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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국왕의 교육과 국왕이 짓고 쓴 글

조선시대 국왕은 많은 학문적교양을 수양해야 했고, 이를 위해 어려서부터 제왕을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또한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했으며, 국왕의 하루 일정 중 대부분을 할애해야 했다. 조선시대는 세자의 교육을 서연(書筵)이라고 하며, 전담 관청인 세자시강원에서 주관하였다. 세자시강원 관원들은 정부에서 주요직책을 맡은 관리들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담관원은 세조때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전담직인 녹관3명과 겸직 2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국왕 또한 서연(書筵)과 마찬가지로 주요 신하들이 참여하는 경연(經筵)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하고, 정치적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조선시대 국왕들을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기때문에 대체로 글씨가 뛰어났으며,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많은 글씨들을 남겼는데 그 중 선조가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학문적 교양의 수준은 영조와 정조가 많은 글을 남겨서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국왕을 보필하는 연구기관인 홍문관,규장각,집현전 등은 원래 국왕과 세자의 교육을 통해 유교정치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세웠던 기관들이다. 규장각은 국왕이 지은 글과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에서 출발하였고, 홍문관은 국왕의 자문기관이자 연구기관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청요직(淸要職)이다. 대부분 정승·판서나 학자나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을 거쳐갔다.

왕실도서관 내부 모습

이곳에 전시된 서가는 창덕궁 규장각에서 실제 사용된 것들이다.

서가에 책을 진열하고 있는 모습

규장각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 역할을 한 대표적인 기관은 정조에 의하여 만들어진 규장각으로 정조대에는 국내서적 약1만여점, 중국서적 약 2만여점, 총 3만여점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 이후에는 그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고종대에는 약 4만여점의 책을 소장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정조가 규장각 건물로 세운 주합루

창덕궁 궐내각사에 복원한 규장각 건물.

왕실도서의 관리
조선은 건국 초부터 문물제도의 정비, 지식의 보급, 인재 양성 등 국가 통치를 위해 다양한 도서들을 편찬하고 수집하였다. 중앙의 교서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감영에서도 도서를 편찬하였는데, 이 도서들을 민간에서 다시 인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간행된 수많은 도서들은 국가 운영에 참고 할 수 있도록 궁궐 안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조선왕실의 도서는 1420년(세종2) 집현전을 확대하여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1463년(세조9)에는 홍문관, 1776년(정조 즉위)에는 규장각 같은 학술기관과 왕실도서관으로 계승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춘방현판,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던 ‘춘방’현판(1829년),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에 걸었던 편액으로 1829년(순조29) 당시 세자였던 익종(효명세자)이 썼다. ‘천지장남궁’은 세자 거처를, ‘계옥’은 임금이나 세자를 성의껏 이끌고 보좌한다는 뜻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시강원 상아패(1885년),

임금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시강원(侍講院)의 신하를 부를 때 내린 것이다. 상아로 만들었으며, 앞면에는 시강원과 고종의 수결읠 새기고 뒷편에는 명(命)자를 새겼다. <출처:고궁박물관>

헌종어필, 헌종의 유년시절 어필

왕세자입학도,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을 그린 그림(1817년), 익종(효명세자)이 8세(순조17)가 되던 해 성균관에 입학하는 장면을 절차에 따라 차례로 그려서 묶은 첩이다. 출궁의, 작헌의, 왕복의, 수폐의, 입학의, 수하의 총 6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세자 입학도

성군을 위한 평생교육
조선의 국왕은 왕도정치를 실현할 성군이 되기 위해 평생토록 체계적을 교육받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왕위를 계승할 맏아들인 원자의 최초 교육과 양육을 담당한 기관은 보양청이었다. 이후 원자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강학청에서 원자의 나이에 맞게 교육강도를 점차 높였다. 원자교육은 스승 앞에서 예를 갖추거나 아침.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 인사하는 등 생활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서연(書筵)이란 교육 제조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왕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전담하였다. 교육은 장차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바른 역사관, 넓은 식견 등 뛰어난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경연(經筵)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경연은 각종 현안들을 논의하는 자리로서 정치적인 기능도 가졌다. <출처:고궁박물관>

동궐도에 표현된 세자가 거처했던 동궁 부근

창덕궁 성정각.

