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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奎章閣)] 회화자료와 고지도

조선시대 역사를 기록한 자료로는 국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실록>과 일상을 세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 왕실 주관의 각종 행사를 기록한 <의궤>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의궤는 왕실주관의 각종 행사와 주요 절차를 그림과 함께 정리한 기록이다. 조선왕조 의궤에 기록된 그림들은 당대 최고의 전문화가라 할 수 있는 도화서 화원들이 사실에 근거해서 그린 그림으로 기록화에 가까운 그림들이다.

이들 그림들은 당시에 사용하였던 최고급 안료를 이용하여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기때문 기록화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림으로서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그림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행사들에는 기념촬영 등을 통해서 행사장면을 남겨놓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그림으로 중요한 행사장면들을 남겨 놓고 있다. 특히 의궤는 조선후기 문예중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대에 상당히 많이 그려졌는데 1760년 청계천 준설 공사를 마친 뒤 이를 기념하여 베푼 무예시험 장면을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화성원행반차도>, 1817년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익종대왕 입학도> 등이 유명하다. 

참의공사연도(參議公賜宴圖, 모사본), 1828년 중 <왕세자입학도>.

익종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그림이다. 여러 장면 중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그린 입학의(入學儀)이다.

서성 등이 남대문 밖 남지(南池)에서 잔치하는 모습을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10대조 서고(徐固)의 <서연관사연도(書筵官賜宴圖)>

1817년 7월 서정보(徐鼎輔)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의 직책으로 익종(순조의 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에 참여하였는데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왕세자입학도>를 만들면서 집안에 전해지던 10대조 서고(徐固)의 <서연관사연도(書筵官賜宴圖)>와 서성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를 합쳐서 <참의공사연도>라 이름하였다. <출처:규장각>

송광사지도(松廣寺地圖), 19세기 전반.

순천 송광사의 가람배치를 그린 그림이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송광사 지도. 송광사 연혁과 사적(事蹟) 및 법당(法堂).요사(寮舍) 등의 규모를 기록한 <송광사사적(松廣寺事蹟)>에 실려 있는 가람의 배치도이다. 조계산의 연봉들을 마치 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구도로 그리고 그 내부에 가람을 배치하였다. 산지의 기암 절벽과 수목, 그 사이를 흐르는 냇물이 회화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웅전을 비롯한 가람의 배치가 매우 상세하며, 절의 북쪽의 많은 부도와 비가 유서 갚은 고찰(古刹)임을 보여준다. <출처:규장각>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 1795년,

온천이 있어 국왕이 자주 찾았던 온양 관아에 설치했던 별궁을 그린 그림이다.

충청도 온양 별궁의 모습을 그린 그림. 충청도 관찰사 이향원이 온양별궁에 영괴대를 설치한 내력을 기록한 책인 <영괴대기(靈槐臺記)>의 앞 부분에 그려져 있다. 영괴대는 1760년에 사도세자가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은 것을 기념하여 세운 대의 이름이다. 중앙에 행궁의 정전(正殿)과 온천이 보이고 좌측 상단에 영괴대가 위치해 있다. 별궁에 빽빽히 위치한 기와 및 초가의 각종 관청의 모습에서 온양별궁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규장각>

금오좌목(金吾座目), 1750년.

서울에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조선시대 관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의금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종로 종각이 있는 사거리 북서쪽 SC은행 건물이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1750년 4월 의금부에 모였던 도사 10인의 명단과 이들이 의금부 건물에서 회동한 모습을 기록한 그림. 의금부는 중부 견평방(堅平枋, 현재의 종로 제일은행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의금부 관아의 배치상태 및 중앙의 마루에 채응일(蔡膺一)을 비롯한 도사 10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관아의 주위에는 수양버들을 심었고, 관아의 뒤로는 연못이 보인다. 좌목에는 직책, 성명, 호, 출생연도, 사마시에 합격한 해, 본관을 적었다. <출처:규장각>

선현영정첩(先賢影幀帖), 1793년.

