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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도자공예-분청사기실] 분청사기, 한국적인 미(美)를 잘 보여주는 도자기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도자기제작기법으로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으로 20세기에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외형상 고려청자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쇠퇴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등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청자의 주요 생산지였던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가마들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화되면서 장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분청사기는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졌으며, 고려청자.조선백자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 청자가 주로 귀족층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량생산을 했던 것에 비해서 분청사기는 고려말 전국적으로 확산된 가마터 덕분에 대량생산되었다.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양질의 것과 일반적인 것과는 수준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15세기로 왕실에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약 150여년간 생산되었던 분청사기는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광주지역에 관요가 설치되고 국가에서 백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순백의 백자를 선호했던 조류와 구리를 가공해서 만든 유기제품에 밀려서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모란무늬 자라병(粉靑沙器縛地牡丹文甁, 조선 15~16세기,국보,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실생활에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납작한 몸체에 주둥이가 달린 형태로 자라를 닮아 ‘자라병’이라 불린다. 무늬가 대범하면서도 백토로 남겨진 부분과 세부를 표현한 기법에 흐트러짐이 없다. 박지된 부분에는 검게 칠하여 시각 효과를 높였다.

납작한 몸체에 주둥이가 달린 형태로 자라를 닮아 ‘자라병’이라 불린다. 여행용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늬가 대범하면서도 백토로 남겨진 부분과 세부를 표현한 기법에 흐트러짐이 없다. 박지된 부분에는 검게 칠하여 대배(對比) 효과를 높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물고기무늬 편병(粉靑沙器彫花魚文扁甁, 조선 15~16세기, 국보,

 물고기 무늬가 크게 새겨진 이 작품은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작품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자기를 대표한 여러 작품 중의 하나이다.

백토를 두껍게 입히고 조화 기법으로 무늬를 새겼다. 앞.뒷면과 옆면에 서로 다른 무늬와 위로 향한 두마리의 물고기를 생동감이 넘치는 선으로 나타냈다. 양 옆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위와 중간에 4엽 모란무늬를 새기고, 배경을 긁어냈으며 아랫부분에는 파초를 새겨 넣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구름 용무늬 항아리(粉靑沙器象嵌印花雲龍文壺, 조선 15세기, 국보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모습을 잘 보이고 있는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분청사기이다.

당당한 양감과 풍만함이 돋보이는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인화기법과 상감 기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분청사기의 활기차고 건강한 미감이 잘 드러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물고기무늬 매병(粉靑沙器象嵌魚文梅甁, 조선 15세기, 보물

고려시대 유행했던 청자 매병의 형태를 계승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매병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기형은 고려 말 상감 청자에 보다 가깝지만 무늬를 표현하는데 인화 기법의 비중이 높아졌고 탁했던 유약이 향상되어 비교적 밝은 회청색으로 바뀐 점이 두드러진다. <출처:중앙박물관>

분청사기(粉靑沙器, BUncheong Ware)
‘분청사기’는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혀 다양하게 장식한 도자기로 그 명칭은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인 고유섭(1905~1944년)이 ‘분장회청사가(粉粧灰靑沙器)’라고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의 상감 청자에서 비롯되어 조선 전기인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 간 만들어졌으며, 고려청자와는 달리 생동감과 자유 분방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에서 분청사기는 짧은 기간동안 만들어졌지만 어느 도자기보다도 한국적인 미감을 담고 있다. 분청사기는 세종 연간에 해당하는 1418~1450년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450~1470년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는 도장으로 무늬를 찍고 흰 흙으로 메우는 수법의 세련된 인화 분청사기가 만들어지는데, 무늬가 촘촘하게 찍혀 그릇 전체가 하얗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무늬를 새기거나 파내는 박지조화(剝地彫花) 분청사기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467~1468년 경기도 광주에 관요(官窯)가 설치된 이후 국가에서 필요한 그릇을 백자로 제작하면서 지방 분청사기 가마들은 점차 지방 관청과 일반 백성을 위한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분청사기의 질은 떨어진 반면 백자의 생산량이 늘어났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유행한 귀얄 분청사기와 분장 분청사기를 끝으로 분청사기는 16세기 중엽에 사라지게 된다.

학봉리 분청사기(조선 15~16세기, 충남 공주시 학봉리 출토)

충효동 분청사기(조선 15~16세기, 광주 충효동 금곡 발견)

‘영천장흥고’가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永川長興庫銘大楪, 조선 16세기)

‘의라장흥’이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義羅長興銘楪匙, 조선 15세기)

‘성주장흥고’가 새겨진 잔(粉靑沙器印花文星州長興庫銘馬上杯, 조선 15세기, 경기 파주 봉일리 발견)

‘군위장흥고’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軍威長興庫銘楪匙, 조선 15세기)

‘밀양장흥고’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密陽長興庫銘楪匙, 조선 15세기)

‘언양인수부’가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彦陽仁壽府銘大楪, 조선 15세기)

‘장흥고’가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長興庫銘大楪, 조선 15세기)

장흥고는 궁궐 내에서 사용되는 물품의 보급을 담당하는 관사(官司)로 옷감과 종이 등을 관리하였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으나, 그 소멸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관청의 이름이 새겨진 분청사기에는 생산지의 이름이 함께 새겨지기도 하는데, 그릇의 품질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1.’금산장흥고납’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金山長興庫納銘楪匙, 조선 15세기), 2.’함안장흥고’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咸安長興庫銘楪匙, 조선 15세기), 3.’청도장흥’이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淸道長興銘楪匙, 조선 15세기), 4.’경산장흥고’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慶山長興庫銘楪匙, 조선 15세기), 5.’경주장흥’이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慶州長興銘楪匙, 조선 15세기), 6.’양산장흥고’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梁山威長興庫銘楪匙, 조선 15세기)

