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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헝가리왕실의 보물"] 영생의 소망, 헝가리 왕실과 귀족의 종교

헝가리는 11세기 카톨릭을 받아들인 이후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카톨릭국가였다. 16세기 유럽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헝가리도 신흥귀족을 중심으로 신교로 개종하였다. 특히, 16세기에 헝가리가 오스만제국에 패하여 국가가 분열될 때 오스만제국 관할 지역에서 신교로의 개종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오스만제국이 물러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헝가리에서는 반종교개혁이 일어났다. 19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에 대한 차별이 없어질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대표적인 카톨릭국가로 남아 있었다.

전시의 마지막 주제는 헝가리인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위해 마련된 “영생의 소망, 헝가리왕실과 귀족의 종교”이다. 전시된 유물은 많지 않으며, 카톨릭 사제들의 복식 등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영생의 소망, 헝가리 왕실과 귀족의 종교”

전시의 마지막 주제는 “영생의 소망, 헝가리 왕실과 귀족의 종교”라는 제목으로 헝가리의 종교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헝가리는 30년 전쟁 당시 신교도로서 참전하기도 했으나,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으면서 카톨릭국가로 발전했다.

전시에서는 카톨릭 주교의 복식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성골함, 1760년대,

성 에메리코(Saint Emeric, 1007년경~1031년)의 성골함으로 흉상은 은으로, 받침대는 황동으로 주조되었다. 헝가리의 여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였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의 명령으로 제작된 헝가리 역대 성인의 성골함 중 하나이다.

성경책 보관함, 17세기말

법랑 묵주(17세기 중엽, 왼쪽), 홍옥수 묵주(1640년경, 오른쪽)


성모자상, 18세기 말,

러요시 1세(Lajos I, 재위 1342~1382년)가 몽골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며 제작된 성모자상을 18세기에 판화로 모사한 작품이다. 머리어젤(Mariazell) 대성당에 봉헌되어 있는데, 이 대성당은 헝가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 중 하나로 러요시1세가 건축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성작, 18세기 중엽,

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이다. 컵의 외부에는 로코코 양식의 테두리 안에 모세가 바위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장면, 가나안의 포도송이 등 구약성서의 내용들이 묘사되어 있다.

 성작 덮개(18세기초, 왼쪽), 성포낭(18세기초)

성작 덮개, 18세기초, 카톨릭 의례 시 성작의 포도주에 벌레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 덮개이다. 중앙의 광선을 내뿜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서리에는 카네이션 등이 수놓아져 있고, 테두리는 금실로 둘렀다.성포낭, 18세기초, 카톨릭의례시 제단 위에 성작과 성반, 성합 등을 놓을 때 그 밑에 깔아 놓은 성체포를 보관하는 주머니이다. 사각형 형태의 이 주머니는 제의복과 동일한 소재의 천으로 제작되었다. 꽃봉오리가 달리 넝쿨무늬가 자수로 장식되었고 꽃봉오리 옆에는 작은 카네이션이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성작보, 1670년,

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을 덮는 보자기이다. 금실과 은실을 사용하여 석류, 카네이션, 튤립과 같은 꽃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모노그램인 “IHS”를 수놓았다. 헝가리 귀족의 전형적인 자수의 예로 동서양의 모티프가 결합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제의복(왼쪽), 영대(가운데 왼쪽), 수대(가운데 오른쪽), 주교의 관(오른쪽)

주교의 관, 18세기 초, 카톨릭 의례시 주교가 쓰는 모자이다. 수대 18세기초, 카톨릭 사제나 주교가 의례시 왼팔에 걸치는 장식이다. 영대, 18세기초, 카톨릭 사제나 주교가 의례시 어깨 위에 걸치는 복식이다. 끝부분은 원뿔 형태로 넓어지는 것이 특징이며 넓은 부분의 중앙에는 광선을 내뿜는 십자가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제의복과 한 세트로 추정된다. 제의복, 18세기초, 제의복은 미사 때 교구의 책임자인 주교가 입던 것으로 예복 위에 착용한다. 앞면을 비롯하여 3면의 뒷면에 금실, 은실, 색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았다. <출처:고궁박물관>

주교용 신발

헝가리 국립박물관
헝가리 국립박물관은 세체니 페렌츠(Szechenyi Ferenc, 1754~1820) 백작이 1802년에 기증한 수집품들을 기본으로 하고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국회의사당의 기증품을 더하여 건립되었다. 헝가리 국립박물관의 건물은 1827년 헝가리의 유명한 건축가 플러크 미하이(Pollack Mihaily, 1773~1855년)에 의해 착공되어 완성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유서 깊은 헝가리 국립박물관의 협조로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시기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시대인 17~19세기의 헝가리 왕실과 귀족 문화의 진수르 보여주는 헝가리 국립박물관의 대표유물 190점을 우리 국민들에게 소개하게 되었다. 헝가리 왕의 상징인 왕관 그림, 아름다운 헝가리 귀족 여성의 드레스, 빼어난 미모와 헝가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름 높았던 엘리자베트 왕비의 초상, 헝가리 왕실과 귀족 문화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보석으로 장식한 무기 등 이색적이면서도 다양한 유물들을 관람하면서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럽 왕실문화의 정취에 빠져 들 수 있을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생의 소망, 헝가리 왕실과 귀족의 종교
이슈트반 1세(Istvain I, 재위 1000~1038년)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헝가리는 500여년간 카톨릭 국가였다. 그러나 1510년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자 그 영향이 헝가리에도 미쳐 신흥 귀족층을 중심으로 신교로 개종하는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526년 모하치(Mohicsi)에서의 패전으로 헝가리는 세나라로 분할되었는데, 그 중 동남부에 위치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관할 하에 있었기에 신교로의 개종에 큰 제약을 받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는 신교가 널리 퍼졌으며, 신-구교간 전쟁이었던 30년 전쟁에서는 신교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헝가리가 재통일된 이후 카톨리 교세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반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서부 헝가리 지역을 기반으로 한 헝가리 왕국은 다시 대부분 카톨릭화 되었다. 17세기 중반부터 헝가리 왕국에 꽃핀 바로크문화를 통하여 헝가리 내에 카톨릭의 권위가 강화되었고 봉건 신분질서도 더욱 고착되었으며, 귀족문화와 귀족 자제의 교육은 모두 카톨릭 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톨릭 교인이 아닌 경우에는 주요 공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등 신교도 차별정책을 펼쳤으며, 헝가리 왕의 대관식 등 공적인 행사는 이전처럼 카톨릭 주교가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후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정신의 영향을 받아 전개된 시민혁명, 독립전쟁(1848~1849년)의 결과로 신분과 종교상의 차별이 없는 평등권을 보장될 때까지 헝가리는 카톨릭국가로 발전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