권과 잡기 등이 전한다. 정언욱은 본래 전라도 진산(지금의 충남 금산)에 살았으나 뒷날 부여에 정거하였다. 부여읍 염창리에 그를 기리는 영당이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동래정씨정언욱일가고문서,
부여군 향토유적 제96호로 총4종70점으로 강동일기와 교지 그리고 고문서, 사간원원납대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일기는 조선후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고, 정언욱 개인에 대한 연구는 물론 부여의 지방사 연구에 큰 가치가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강동일기(江東日記)

교지(敎旨), 사간원원납대장(司諫院願納臺帳)

정언욱(鄭彦郁)
조선후기의 문신인 정언욱(1713~1789)의 초상화는 두가지 본이 전해온다. 하나는 관복으로 정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지에 그린 초본이다. 정장본은 작가를 알 수 없고, 초본의 작가는 평양 화가인 이유덕이다. 이 초상화는 초본으로 정언욱의 63세때 모습을 영조51년(1775)에 비단에 그린 초상화이다. 영정은 전체적으로 노재상의 근엄하고 인자한 풍모와 성품이 눈에 띄며 상반보다 하반신이 확대된 모습으로 안정감을 더해준다. 오사모를 쓰고 단학문양의 흉배를 착용한 정장관복차림으로 교좌에 약간 틀어 앉은 좌안8분면의 전신좌상으로 뒤에는 호피를 깐 모습이 약간 보이도록 하여 사대부의 권위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초상화를 그린 시기와 화원을 기록한 화기가 별도로 제작되어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수준 높은 화풍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정언욱 영정

정언욱 영정 화기

부산서원(浮算書院)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에 위치한 부산서원은 1719년(숙종45)에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의 장학을 위해 지역유림들의 공론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다. 김집(1574~1656)은 호서사림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방관으로 부여에 처음 부임하여 이 지방인들과 교호가 두터웠으며, 이경여(1585~1657)는 효종 때의 영의정이었으나 북벌계획이 실현되지 않자 부산에 은둔한 명신이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이후 복설을 위하여 1970년대 ‘부산서원 복설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삼문과 설단을 세웠으며 1977년 충의사 건물을 완성하였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부여 부산서원

부산서원고문서
부여군향토유적 제68호로 서원이 훼철되면서 주로 18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당시 유사 이상을 ㅣ록한 창건소제명록, 서원임원명단, 규약, 서제의 유생명단, 전곡관계를 정리한 문서, 노비대장 등이 있다. 18세기 조선시대 서원의 운영실태와 부여지방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부산서원 전민안(田民案)

부산서원 절목(節目), 부산서원 사적(事蹟)

부산서원 규약

부산서원 서재유안(西齋儒案), 변무록(卞誈錄)

심원록(尋院錄), 부산서원 양연보안(良煙保案)

칠산서원(七山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로 부여 임천면 칠산리에 소재하고있다. 조선후기의 유학자인 시남 유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1686년(숙종12) 유림에 의해 유계의 학문과 덕행 그리고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1679년 병자호란 때 유계의 척화 충절이 받아들여져 ‘칠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6년 지방유림과 후손이 협력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설되었다. 건물은 사당, 강당, 내삼각, 장판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임천 칠산서원

임천 칠산서원목판
부여군향토유적 제81호로 서남 유계가 가례집해를 개작하여 저작한 가례원류, 가례원류속록, 서남문집, 계사년유윤왕복서, 시남사계, 시남연보 등 관련되 480여판이 현존해 있으며 병자호란과 관련된 정국과 사회양상, 역사관, 경제관,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가례원류목판(家禮源流木板)

임천서원 목판

판식(版式),

판식은 책의 쓰기나 인쇄한 면의 짜임새를 말한다. 목판본일 때에는 “版式”이라는 한자로 쓰기도 한다. 시대적인 특성이 있어 책을 간행한 시기를 추정하는 데 한 요소가 되므로 판본의 감별에 매우 중요하다.

