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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기록문화

조선은 많은 서적을 발간하고 기록을 남기는 문화를 가졌는데, 그 중심에는 왕실이 있었다. 왕실을 대표하는 기록문화로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제된 ‘조선왕조실록’을 들 수 있다. 실록은 역대 국왕의 행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문서로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실록이 편찬되었다. 실록 외에도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참조할 수 있도록 글과 그림으로 남겨 놓은 의궤, 역대왕의 업적을 정리하여 후대왕이 참조할 수 이도록 정리한 국조보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국왕은 왕실가족, 신하, 백성 등에게 다양한 문서를 남겼는데 왕실 일가와 관련된 어책과 교명, 신하들에게 내리는 문서로 교서.교지 등이 있으며, 백성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윤음 등이 있다.

조선왕실에서 작성한 문서와 서적 등은 국가적으로 관리되었으며, 실록은 전국의 사고와 중앙에 보관했으며, 의궤를 비롯한 중요한 국가문서는 정조대에 설립된 규장각에서 관리되어 왔는데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서울대 부설 규장각에서 조선시대부터 전해오는 주요 국가문서들을 관리해오고 있다.

선원계보기략,

조선왕실의 족보, 숙종 대 기존의 ‘선원록’, ‘종친록’, ‘유부록’을 종합하여 왕의 모든 후손을 6대까지 조사하여 기록한 족보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선원속보,

조선 왕실의 족보, 고종대에 간행된 조선왕실의 종합족보이다. ‘선원계보기략’에 이어 전주 이씨를 모두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선원록아문 현판,

선원록을 만드는 관청의 현판, 선록청은 선원록을 만들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 여기에 걸었던 편액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선원록,

조선 왕실의 족보(1901년), 국가에서 관리하는 왕실 직계 자손에 관한 인적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조선왕실의 족보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족보
왕실의 족보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 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다. 왕실 족보는 국가의 족보로 인식되어 당대 최고급 종이와 장황으로 제작한 다음 사고에 보관하였다. 조선왕실의 족보는 1412년(태종12)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는데, 왕위 계승 분쟁을 우려한 태종은 왕실 족보 체제를 정비하여 태종의 후손만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선원록』에는 시조인 이한부터 태종 자신까지의 직계만 수록하고, 『종친록』에는 왕의 아들 중 적자를 대상으로 하여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아들만을 수록하였으며, 『유부록』에는 왕의 딸과 그 후손을 수록하였다. 이외에도 돈녕부에서 작성한 『왕비세보』, 왕비 가문인 외척과 왕의 사위인 부마를 대상으로 한 『돈녕보첩』 등의 왕실 족보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조보감,

역대 국왕의 통치기록(1909년), 조선시대 역대 왕의 통치행위 중 후대 왕들이 본받을만한 훌륭한 업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세종조국조보감.함(대한제국)

국조보감
『국조보감』은 역대 왕들의 통치 행위 중 후대 왕들이 본받을 만한 훌륭한 정치를 뽑아서 모은 것이다. 조선의 국왕은 실록을 직접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조보감』을 통해서 통치의 교훈을 얻고 실제 정치에 참고 하였다. 『국조보감』의 내용은 주로 해당왕의 실록에서 뽑아내었는데, 헌종이후에는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1차 사료에서 기사를 뽑아 수록하였다. 『국조보감』의 편찬은 세종 대에 태조와 태종의 보감을 편찬하려고 했지만 완성하지 못했고, 『문종실록』이 편찬된 후 1458년(세조4)에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 왕의 보감이 편찬되었다. 이후 숙종, 영조, 정조, 헌종 대에 집중적으로 편찬하여 1909년에 90권 28책을 완성하였다. 『국조보감』은 활자와 목판으로 인쇄하여 종묘와 사고에 봉안하였는데, 이는 역대 제왕의 공덕을 드러내고 왕권의 정통성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개수도감의궤,