이곳에서 세자시강원에서 주관하는 서연(書筵)이 열렸으며, 국왕이 신하들과 학문이나 정치를 논하던 경연(經筵)도 열렸다.

경서통과 죽간,

유교경전을 외우거나 학습한 내용을 평가할 때 사용하던 경서통이다. 경서통에 죽간을 가득 넣어두고 그 중 하나를 뽑은 다음 거기에 적힌 글귀를 읽고 스승의 질문에 답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옥당현판,

‘홍문관’현판(1699년). 창덕궁 홍문관에 걸었던 편액으로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1699년(숙종25) 당시 홍문관 응교였던 김진규(1658~1716년0의 글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궐내각사에 위치한 홍문관

춘궁보문,

경종이 세자 시절에 쓴 글, 경종이 세자시절에 쓴 글 2편과 강독관이었던 조상우(1640~1718년)의 글 2편을 함께 묶은 첩이다. 세자의 질문에 조상우가 답변한 내용, 세자가 지은 ‘주수설’과 이에 대한 조상우의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어제자성편,

영조가 삶의 교훈이 되는 글을 모은 책(1746년), 영조가 독서와 생활을 통해 느끼고 생각한 바를 모아서 엮은 책이다. 자신의 생활에 대한 반성의 자료로 삼기 위함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왕세자에게 교훈으로 남겨 주기 위한 교재의 역할이 가장 컸다. <출처:고궁박물관>

소학,

아동용 윤리학습서, 8세 전후 어린아이들에게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교재이다. 송나라 주희의 지시로 제자인 유자징이 편찬하였는데, 총6편으로 내편4권은 입교.명륜.경신.계고이며, 외편 2권은 가언.선행으로 구성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성학집요, 이이가 국왕의 교육을 위히 편찬한 책,

1575년(선조8) 이이가 제왕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서 선조에게 바친 책이다. 서문에 의하면 사서와 육경에 있는 도의 개략을 뽑아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고 하며, 『대학』을 기본지침으로 삼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오륜행실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치고 수정하여 만든 책이다. 1797년(정조21)에 이병모 등이 왕명으로 편찬하였는데,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적과 함께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동몽선습, 아동용 오륜 교육교재,

학동들이 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힌 다음으로 배우던 교재이다.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의 오륜을 간결하게 서술했다. 영조대에 세자의 교육교재로 『동몽선습』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책가도, 책꽂이 그림(조선후기),

책가, 즉 서가로 구획한 공관에 책과 각종 고동기물, 문방구, 화훼 등을 배치하고 서양의 음영법과 투시도법을 적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책가도 병풍’은 조선 후기 왕실에서 많이 사용되어는데 주로 왕이나 세자의 거처에 놓았다. 이러한 책과 기물은 학문과 배운, 문방청완의 취미를 상징한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실교육에 사용했던 교재
왕실교육은 덕성을 교육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단련한 후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왕실 교육은 크게 경전 교육과 역사교육으로 구분되는데, 경전 교육은 덕성을 함양하는데 치중했으며, 역사교육은 중국.한국의 역사서를 익힘으로써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갖추도록 하였다. 조선왕실에서 국왕이나 왕세자 교육을 위해 직접 편찬한 책들도 많았는데, 영조가 후대 국왕들의 교육을 위해 직접 편찬한 『조감』과 『자성편』이 대표적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어필간행,

어필첩 간행 머리글, 영조가 자신의 어필첩을 간행하면서 밝힌 어필 간행 목적이다. 당시의 어필을 간행하던 관례와 목적, 보관방법 등을 설명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열성어필.