‘울산인수부’가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蔚山仁受府銘大楪, 조선 15세기)

‘영산인수부’가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靈山仁受府銘大楪, 조선 15세기)

‘삼가인수부’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三加仁受府銘楪匙, 조선 15세기)

‘진해인수부’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鎭海仁受府銘楪匙, 조선 15세기)

조선초기에는 상납된 도자기가 개인적 용도로 쓰이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태종 17년(1417) 법령으로 사용 관청의 이름을 새기도록 하였다. 인수부는 정종2년(1400) 세자부(世子府)로 설치된 후 경승부(敬承府), 순승부(順乘府)로 바뀌었다가, 세종1년(1418) 다시 인수부로 변경되어 명종11년(1556)까지 존속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선산인수’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善山仁受銘楪匙, 조선 15세기)

‘예빈’이 새겨진 발(粉靑沙器印花禮賓銘鉢, 조선 15세기)

‘덕녕부’가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德寧府銘大楪, 조선 15세기)

‘덕녕부(德寧府)’는 단종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1455년부터 1457년까지 운영되었다. 분청사기 중에는 내섬(內贍), 내자(內資), 예빈(禮賓), 공안(恭安), 사선(司膳) 등 사용관청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다. 이것은 그릇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내자’가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內資銘楪匙, 조선 15세기)

‘사선’이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司膳銘大楪, 조선 15세기)

‘공안부’가 새겨진 대접(粉靑沙器印花文恭安府銘大楪, 조선 15세기)

‘내섬’이 새겨진 접시(粉靑沙器印花文內贍銘楪匙, 조선 15세기)

분청사기 가마터
분청사기의 종류는 그릇을 흰 흙으로 어떻게 꾸미는가에 따라 상감(象嵌).인화(印花).조화(彫花).박지(剝地).철화(鐵畵).귀얄.분장(粉粧)의 7가지로 나누어지며, 각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분청사기는 지역에 따라 특색을 보이는데 경상도에서는 인화 분청사기, 전라도에서는 박지조화 분청사기, 충청도에서는 철화 분청사기가 유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충남 공주 학봉리. 철화 분청사기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세기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철화 분청사기 등 여러 종류의 분청사기와 백자를 제작하였다. ‘내자(內資)’, ‘예빈(禮賓)’이 새겨진 분청사기 조각이 출토된다.

전북 고창 용산리 가마.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운영되었으며 박지.조화.귀얄.분장.인화 분청사기가 출토되었다. 일반 반상기와 더불어 병, 큰 사발, 항아리 등 대형 그릇을 대량으로 생산하였고 조화나 박지 기법이 주로 장식되었다.

광주 충효동.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분청사기 가마터로 15~16세기에 운영되었다. 상감.인화.귀얄.조화.박지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 분청사기가 출토되었다.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퇴적층이 발견되어 사적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 고흥. 서남 해안의 대표적인 가마터로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운영되었다. 전라도 지역 특유의 조화, 박지는 물론 철화 분청사기도 생산되었으며, 25기에 달하는 대규모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모여 있다.

경남 밀양 용전리 가마. 15세기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운영된 가마로 질이 좋은 인화 분청사기, 귀얄 분청사기와 연질 백자 조각이 출토되었다. ‘밀양 장흥고(密陽長興庫)’, ‘장흥고(長興庫)’가 새겨진 분청사기 조각이 수집된다.

경남 합천 외사리 가마. 15세기에 운영되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합천 삼가현 중품 자기소에 해당한다. 무늬가 꼼꼼한 인화 분청사기와 귀얄 분청사기, 백자를 제작하였다. ‘삼가(三加)’가 새겨진 분청사기 조각이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삼가인수부(三加仁壽府)’명 분청사기가 이곳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에 새겨진 글자(명문銘文)
분청사기에 새겨진 글자의 종류에는 납품할 관청의 이름, 만든 사람과 지방, 그리고 제작연도, 등급표시 등이 있다. 각 지방 가마에서는 중앙 관청에서 사용할 그릇을 만들어 바쳤는데, 그릇들이 도난 당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기도록 하였다. 만든 사람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한 것은 세종3년(1421)부터인데, 그릇을 책임지고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분청사기에 보이는 관청의 종류

공안부(恭安府),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정종을 위해 태종이 설치한 관청. 1400년 설치되고 1420년에 폐지되었다.

사선서(司膳署),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임금의 식사와 궁궐 내의 음식마련을 담당한 관청.

장흥고(長興庫), 궁궐 내의 여러 관청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마련하고 관리한 관청. 관청 이름이 새겨진 분청사기 조각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며, 경상도 일대 가마터에서 주로 발견된다.

경승부(敬承府), 1420년부터 1418년까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인수부(仁壽府), 1418년 무렵부터 1556년 무렵까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경상도 지방 이름과 함께 새겨진 것이 많다.

덕녕부(德寧府), 단종에 관한 일을 담당하기 위해 1455년에 세워진 관청. 단종이 죽은 1457년에 폐지되었다.

내섬시(內贍寺), 궁궐에 바치는 토산물,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안주, 왜인에게 주는 음식과 직조를 담당한 관청. 내섬이 새겨진 분청사기 조각은 전라도 지방 가마터에서 많이 발견된다.

예빈시(禮賓寺), 외국 사절을 대접하는 일 등을 담당한 관청. 이 관청 이름이 새겨진 분청사기 조각이 충남 공주 학봉리와 연기 금사리 가마터에서 발견된다.

내자시(內資寺), 궁중에서 쓰는 쌀, 국수, 간장, 직조 등을 담당한 관청. 이 관청 이름이 새겨진 분청사기 조각이 충남 공주 학봉리 일대 가마터에서 발견된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