종묘 정전을 수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1726년), 1726년(영조2)에 종묘 정전을 고쳐 수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개수도감에서 편찬하였다. 개수공사의 구체적인 논의과정 및 진행과정, 담당 관원은 물로 작업에 참여한 공장의 명단까지 상세히 수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혜능석물추배도감의궤,

혜릉의 석물설치 과정을 기록한 의궤(1722년), 1722년(경종2) 경종의 비 단의왕후(1686~1718년)의 능인 혜릉에 석물을 설치하였던 일을 기록한 의궤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진찬의례,

헌종계비 효정왕후 고희(71세) 축하잔치 의궤(대한제국, 1901년), 헌종계비 효정왕후의 71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1901년(광무5) 경운궁 경운당에서 열렸던 잔치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궁중연향정재도 목판, 궁중잔치의 다단꽃을 새긴 목판,

궁중연향정재도 목판, 궁중잔치에서 거행된 춤을 새긴 목판, 궁중 잔치에서 춤과 노래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의식 중의 하나였다. 의궤에 그림으로 수록하여 후대에 참고가 되게 하였다. 연화대무를 새긴 목판, 학무와 춘앵전을 새긴 목판, 아박을 새긴 목판, 궁중잔치의 다단꽃을 새긴 목판, 채화는 궁중 잔치에 음식상과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 비단으로 만든 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례의 지침서, 의궤
의궤는 ‘왕실 의례의 지침서’를 의미하는데, 국가와 왕실이 개최하는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록하여 훗날 행사 때 참고하기 위해 제작한 대표적인 국가기록물로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황실의 결혼, 왕실의 장례 등 각종 행사를 치를 때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하여 진행하고, 행사가 끝나면 의궤청에서 의궤를 편찬하였다. 의궤는 국왕의 결정사항, 관청 간에 주고받은 문서, 담당자 명단 및 장인 등 행사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반차도와 행사에 사용되는 각종 물품까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의궤는 조선초부터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순종대까지 제작된 의궤가 전한다. 보통 6~8부를 만드는데, 국왕이 열람하는 어람용과 주요 관청 및 사고에서 보관하는 분상용이 있다. 어람용 의궤는 최고급의 종이와 장황으로 제작되어 규장각에 보관되었고, 분상용 의궤는 의정부.춘추관.예존.서울 및 지방 사고에 나누어 보관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0 어람용의궤: 초주지, 붉은색 인찰선, 초록.청색표지, 5개박을못, 정서로 쓴 해서체
0 분상용의궤: 저주지, 검은색 인찰선, 홍색 무명.삼베 표지, 3개박을못, 행서초 혹은 반초서체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史書)로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방대한 분량의 기록물로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은 유교사회였던 조선을 특징짓는 문화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국왕의 행동이나 신하들과의 대화내용은 대부분 사관이 기록해 두며 이를 사초라고 한다. 실록은 국왕 사후에 춘추관 내 임시관청인 ‘실록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은 사관이 기록한 사초나 정부기관등에서 작성한 문서,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작성한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으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작성하는데 국왕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였다. 조선중기 연산군대에 벌어진 사화 또한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그 표피적인 동기가 되었으며, 역대 국왕이나 관료들 또한 실록에 기록된 평가에 상당히 민감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각정파의 이해관계가 얽혀 실록의 내용에 객관성이 떨어진 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각 현판, 태백산사고에 걸려 있던 현판(대한제국, 1897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중 경북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걸려 있었던 현판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전주사고와 정족산사고

시정기, 사초를 묶은 시정기(19세기), 승정원의 겸임사관이 작성한 사초를 묶은 시정기이다. 시정기는 매일의 시사를 있는 그대로 쓴 사초를 종합하여 만드는데, 정본 외에 초서로 된 부본이 있다. 금위영 관련 내용으로, 금위영은 조선후기 국왕호위와 수도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실록 작업 후 사초를 씻었다는 세검정