숙종에서 정조 연간에 활약한 고위 관리들의 초상화를 모아 놓은 화첩. 주로 영조.정조 연간에 판서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들이 관복(官服) 차림을 한 모습을 그렸다. 1790년대를 기준으로 생존하지 않는 인물은 기존의 초상화를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2첩으로 구성되었으며 첫째 화첩에는 이여(李畬), 김재노(金在魯), 유척기(兪拓基) 등 14명, 두번째 화첩에는 허목(許穆),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등 10명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초상화 우측 상부에는 그련진 인물의 성명과 관직명이 쓰여져 있다. <출처:규장각>

조선고평생풍속도(朝鮮古平生風俗圖).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기는 하나 평생도는 개인들이 많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 그림 중 하나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기념이 될만한 경사스런 일들을 그린 그림. 평생도(平生圖)는 벼슬을 지낸 인물의 생생을 그린 것으로 그림의 내용은 주로 돌잔치, 글공부, 혼인, 과거급제, 벼슬살이, 회갑, 회혼(回婚) 등으로 구성되는데, 현재 규장각에는 그 중 2폭이 남아 있다. 첫번째 것은 젊은 관리가 말을 탄채 하인들과 함께 돌다리를 건너 귀가하는 장면이며, 두번째 것은 홍포(紅袍)를 입은 고위관리와 그를 호위하는 문무관리들의 행렬을 그렸다. 전체적인 구도난 인물 및 복장의 표현, 배경 등은 중국의 화풍을 많이 모방했다. <출처:규장각>

신자하서첩(申紫霞書帖),

구한말을 대표하는 인물인 신위의 글과 그림을 모은 서화첩이다.

신위가 쓰고 그린 시문(詩文)과 그림을 모아 엮은 서화첩(書畵帖). 신위는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書畵家)로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경수당(警修堂), 본관은 평산이다. 본첩에는 매화와 난초 그림 2점, 칠언절구(七言絶句) 4수, 칠언고시(七言古詩) 1수, 문장 1편, “영정치원, 담박명지(寧靜致遠, 澹泊明志)”가 실려 있다. 전시한 면은 매화를 그리 수목화(水墨畵)로 여백에 “세외선향(世外僊香)”과 “청하(淸霞)”가 쓰여져 있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회화자료
규장각에는 각종 기록화, 인물화, 산수화, 풍속화 등이 남아 있다. 이들 회화 자료는 대부분 궁중의 화원(畵員)들이 국가적 행사 등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린 것이다. 현재 소장되어 있는 회화 자료들은 식물이나 광물에서 채취한 천연 물감을 사용하여 그렸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색감을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가 빛난다. 기록화는 국가적 행사나 역사적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실에 입각하여 충실하기 그린 그림을 말한다. 각종 왕실 관련 행사를 그린 진찬도(進饌圖), 반차도(班次圖), 연회도(宴會圖), 능행도(陵行圖) 등의 의궤 그림이나 사대부들 사이의 계모임을 그린 계회도(契會圖) 등이 이에 포함된다. 규장각에는 1572년 의주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모습을 그린 <의순관조영도(義順館詔迎圖)>, 1760년 청계천 준설 공사를 마친 뒤 이를 기념하여 베푼 무예시험 장면을 그린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화성원행반차도(華城園行班次圖)>, 1817년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익종대왕 입학도(翼宗大王入學圖)>, 서성 등이 남대문 밖 남지(南池)에서 잔치하는 모습을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화들은 사진이나 비디오 카메라가 없었던 전통시대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시켜주고 있다. 규장각에는 기록화 이외에 인물화, 산수화, 풍속화 등의 그림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인물화로는 조선후기 관료들의 초상을 그린 『선형영정첩(先賢影幀帖)』, 『진신화상첩(瑨紳畵像帖)』이 남아 있어 당시 인물들의 모습을 살필 수가 있다. 그리고 산수화로는 관동 지역의 절경 10곳을 그린 『관동십경(關東十景)』, 평양과 안동 주변의 산천과 도로, 건물 등을 그린 <평양풍경도(平壤風景圖)>, <안동부근회도(安東附近繪圖)> 등이 있다. 그리고 모심기, 벼베기, 누에치기, 베짜기 등 일상 생활의 정경을 그린 <경직도(耕織圖)>, 인생에서 기념이 될만한 경사스런 일을 선정하여 그린 <조선고평생풍속도(朝鮮古平生風俗圖)> 등 여러 폭의 풍속화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인평대군의 저택 주변을 그린 <인평대군방전도(麟坪大君坊全圖)>, 경주에 있던 집경전 옛 터 주변을 그린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회화자료들은 조상들의 높은 예술적 성취와 정신적 깊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 문화, 인물, 의식, 풍속 등을 인식하는 데에도 큰 디딤돌이 된다. <출처:규장각>

