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원사는 월정사와 함께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는 이곳에서 수행한 성덕왕이 705년에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사찰로,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보살을 만났으며 병을 나았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세조는 직접 권선문을 작정하고 사찰를 크게 중창하였다. 이때 ‘상원사(上院寺)’라 이름을 짓고 왕실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현재의 사찰은 1946년 불타버린 것을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하며, 영산전을 제외하고는 오래된 사찰건물이 없다. 사찰에는 문화재로 신라 성덕왕 24년에 만든 높이 1.67 m, 지름 91 cm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이 있으며, 세조가 직접 보았다고 하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조각한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 상원사를 중창하기 위해 세조가 쓴 친필어첩인 중창권선문(국보292호)이 있다.
상원사는 오대산 정상(해발1,563 m)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큰 절로, 지도에서 찾아보면 해발 950 m 정도의 아주 높은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상원사를 찾아가는 가는 길은 수월한 편인데, 월정사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10여분 들어가면 상원사 입구에 도착한다. 상원사 주변에는 월정사와 함께 아름드리 전나무 숲을 볼 수 있다. 상원사에서 숲길을 따라가면 오대산 정상부근에 있는 적멸보궁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오대산 상원사 전경. 해발 약950 m의 깊은 산중에 있는 사찰이지만,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크고 짜임새가 있다. 영산전을 제외하고는 오래된 사찰 건물은 없으며 대부분 최근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를 다시 세우며 쓴글(복제품), 월정사성보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국보 29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세조이지만 월인석보상절을 비롯하여 한글 사용에 가장 공이 큰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세조10년(1464)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미스님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지은 글이다. 한글로 번역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다. 신미스님이 부처님께 기도한 일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도 신미스님의 기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08년 상원사. 상원사 동종을 보관하고 있던 보호각이 마당 가운데에 있었다.
상원사 주불전인 문수전(文殊殿). 세조가 직접 친견했다는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다. 내부에는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221호)와 목조문수보살좌상(보물1811호)가 모셔져 있다. 궁궐 정전 건물처럼 ‘-’형 건물로 지어진 사찰의 주불전과는 달리 누마루가 있는 ‘ㄱ’자형 건물을 하고 있다. 왕실과 관련된 원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주불전에 모셔진 문수동자과 문수보살.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221호,왼쪽)은 의숙공주와 효녕대군의 발원으로 세조의 수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어 1466년 상원사에 모셔졌다. 목조문수보살좌상(보물1811호, 오른쪽)은 1661년(현종)에 조성된 것으로 조성연대와 문수보살좌상임을 밝히는 발원문이 복장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문수동자가 세조의 등을 씻어 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 문수전 바깥 외벽에서 볼 수 있다.
주불전 앞에는 통로로 사용하는 좁은 마루가 있다.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
‘ㄱ’자형으로 돌출된 누마루에는 안암중원(1876~1951)을 비롯하여 상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승들의 초상화을 모시고 있다. 고승의 초상화를 모시는 조사당(祖師堂)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주불전 앞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탑인 오대보탑(五臺寶塔), 영산전 앞에 있는 오층보탑을 대신하여 현대적인 해석을 반영하여 2012년에 조성되었다.
주불전 뒷쪽에는 상원사에 남아 있는 불전 중 가장 오래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집으로, 1946년 화재가 났을 때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전각으로 오대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법당에는 석가삼존상과 십육나한상을 봉안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영산전이라 한다. 용약혜견(1830~1908)스님이 1899년 해인사의 고려장경 4부를 인출하여 삼보사찰에 각기 1부씩 모시고 1부는 전국의 유명한 사찰에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일부인 39함(函)이 여기 영산전에 모셔져 있었다.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옮겨 보존되고 있다. (안내문, 상원사, 2015년)
불전에는 석가삼존상과 십육나한상을 봉안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영산전 석탑.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로 그 형체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석탑에 구름, 용, 연꽃 등 다양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영산전 석탑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영산전 석탑은 기단부터 상층부에 이르기까지 탑 전체가 여러가지 무늬와 불상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심하게 파손되어 탑신의 형체를 알 수 없고 층수마저도 파악되지 않은 채 보전되어 있다. 기단에는 구름과 용, 연꽃 등의 무늬와 탑신에는 통일신라양식의 불상이 한 면에 4존씩 조각되어 있으며 비록 복원이 어려운 상태로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소박하면서도 당당하게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안내문, 상원사, 2015년)
상원사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 사찰을 대표하는 유물인 상원사 동종(국보36호)가 있는 비각이 있다. 이곳에는 유리벽 속에 상원사 동종이 보관되어 있으며, 그 옆에 복제품이 걸려 있다.