기록문화의 정수,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왕의 행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총 1천7백여 권에 달한다. 국보 제151호이며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국왕이 돌아가시면 역사 편찬 기관인 춘추관에서 임시 기구인 실록청을 설치하여 사관이 평소에 기록해 둔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 등 각종 자료를 모아 실록을 편찬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매일매일 국왕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사초는 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였으며, 사관은 기록에 공정성을 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초초.중초.정초의 세단계 수정 작업을 거쳐 실록을 완성하였는데, 초초와 중초는 사실의 유출을 막고자 종이의 먹글씨를 물로 씻어 냈다(세초). 완성된 실록은 중앙과 사고에 각각 봉안하였고 이후 정기적으로 바람을 쐬어 관리하였다.(포쇄) <출처:고궁박물관>

이형좌명원종공신녹권, 이형에게 내린 원종공신 녹권(1411년, 보물),

태종이 1411년(태종11) 11월에 이형에게 수여한 좌명원종 공신 녹권이다. 좌명원종공신은 태종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공을 세운 좌명공신 다음으로 공이 있는 이에게 내리는 칭호이며, 녹권은 이를 증명하는 일종의 증서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어제윤음,

정조가 함경도 백성을 위해 내린글 (1788년), 윤음은 왕이 관리나 백성에게 내린 훈유문서이다. 함경도에 가뭄이 들자 정조는 지역 주민에게 구제대책과 관세를 탕감하는 등의 내용을 적어서 내렸다. <출처:고궁박물관>

권서유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권성에게 내린 문서(1710년),

1710년(숙종36) 4월2일 숙종이 평안도병마절도사 권성에게 내린 유서이다. 유서는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 등에게 발병부와 함께 내렸던 문서이다. 병부를 소중히 간직하고 군대 동원에 신중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김덕근규장각직각고신, 김덕근을 규장각 직각에 임명하는 문서(1849년),

김덕근(1821~1868년)을 역대 국왕의 친필.문헌.서화 및 왕실도서의 관리를 책임지는 규장각의 직각으로 임명하는 고신이다. 고신은 조선시대 관리의 임명장으로 국왕이 내리는 4품 이상의 임명장은 교지라 한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왕의 문서
국왕은 왕실 가족이나 신하, 백성 등에게 다양한 종류의 문서를 내렸다. 왕실 가족에 관한 문서로는 공덕을 기리는 이름을 올릴 때 작성하는 어책, 왕비.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당부하는 말을 적은 교명 등이 있다.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로 교서.수교.교지.유서.녹권 등이 있다. 교서는 국왕의 명령서나 선포문 등을 말하며, 수교는 각 관청에 내리는 국왕의 명령이다.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이나 토지 등을 하사할 때 내리는 문서를 가리키는데, 교지 중 관직이나 관작의 임명장은 고신, 소과(생원.진사) 합격증은 백패, 대과(문.무과) 합격증은 홍패라 하였다. 유서는 관찰사나 절도사 등에 내리는 명령서로 왕의 지침이 담겨 있으며, ‘유서지보’라는 어보가 찍혀 있다. 녹권은 국가와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공신에게 내리는 증서이다. 또한 국왕은 관리나 백성들에게 국가의 위기 상황을 알기거나 농사를 권장하는 등 훈유를 담은 윤음을 내리기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개혁군주 정조

18세기말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유능하고 젊은 인재들을 발탁하여 국가정택연구와 학문 중추기관으로 발전시켰다. 규장각은 원래 숙종대에 역대 국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작은 건물로 왕실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기관있다. 당시 학문의 중심으로 국왕을 보좌하던 홍문관이나 승정원이 청직으로 일컬어지는 요직으로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고 보수적으로 바뀌면서 개혁정책을 뒷받침하고 참신한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젊고 참신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 규장각을 지원하였다. 규장각은 정약용을 비롯한 젊은 인재들을 발굴했으며, 특히 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이수 같은 서얼출신들을 등용하여 검서관 등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금보,정조의 시호를 올리는 금보(1800년, 순조 즉위),

1800년에 ‘정종’이란 묘호와 ‘문성무열성인장효’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만든 정조의 어보와 옥책이다. ‘정종’이란 묘호는 고종대인 1899년에 다시 ‘정조’로 고쳤다.