고지도(古地圖)

서울대 규장각에는 주로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백종의 고지도를 소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고지도는 19세기에 그려진 목판본 지도인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비록 국내에 소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초 권근을 비롯한 문신들의 주도로 원나라지도와 우리나라지도, 일본의 지도를 편집하여 그린 혼일 강리역대국지도는 당대에서는 가장 수준 높은 지도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지도는 조선후기에 구한말에 많이 그려진 세계지도, 민간의 학자들이 그린 <대동여지도>같은 수준높은 전국지도, 회화의 형식으로 그려진 군현도, 변방 방위를 위해서 그린 관방도 등이 있다고 한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의 발달에 따른 산수화풍의 도성도가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이런 고지도들은 대동여지도처럼 목판본으로 그려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직접 그림으로 그린 채색필사본이 대부분이며 그림으로서도 상당히 수준이 높고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동여도(東輿圖). 보물

동여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필사본으로 대동여지도 목판몬의 원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동여도는 철종·고종 연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필사본의 전국 채색지도로,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되어 있다. 총 23첩으로 맨 앞첩은 목록집이고, 제1첩부터 제22첩까지는 각 지역의 지리가 그려져 있다. 지도는 산천표시와 함께 주현별(州縣別) 경계선을 그어, 주현간의 도로를 표시하였다. 그 바탕 위에 영진(營鎭), 주현(州縣), 진보(鎭堡), 역도(驛道), 목소(牧所), 방면(坊面), 창고(倉庫), 봉수(烽燧), 능침(陵寢), 성(城), 도로(道路), 파수(把守)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상의 거리는 제1첩 1면에 방안을 그려놓고 ‘방십리매편(方十里每片)’이라고 하여 매방(每方)의 실거리가 10리임을 표시하였다. 동여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동여지도의 필사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밀·정확하게 그려진 훌륭한 지도첩이다. 도화서에서 그린 지도제작 솜씨와도 같은 뛰어난 그림과 글씨, 채색 등이 18세기 후반기 조선지도 제작기술의 높은 수준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출처:문화재청>


아국총도(俄國總圖), 18세기 말, 채색필사도

정조대의 지도첩인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된 전국지도.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따르고 있다. 이 지도는 화려한 색채기 돋보이는데, 특히 녹색의 산줄기와 청색의 하천, 각기 다른 색으로 설채된 팔도의 군현이 눈길을 끈다. 또 해안의 섬들을 아주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어, 이 시기 도서 지방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의 독도가 울릉도 동쪽 동해에 우도(于島)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어 주목된다. 지도의 여백에는 국토의 좌향(坐向), 동서 및 남북의 길이, 사방의 끝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그리고 각 도 군현의 수가 기재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도성도(都城圖),

19세기전반에 그려진 지도로 그림과 같은 느낌을 준다. 당시 서울의 인구와 마을 분포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국여도(東國輿圖)>에 수록되어 있는 도성도. 궁궐과 관아를 중심으로 그린 일반적인 도성도류와 달리 성 안을 기와집으로 가득 채워 서울의 융성함을 나타냈다. 도성 밖에도 주요도로를 따라 황색 초가가 군집해 있는 큰 마을들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강, 마포, 용산 지역에 가옥이 밀집되어 있어 18세기 이후 상업 발달에 따른 성저(城底) 지역 특히 한강변의 인구 증가가 반영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연무대도(鍊武臺圖),

한양도성 북쪽 평창동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한북문(漢北門, 홍지문)을 비롯한 탕춘대성과 홍제천, 북한산 봉우리들이 보인다.

진주지도, 19세기.

진주를 마치 위성사진처럼 그려놓은 지도이다.

