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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천전마을(川前理, 내앞마을), 영남 4대 길지로 손꼽히는 의성김씨 세거지

안동군 임하면에 있는 있는 의성김씨 집성촌인 천전마을이다. 안동에서 영덕으로 가는 34번 국도변 임하댐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풍수적인 관점에서 지리에 대해선 저술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영남 4대 길지 중 하나로 이곳 천전마을(川前理, 내앞마을)을 꼽고 있다. 마을 앞에는 영양과 청송지역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온 반변전(半邊川)이 지나고 있다. <택리지>에는 이곳에 대하여 “안동의 동남에 있는 임하천(臨河川)은 청송읍 시냇물과 하류가 황강(潢江)물과 합류하는 곳이다. 임천(臨川)에는 학봉(鶴峰) 김성일(金城一)이 살던 옛 터가 있다. 지금도 문족(門族)이 번성하여 유명한 마을이 되었고, 그 옆에는 몽선각(夢仙閣)과 도연선찰(陶淵仙刹)의 경치 좋은 곳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잘 갖춘 자연환경, 비교적 넓은 농지와 반변천의 풍부한 수량 등 조선시대 양반들이 세거지(世居地)로 삼을때 중요시 여겼던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는 마을이다.

<안동 천전마을 전경>

천전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조선초 안동지역에 자리잡은 의성김씨 김만근이 장가들게되면서 처가가 있는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게되었다고 한다. 김만은 손자 김진(金璡, 1500~1580) 대에 크게 번성하여 안동지역 명문사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김진의 다섯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렸다. 김진의 넷째 아들이 퇴계의 제자로 학자와 관리로서 명망이 높았던 학봉 김성일이다. 마을에는 김진을 불천위로 모시는 마을 종가집인 의성김씨 종택(보물)을 중심으로 귀봉종택, 백하구려, 제산종택, 추파고택, 백인재 등 많은 고택이 남아 있으며, 후학들을 양성하던 기산서당, 운곡서당, 우곡초당 등이 남아 있다. 마을 앞 반변천에는 마을사람들이 치수(治水)를 위해 조성한 소나무숲이 있고 건너편에는 백운정이란 정자를 갖추고 있다. 천전마을 의성김씨는 이마을 뿐 아니라 반변천 건너 임하마을, 임동면 지례마을, 학봉 김성일이 터를 잡은 금계리마을 등 안동지역 여러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천전마을 의성김씨 중 일송 김동삼, 백하 김대락 등은 구한말 협동학교를 세워 신학문 교육에 앞장섰으며,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마을의 규모는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에 비해서 작은 편이지만, 조선시대 배산임수의 지리적 조건 등을 잘 갖춘 양반들의 세거지이다.

<안동 천전마을 위성사진(출처:다음지도)>

안동에서 영양, 청송, 영덕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배산임수의 풍수적인 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하천 수량이 풍부하여 농사짓기  좋은 농지가 있는 등 전형적인 양반들의 세거지이다. 마을은 종택을 중심으로 후대에 들어서면서 동쪽으로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가한 후손들의 저택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서당들이 마을 바깥쪽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입구 버스타는 곳에 있는 작은 슈퍼>

<마을 앞을 지나는 옛길>

마을을 지나는 국도는 후에 마을 바깥쪽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마을 우물>

<마을 서쪽편에 위치한 의성김씨종택(보물)>

이 집은 마을에 터를 잡은 김만근의 손자 청계 김진(金璡, 1500~1580년)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이다. 현재의 집은 불타버린 것을 학봉 김성일이 북경의 대저택을 참조하여 중건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안채가 오른쪽, 사랑채가 왼쪽에 배치되는 등 전통한옥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권문세가 종택이지만 솟을대문을 하지 않고 있다.

<의성김씨종택 마당>

살림집인 안채가 동쪽에, 사랑채가 서쪽에 배치된 독특한 구조이다.

<사랑채 뒷편에 위치한 사당>

청계 김진을 불천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오른편 1칸이 영정을 모시는 공간이다.

<종택 사랑채 마당>

바깥쪽에 사당과 경모각, 이름을 적어놓지 않은 작은 건물을 포함하여 3동의 건물이  손님이 드나드는 사랑채 주변에 자리잡고 있고 있다. 종택 소장 유물로 ‘청계 김진 영정(보물)’등이 있다.