 정조의 시호를 올리는 옥책(1800년, 순조 즉위),

장헌세자옥인.죽책(함),

정조가 아버지에게 올린 옥인과 죽책(1784년). 1784년 선왕이 영조대왕의 존호를 올리면서 사도(장헌)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바친 옥인과 죽책이다. 옥인에는 ‘사도 수덕돈경 홍인 경지 장헌 세자지인’이라고 새겼다. <출처:고궁박물관>

장헌세자옥인.죽책, 정조가 아버지에게 올린 옥인과 죽책(1783년),

1783년에 대왕대비 김씨, 혜궁궁 홍씨, 사도세자의 존호를 함께 올린 후 장헌(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바친 옥인과 죽책이다. 옥인에는 ‘사도 수덕돈경 장헌 세자지인’이라고 새겼다. <출처:고궁박물관>

화성성역의궤, 수원 화성의 축조과정을 기록한 책(1800년),

1794년(정조18) 1월부터 1796년 8월까지 진행된 화성의 축조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화성 축조 직후 바로 의궤 편찬을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801년(순조1) 9월에 금속활자본으로 발간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화성성묘축문, 정조의 화성 행차 중 대성전 참배시 축문(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공식적인 첫 행사로 공자의 신위를 모신 화성 향교 대성전에 참배하였다. 이때 사용한 축문을 적은 두루마리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대전통편, 정조의 명으로 발간된 통합 법전(1785년),

1785년에 정조의 명으로 이전의 법령집들을 통합하여 편찬한 것으로, <경국대전> 이후 300년 만에 발간된 통일 법전이다. 김치인 등 당대 대표적인 문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덕무.박제가 등 규장각 검서관들이 서적의 간행과 인쇄를 감독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향례합편, 향촌의 의례에 관한 책(1797년),

조선후기 정조가 이병모(1742~1806년) 등 규장각 신하들에게 명하여 향촌의 의례에 관한 것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향촌의 음주례, 활쏘기 의식, 자치규약, 성년식, 혼례식 등 향례의 여러 의절들을 백성이 보고 실행하기에 편하도록 쉽게 풀이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규장전운, 규장각 신하들이 편찬한 운서(1796년),

정조가 이덕무 등 규장각 신하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운서(한자의 운을 분류한 책)이다. 조선의 한자음과 중국의 본토자음을 함께 표시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문원보불, 각 관청에서 사용하는 문장의 모범(1787년),

조선왕조 초기부터 정조 초기까지 각 관청에서 사용한 여러 형태의 문장을 모야 엮은 책이다. 조선시대에 왕의 이름으로 작성되는 모든 공문서의 서식과 종류 및 역대왕조의 대외 정책을 살필 수 있다. 규장각 신하들이 교정과 인쇄의 제반 과정을 담당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주서백선, 주희의 편지글을 선별하여 엮은 책(1794),

1794년(정조18)에 정조가 송대의 유학자 주희(1130~1200)의 편지글 가운데 중요한 내용 100편을 뽑아 간행한 책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규장각
정조대에는 규장각이 설립되어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문화 중흥을 이끌었다. 규장각은 원래 1694년(숙종20) 여러 임금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별도로 종정시 내에 만든 작은 건물이었다. 정조는 이를 모태로 하여 1776년 즉위 후 규장각을 임금이 쓴 글, 즉 어제를 봉안하기 위한 명분으로 창덕궁 후원에 설립하였다. 이후 규장각은 다수의 서적을 편찬.발간하면서 학술기관이자 당대의 정치와 사상을 선도하는 기구로 확대되었다. 규장각 건물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영화당 옆의 언덕ㅇ에 2층 누각으로 지어졌다. 2층에 어필로 ‘주합루’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은 ‘규장각’ 현판을 걸었다. 규장각은 정조 이후에는 그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조선 말기까지도 역대의 주요 서적을 보관하는 대표적인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수교주련, 임금의 지침을 적은 규장각 기둥 주련(1850년, 1864년),