열성어필,

역대 임금의 필적을 모은책(18세기초), 경종 대에 선조.인조.효종.현종.숙종의 어필을 모아 판각하여 목판으로 찍은 것이다. 『열성어필』은 1662년(현종3)에 처음으로 간행되었으며, 숙종 연간에 처음 목판으로 간행된 이후 경종.영조 초에 각각 숙종.경종의 어필을 덧붙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균공애민.절용축력 현판(1744년),

영조가 경제업무를 담당한 호조에 내린 현판으로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는 뜻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어필, 영조대왕이 지은 오언시(1753년),

영조가 60세에 사계절을 읊은 오언시이다. 백성이 농사 짓는 것을 부지런히 해서 음식을 넉넉히 먹고, 넓은 집에서 좋은 옷 입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필진도, 서예 이론을 적은 글(1746년),

왕희지가 썼다고 알려진 서예이론서인 필진도의 일부를 영조가 진체와 촉체로 쓴 것이다. 진체는 왕희지체이며, 촉체는 석봉체의 영향을 받은 송설체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간찰, 정조가 이익운에게 보낸 편지(1798년),

정조가 당시 승지로 있으면서 함흥에 갔다 돌아온 이익운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이익운(1748~1817년)의 본관은 연안, 자는 계수, 호는 학록으로, 채제공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선조의 오언절구시를 새긴 현판,

창덕궁 영화당 벽에 걸렸던 현판으로 선조의 어필이다. 오언절구시를 각 절구마다 4개의 현판으로 만들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경림연연운축, 정조가 유생에게 잔치를 베풀고 쓴 시(1792년),

1792년 봄에 정조는 성균관의 제술(시나 글을 지음)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들을 창덕궁 희정당에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에서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지은 시를 모은 두루마리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의 칠언절구시를 새긴 현판,

영조가 연못 옆 정자의 나간에 기대어 스스로 깨달은 마음을 읊은 시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왕이 짓고 쓴글
국왕이 지은 글은 어제, 국왕의 글씨는 어필.어서.신한, 장차 임금이 될 세자의 글은 예제, 세자의 글씨는 예필이라고 하였다. 어제.어필은 제왕의 풍모를 전해주고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존숭의 대상으로 삼았다. 국왕은 관직을 제수할 때 어필로 직접 써서 내려주기도 하고, 신료들에게 국정을 자문하는 공적인 편지나 가족, 친지들에게 사적인 문안 편지를 친히 써서 내려 보내기도 했다. 또 궁궐.사직.서원 등 건물 편액이나 건물의 내력, 감상이나 추억에 관한 글도 썼는데, 이들 어필 현판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새로 즉위한 왕은 선왕의 실록 편찬과 함께 어제.어필을 수집하고 간행하였다.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를 편집.인쇄하여 권이나 첩으로 만들거나 나무 또는 돌에 새겨 보관하기도 하였다. 1662년(현종3) 『열성어필첩』이 처음으로 간행된 이후 숙종.경종.영조 대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는데, 원본과 탁본 그리고 돌에 새긴 것까지 함께 보존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학문으로 다스린 나라, 조선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글과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문치와 예치를 지향했다. 이에 학문을 숭상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집현전.홍문관.규장각 등 학술 연구 기관이 발달하였다. 국왕은 어려서는 세자 교육인 서연(書筵)을 통해, 임금이 된 이후에는 경연(經筵)을 통해 매일 아침.점심.저녁 세 차례식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조선의 국왕은 정치적 지도자인 동시에 최고의 학자이기도 했다. 국왕은 평생토록 학문을 연마했는데, 글짓기와 서예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학문이 문장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글씨는 곧 정신과 마음의 표현이라 여겼다. 국왕은 유명 학자와 문인들의 글을 읽고 쓰고 감상했으며, 성현의 격언을 기록하며 그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 또한 궁궐 후원에서 신하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여가를 즐기고, 당대 최고의 문인과 교류하며 문예사조를 이끌어가기도 하였다. 조선의 국왕은 문화와 예술의 소양을 닦고 이를 개인 생활에서부터 공적인 국가 활동에 이르기까지 널리 펼쳐 문화 국가를 만들고자 힘썼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