<사당 앞 마당에서 본 천전마을 들판>

<종택 앞쪽에 위치한 추파고택(楸坡古宅)>

이 집은 종손의 아우였던 추파 김정락과 그의 아들 김병식이 살았던 집이다. 1800년대 중반 종택 안에 지었는 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마을입구에서 귀봉종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골목길에 있는 농가>

해방 이후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옛모습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종택에서 가깝고 현재의 건물 구조 등으로 볼 때 꽤 규모가 있던 집으로 보인다.

<귀봉종택 앞 일송 김동삼(金東三) 생가터>

김동삼은 구한말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계몽문동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31년 체포되어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집은 원래의 모습이 많이 변형되어 시골농가처럼 바뀌었다.

<귀봉종택>

종택 옆 마을 두번째 종택인 귀봉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귀봉 김수일은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다. 현재 종택은 현종대에 (1660)에 건립하였고, 고종대에 김주병이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호종일기(보물)를 보관했다고 한다.

<귀봉종택 안채 대청마루>

마당쪽으로 돌출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당>

뒷편 사당에는 김수일의 맏아들이며 호종일기(扈從日記)를 남긴 운천 김용(1557~1620)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기와를 얹은 돌담장 골목길>

<마을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

<운곡서당이 있는 마을 가운데 길>

마을 중심부를 지나는 개천이 길옆으로 흐르고 있다. 지금은 둑을 막았지만, 원래는 개천 옆 경치좋은 곳이다.

<마을 안쪽>

마을 안쪽에는 19세기에 지어진 고택인 만송헌운곡서당이 자리잡고 있다. 19세까지 마을 바깥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송헌 앞 농가>

<만송헌 앞 낡은 폐가>

앞면 5칸의 ‘-‘자형 주택으로 꽤 큰 규모의 가옥이다. 부엌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안채로 보인다. 바깥쪽에 중문과 사랑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전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가옥의 형태이다.

<뒤에서 본 모습>

<마을 안쪽에 있는 운곡서당>

조선후기 학자이자 관리인 김학배와 제자인 김태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계승하고자 후학들이 세운 서당이다.

<천전마을 동쪽편>

34번국도 옛길을 따라서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아마도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마을 동쪽편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동쪽으로 이어지는 국도 옛길>

<농촌마을의 중심이 되는 방앗간>

<분가한 후손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한옥>

일제강점기 개량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큰 나무가 있는 정원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집.>

나무에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작은 오두막을 만들어 놓고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고택인 백인재(百忍齋)>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고택이다.

<백하구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백하 김기락이 살았던 백하구려. 그는 1907년에 사랑채를 확장하여 이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하였고, 1910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안마당>

백하구려는 구한말인 1885년에 지어진 집이다. 건물의 앞면은 8칸으로 사랑채 4칸, 문간채 4칸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방과 부엌 등이 배치되어 있다.

<마을 동쪽 끝편에  위치한 제산종택(齊山宗宅)>

이 집은 조선후기 영조대 학자이자 관리였던 김성택이 살았던 집이다.

<우곡초당>

김성탁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우곡초당(愚谷草堂). 앞면 3칸 규모로 원래는 초가였겠지만 지금은 기와지붕을 얹어 놓고 있다. 이 집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사랑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치헌>

안동 천전마을 동쪽편에 치헌(恥軒). 임동면 지례마을이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마을 동쪽 끝길>

<마을 앞을 흐르는 반변천>

지금은 임하댐 조정지댐이 하류에 세워져 작은 호수처럼 바뀌었다. 건너편 언덕에는 귀봉 김수일 1568년(선조1)에 세운 백운정(白雲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반변천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개호송(開湖松) 숲>

이 숲은 입향조인 김만근이 조선 성종 무렵에 내앞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해 처음 조성하였다 한다. 풍수지리상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치수(治水)를 위해 조성한 인공숲이다.

<반변천 둑과 최근에 조성한 숲.>

<사빈서원(泗濱書院)>

청계 김진과 다섯 아들을 모신 서원이다. 원래 임하면 사의리에 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임하리로 옮겼다가 최근에 천전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참조>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