이 주련들은 규장각에 걸려 있던 것으로 규장각에서 근무하는 신료들이 지켜야 할 임금이 내린 지침이 적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0 수교견래객불기(손님이 찾아와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
0 수교 각신재직 대관좌의 (규장각 신료는 근무 중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0 수교수대관문형 비선생 무득승당(비록 대신이나 대제학이라도 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0 수교범각신재직 비공사 무득하청(모든 규장각 신료는 근무 중에 공사가 아니면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규장각 현판(1694년),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청인 규장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1694년(숙종20) 종부시 내에 규장각을 만들고 이 현판을 걸었는데, 1776년(정조 즉위) 창덕궁 후원에 새로 지은 규장각에 옮겨 걸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규장각

내각상조회,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꽃구경 모임,
정조대에 규장각 신하(각신)들은 다른 관료에 비해 지위와 신분을 특별히 보장받았고 왕의 고문으로 우대되었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과 봄에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낚시하는 모임(내각상조회)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이 모임에서 꽃구경, 낚시, 활쏘기, 음주 외에도 즉흥시짓기가 행해졌다. 정조와 신하들은 공동으로 시를 창작함으로써 군신 상하간의 친분을 돈독히 하고 후세까지 변치 않는 관게를 맺고자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가 규장각 각신들과 꽃놀이를 즐겼다는 농산정과 낚시를 했다는 부용정

내원상화임자갱재축,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즉흥시 모음(1792년), 1792년 3월 21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농산정에서 꽃구경하고 수택재(현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긴 후 쓴 시를 모은 두루마리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 연표
1752년(영조28),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도세자(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현경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759년(영조35), 왕세손으로 책봉
1762년(영조38), 세손빈(효의왕후)과 가례, 아버지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으로 승하, 사도세자의 수은묘 조성(현재 서울시 휘경동)
1775년(영조51),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
1776년(정조 즉위), 조선 제22대 왕으로 즉위, 규장각 설립
1781년(정조5), 초계문신강제 실시
1782년(정조6), 강화도에 외규장각 설립
1785년(정조9), 국왕 호위 군대인 장용위 설치, ‘대전통편’ 반포
1789년(정조13),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현재 화성시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꿔 조성
1790년(정조14), ‘무예도보통지’ 완성
1791년(정조15), 금난전권 폐지
1795년(정조19), ‘원행을묘정리의궤’ 편찬
1796년(정조20), 수원 화성 준공
1800년(정조24),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 현륭원 동쪽에 건릉 조성
1821년(순조21), 정조비 효의왕후와 함께 현릉원 서쪽에 합장
1899년(광무3), 정저선황제로 추존

제22대 국왕, 정조
정조(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는 조선 제22대 왕으로 이름은 성, 자는 형운, 호는 홍재.만천명월주인옹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을 겪었다. 1762년(영조38) 사도세자가 죽자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으나, 1776년 왕위에 오르면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며 자신의 정통성이 사도세자에 있음을 밝혔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는 한편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규장각을 세워 유능하고 젊은 인재를 발탁하여 이곳에서 재교육시킴으로써 국가 정책 연구와 학문 중추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조선 후기 시전 상인들에게만 상품의 독점 판매권을 부여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상업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정조는 수원 화성을 건설하여 개혁 정치의 거점으로 육성시켰다. 수원을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느 자급자족의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 장용외영을 설치하였다.<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