진주성 일대를 그린 그림지도. 지도이기보다는 오히려 회화에 가까울 정도로 진주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1823년에 목사(牧使) 홍백순(洪百淳)에 의해 건립된 의기사(義妓祠)가 촉석루 서편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823년 이후에 제작된 지도이다. 진주성 내부에는 병마절도사의 군영(軍營)인 병영의 각종 건물이 포진해 있고 진주목(晋州牧)의 관아 건물은 성곽 밖의 북쪽 산록에 위치애 있다. 근처에는 장터도 표시되어 있으며 감옥의 모습을 울타리로 그려 표현하여 격리된 공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남강가에는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왜적장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졌던 곳이 의암(義巖)도 선명히 그려져 있다. <출처:규장각>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殿圖), 1781년이후.

강화부 행궁 중 외규장각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숙종의 영정을 모셨던 만녕전

강화부 행궁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 행궁 일대의 궁전 배치도. 국왕의 임시 처소인 행궁, 숙종의 영정을 모셨던 만녕전(萬寧殿) 등과 함께 1781년에 지어 왕실의 비책(秘冊), 어제(御製), 어필(御筆), 교명(敎命), 책보(冊寶) 등을 보관했던 외규장각이 나타나 있다. <출처:규장각>

백두산정계지도(白頭山定界地圖),

1887년 그려진 지도로 간도지방 국경에 대한 양국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1887년 5월 26일 제2차 조.청국경회담에서 조선감계사 이중하(李重夏)와 청의 감계관 방랑(方朗) 등이 회담 결렬 뒤 양측이 주장한 토문강(土門江)의 수원(水源)을 각각 표기한 채색지도이다. 지도에는 조선과 청 양국이 주장하는 토문강의 수원에 ‘차수정계(此水定界)’라는 표식을 해 두어 간도 국경에 대한 양국의 입장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고지도(古地圖)의 종류와 특징
고지도는 과거에 존재했던 세계와 지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각자료이다. 고지도에는 당시의 지리적 지식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예술성 등이 반영되어 있고, 더 나아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과 관련된 종교적 믿음 등도 그 속에 담겨져 있다. 또한 고지도는 과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 속에서 탄생되며 지역간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규장각한국학 연구원은 국내 최대의 고지도 소장처로서 그 수효는 약 220여종, 1,100여책, 6,000매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유일본으로서 정교한 양식과 뛰어난 회화성이 특징이다. 대부분이 채색필사본으로 되어 있고 목판본, 동판본도 일부 소장되어 있다. 제작시기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있으며, 국가 기관에서 제작한 것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제작된 지도도 포함되어 있다. 유형별로는 세계지도(世界地圖) 24종, 전도(全圖) 53종, 도별지도(道別地圖) 20종, 군현지도(群賢地圖) 53종, 외국지도(外國地圖) 32종, 관방지도(關防地圖) 13종, 기타 26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지도의 여러 유형 가운데 세계지도는 지역간 문화교류와 당시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전도는 조선초기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제작되었는데,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국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는 민간의 뛰어난 지도학자들이 지도제작에 심혈을 기울여, 18세기 중반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거쳐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로 이어졌다. 군현지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인 부(府), 목(牧), 군(郡), 현(賢)을 그린 고을 지도로 현존하는 고지도 가운데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점하고 있다. 이러한 군현지도는 전도보다 대축척으로 그려지며, 추상화된 표현방식보다는 회화적인 수법을 가미하여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의 왕도인 서울은 왕권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왕도를 아름답고 품위있게 표현 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특히 18세기 진경산수화의 발달과 더불어 뛰어난 도성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관방지도는 국방을 목적으로 군사적 요충지나 방어시설 등을 그린 지도이다. 외적의 침입으로 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를 위해 국경지방의 형세를 파악하거나 요충지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관방지도들이 제작 .활용되었다. 각종 산성지도, 군사기지를 그린 진보지도(鎭堡地圖) 등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계속 제작되었다. 이상의 지도 이외에도 풍수(風水)의 산도(山圖), 궁궐도, 사찰도, 천문도 등도 다양하게 소장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34년

최한기(崔漢綺)가 중국의 장정빙(裝廷聘) 만든 세계지도를 고쳐 제작한 세계지도 및 천문도. 김종호의 도움을 받아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그린 <지구전도(地球前圖)>와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일부를 그린 <지구후도(地球後圖)>, 그리고 천문도인 <황도북항성도(皇圖北恒星圖)>와 <황도남황성도(黃道南恒星島)>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면은 <지구전도(地球前圖))>이다. <출처:규장각>

혼일 강리역대국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복제),

1402년에 중국 원나라의 지도와 우리나라, 일본의 지도를 편집해서 그린 지도로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표현하고 있다.