창렬사(彰烈士)
시도기념물 제22호로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서원이다. 병자호란 때 청과의 전쟁을 불사한 조선 중기의 충신 윤집.오달제.홍익한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숙종 43(1717)년에 창건되어 경종 원년(1721)에 사액을 받았다.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에도 삼학사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남겨둔 서원이다. 사당 건물은 앞면 5칸.옆면3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내삼문을 거쳐 아래로 내려가면 강당 건물이 있고 그 앞에 근래 지은 외삼문이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삼학사전(三學士傳)
삼학사의 전기로 1671년(현종12)에 송시열이 편찬하였다. 1636년(인조14)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을 때 척화론을 주장하여 나중에 청나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삼학사전(三學士傳),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 전기이다.

삼학사전목판각(三學士傳木版刻),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를 새긴 목판각으로 총14매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창렬사에서 보관 중이던 것을 정림사지박물관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은산금공리산신도
기이한 모양을 한 낙락장송 아래 호랑이에 기대 앉은 산신령의 모습을 그리 탱화이다. 보통 산신탱화는 초본을 바탕으로 그리는데 금공리 산시도는 먹선으로 초를 잡은 다음 적색, 청색, 녹생, 백색을 사용하여 곧장 화면을 구성하였다. 사찰의 산신각에서 볼 수 있는 탱화류와는 달리 공간에 바탕색을 칠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신령스런 느낌이 더 들도록 하였다. 크기는 작지만 조선 후기 전형적인 산신도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으로 평가된다. 마을 공동체의 핵샘을 이루었던 산신당에 모셔진 산신도라는 데서 산신 신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은산금공리산신도

부여천진전 단군화상
개국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의 화상을 처음 그린 사람은 신라 때의 화가 솔거인데, 꿈속에 나타난 단군에게 신필을 받아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환인, 환웅, 환검의 화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확인할 수 없다. 전국 여러 곳에 모셔져 있는 단군 영정은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이 영정은 다른 것들에 비해 크기는 작은 편이지만 제작연대나 채색, 바탕, 필선, 구도 등에서 수준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산 인조견에 엷게 채색하여 그린 전신좌상으로, 그린 시기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대종교 지도자이자 항일운동가인 강우가 황해도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부여천진전단군화상

계성군(鷄城君) 초상화,  조선말기 관료 김동효(1861~?)

계성군(鷄城君) 초상화, 조선 중종 때의 무신 계성군 김임의 초상화이다. 김임의 자는 중겸, 본관은 경주이다. 성종11년(1480) 무과에 급제한 뒤 연산군 12년(1506) 양주목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이듬해(1507)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되고 계성군에 봉해졌다. 이후 한성판윤을 지냈다. 이 초상화는 석지 채용신이 그린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이다. 제작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정국공신계성군화상’이라고 한 화기(畵記)는 후대에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가슴 부위 흉배를 중심으로 하반신 부분의 바탕색이 다르고, 영정 주인공의 생존 연대와 양식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족보에 의하면 1916년 8월에 영정의 하반신을 임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말기 관료 김동효(1861~?)의 전신상 영정이다. 조선말기 화원으로 초상화의 대가였던 석지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그의 초상화에서 보여지는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

선비의 벗 문방사우

 부여의 옛 이야기, 정림사지박물관 기증.기탁 특별전
정림사지박물관은 기획특별전으로 본 박물관의 소장유물 중 기증.기탁유물을 중심으로 ‘부여의 문화유산 展’을 준비하였습니다. 기증은 문화재를 아끼는 또 다른 표현으로 문화재의 가치를 공유하고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문화재의 기증은 우리 모두가 문화유산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며, 전시나 학술 연구 등에 공개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도 매우 큽니다. 또한 문화재의 도난, 훼손으로부터 국가적 자산을 보존하고 우리의 역사를 영구히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정림사지박물관에서는 기증.기탁 받은 소중한 문화재의 보존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저너시로 기획함은 물론 학술연구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본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유물을 고고, 인물, 명가, 교육, 신앙을 주제로 분류하여 제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기증.기탁자의 뜻을 기리고 기증.기탁유물의 관리 및 활용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출처:정림사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