상원사 동종(국보36호). 현존하는 한국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으로 통일신라 성덕왕24년(725)에 만들어졌다. 음통이 있는 종뉴(鐘紐), 상.하대, 유곽과 비천상, 당좌 등 한국종의 특징들을 잘 갖추고 있는 걸작이다. 원래 안동지역에 있던 것으로 세조대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문수전 동쪽편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수행공간인 청량선원(淸凉禪院)
수행공간으로 2동의 큰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전통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규모의 건물로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상원사 입구인 청풍루(淸風樓). 사찰의 문루는 신도들이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상원사 청풍루는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최근에 신축된 것이다.
청풍루 1층 작은 전시실 내부. 조선 중기 상원사 불전에 모셔졌던 문수보살36화현도를 여러 기록을 참조하여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여 그린 문수보살 36화현도를 비롯하여 여러 그림들과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봉황보당(鳳凰寶幢), 보당은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의례용으로 거는 깃발이다. 이른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여 최근에 조성하였다.
서쪽편에 만화루(萬化樓)라는 누각이 있다. 이전에 상원사 경내로 들어오는 출입문이었다.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 손을 씻을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불교성지로서의 오대산
우리조상들은 일찍부터 자연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산을 숭배하였다. 산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숭배한 까닭은 산을 신이 사는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이러한 자연신앙은 자연스럽게 불교 신앙에 융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산을 숭배하는 신앙이 불교화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대산의 문수신앙과 오만보살신앙이다. 오대산이 진성이 거주하는 곳이라 믿게 된 것은 신라 자장율사(590~658)께서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님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정골사리를 모시면서부터이다. 이로서 ‘동북방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일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한다.’는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오대산 신앙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문다는 믿음은 7,8세기에 이르면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 하여 오만보살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오만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즉,동대 만월산(滿月山) 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麒麟山)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長嶺山) 수정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象王山) 미륵암에는 일만의 미륵보살이,
중대 지로산(地爐山) 진여원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오대산은 보천태자 이후 많은 이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었으며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도 상원사는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한 일화를 통하여 오대산이 문수신앙의 성산으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근대에 와서는 한암, 탄허, 만화스님이 오대산에 머물면서 수행오법(修行五法)의 가풍으로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한국불교 진흥에 큰 지주가 되셨다. 오대산은 이렇듯 불교성지로서 신앙의 귀의처였던 만큼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으며 산내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서 중생교화와 전법의 대가람인 월정사를 비롯하여 문수보살님의 지혜가 충만한 상원사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중대사자암 적멸보궁 등이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성지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으며 오늘도 깨달음과 지혜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내문, 상원사, 2015년)
오대산 상원사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석이 사찰입구에 세워져 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들어오는 길.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깔려 있다.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지금도 비포장도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길은 두로령(頭老嶺, 해발 1310m)을 넘어 홍천구 내면 명개리로 이어진다. 원래는 도로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오대산 탐방로로 활용하고 있다.
한때 한강의 발원지였던 오대천이 상원사 앞으로 흘러간다. 이곳에서 세조가 몸을 씻었다고 한다.
상원사 입구에 있는 관대(冠帶)걸이, 이곳은 조선 초 세조가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둔 곳이라 하여 관대걸이라 하며 아래와 같은 문수동자와 얽힌 전설이 전한다.
상원사 청풍루(淸風樓)를 오르는 계단길. 문수보살을 상징하는 사지상이 세워져 있다. 이 길은 최근에 만들어진 길이다.
상원사(上院寺), ‘천고의 지혜 깨어 있는 마음’의 가람
한암스님의 수행오법(修行五法)으로 정진하는 문수보살 화현(化現)의 지혜도량으로 1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성지이다. 신라 성덕왕4년(705)에 신라의 보천과 효명태자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이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왕자와 함께 천명을 거느리고 여의(如意) 원년에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두 형제는 중대 남쪽 봉우리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함께 수행하면서 매일 오대에 나아가 예배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702년 효소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끝까지 고사함에 효명왕자가 귀경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성덕왕(성덕왕)이다. 왕이된 효명은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세우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다. ‘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거세어진 척불(斥佛) 정책은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였으나, 태종은 상원사 중대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持病)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병이 나았으며,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지금도 상원사는 모든 불자의 귀의처로서 오대광명이 가득한 가람으로 누구나 고요한 마음.고요한 생각.고요한 몸가집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스러운 천고의 지혜와 깨어있는 마음의 청량한 가람이다. (안내문, 상원사,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