1402년에 대사성 권근(權近),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검상(檢詳) 이회가 만든 세계지도를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 사이에 필사한 지도. 중국을 중앙에 배치하고 동쪽에는 조선과 일본, 서쪽에는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구대륙 전역을 포괄하여 담아냈는데, 그 중 조선을 다른 나라보다 크게 그림으로써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단에 적힌 권근의 발문에 의하면, 이 지도는 중국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 조선의 조선전도(朝鮮全圖), 그리고 일본의 지도를 합하여 새롭게 편집, 제작한 것이라 한다. 15세기 초의 세계지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 중의 하나로 꼽힌다. 권근(權近)의 발문은 <양촌집(陽村集)>에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곤여만국전도는 1602년 이탈리아 예수회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명나라 학자 이지조(李之藻)와 함께 제작한 목판본 지도이다. 1603년 북경에 파견되어 있던 이광정(李光庭)과 권희가 이 지도를 가지고 귀국하면서 한국에 최초로 전래되었다. 이후 숙종의 하명에 따라 관상감정(觀象監正)을 역임한 이국화와 유우창이 화가 김진여와 함께 채색 곤여도를 본떠 다시 제작되었다. 전시된 병풍은 숙종대 제작된 지도의 사진을 확대하여 복제한 것이다. 8폭의 제1폭에는 주기, 제2~7폭에는 지도(6폭), 제8폭에는 이 지도의 성립과 제작경위를 기술한 최석정(崔錫鼎)의 명문(銘文)이 있다. <출처:규장각>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서구식 한역세계지도(漢譯世界地圖). 중국에서 활동했던 서양 선교사 알레니(Giulio Aleni)의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수록된 「만국전도(萬國全圖)」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직방외기』에 실린 지도와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지도의 윤곽.도법.지명 등이 대부분 일치한다.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와 같이 지도의 중앙 경선을 태평양 중앙에 둠으로써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중앙부분에 배치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유럽 중심의 구도를 태평양 중심의 구도로 바꾼 것이다. 근대식 지도제작기법을 사용한 지도이지만 남방(南方) 대륙은 미지의 땅인 ‘화지(火地)’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남방 지역이 아직 탐험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출처:규장각>

조선시대의 세계지도
전통시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천지관(天地觀)을 가지고 있었고, 유학의 확립과 더불어 중국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인식하는 중화적 세계 인식이 지배적인 사고로 확립되었다. 조선시대의 세계지도 제작은 이와 같은 ‘천원지방’의 천지관과 중화적(中華的) 세계 인식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15세기의 대표적 지도는 1402년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원나라 지도의 영향을 받은 이 지도에는 원나라의 세력이 미쳤던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까지 그려져 있는데, 지도에 표현된 영역에서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세계지도의 범위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중화적 세계인식을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에 지작된 세계지도들을 15세기에 비해 표현된 지리적 세계가 크게 축소되었다. 즉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중국과 조선을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시켜 그렸으며, 나머지 주변 국가들은 지명만 표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주자성리학이 사회운영의 원리로 정착됨에 따라 세계 인식의 측면에서도 중국 문화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것에 기인하다. 17세기 이후 조선에 전래된 <곤여만국지도(坤輿萬國地圖)>,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의 서구식 세계지도와 지리서는 조선인들의 전통적 세계인식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서구식 세계지도를 통해 중국을 넘어선느 더 넓은 세계를 천하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중화적 지리관을 부정하게 되었다. 또 서양 지리 지식의 도입은 전통적 세계지도 제작에도 변화를 가져와 <원형천하도>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지도가 출현하였다. 19세기 들어 천주교 탄압으로 서학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는 가운데서도 서구식 세계지도의 도입.제작과 서구 지리 인식의 수용은 계속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한기의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이며, 1860년에는 1674년에 페르비스트가 만든 <곤여전도(坤輿全圖)>를 중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중국과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지도도 꾸준히 제작되어 전통적인 중화적 세계인식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출처: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