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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99칸 대저택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에 위치한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99칸의 대저택인 선교장(船橋莊)이다. 집주인인 조선시대 이내번이 처음 지었는데 원래는 안채만 있는 평범하고 소박한 집이었으나, 그 후로 계속 증축이 이루어져서 지금의 99칸 대저택을 이루었다. 오죽헌에서 경포호수로 가는 길에 있는 이집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시킨다고해서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99칸 대저택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선교장은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구조 또한 일반적인 대저택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관동팔경(關東八景) 유람을 떠났던 많은 고위층과 선비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방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원 별당인 활래정을 비롯하여 열화당을 비롯하여 여러동의 사랑채 건물이 있고, 그것도 부족해서 안채와 별당, 행랑채에도 많은 방을 두고 있다. 하인들이나 집안일을 돕는 사람들이 머무는 다른 지방 대저택의 행랑채와는 달리 선교장의 행랑채는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강릉 선교장>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99칸 대저택인 선교장경포호수 입구에 위치한 이 저택은 강릉지방을 방문했던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여러동의 사랑채 건물과 행각들을 두고 있다.사랑채를 출입하는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고, 안채 출입문은 별도로 두고 있다. 전면에 길게 행랑채들을 두고 있다.

<행랑채>

건물 앞쪽에는 긴 행각이 연결되어 있고 중간에 솟을대문과 안채 출입문이 있다. 행각은 손님들이 머물수 있도록 지은 것으로 보인다. 행각 바깥쪽에 온돌과 연결된 벽돌로 만든 굴뚝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선교장 솟을대문>

‘선교유거’(仙橋幽居)’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은 바깥마당보다 높으며 계단대신 돌을 깔아 만든 경사진 길이 있다.

<솟을대문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는 행랑채>

하인들이 머무는 방이 아니라 선교장을 찾은 손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보인다. 방 앞에는 앉을 수 있는 작은 툇마루를 설치해 놓았다.

<행랑채 방 내부>

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든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서별당으로 들어가는 작은 협문>

담장을 쌓아 안채를 공간적으로 분리해주고 있다.

<안채 출입문>

바깥쪽에서 안채 마당을 볼 수 없도록 나무로 벽을 만들어 놓고 있다.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과 중사랑

강릉 선교장에서 외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공간인 사랑채 영역이다. 선교장 안채 동쪽편에 위치한 이 곳은 선교장 주인의 거처인 열화당을 중심으로 지체가 높은 인사가 묵을 수 있는 중사랑과 마치 콘도를 연상시키듯이 늘어서 있는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열화당은 구한말에 건립된 건물로 이 곳에 러시아 공사관 인사도 많이 묵었던지 공사관에서 러시아식으로 테라스를 선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강릉지역을 포함하여 관동지역이 많은 선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피서지 또는 여행지였던 까닭에 선교장은 개인 저택이지만,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당히 많은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작은 방들을 많이 배치해 놓고 있다.

강릉 선교장의 사랑채로 조선 순조 15년(1815)에 오은 처사 이후(李厚)가 지었다. 높은 댓돌 위에 자리하고 있어 층층다리를 올라서야 들어설 수 있다. 건물 앞쪽에는 동판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시설을 두어 햇빛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선교장 사랑채인 열화당>

1815년에 건립된 건물로서 선교장 주인 남자의 거처로 앞면 4칸에 누마루와 테라스를 두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구한말에 지어진 이 건물은 건물에 붉은 벽돌을 사용하는 등 구한말에 지어진 궁궐건물의 형태를 많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열화당은 ‘일가 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열화당 테라스>

열화당 건물 앞의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식의 건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준 것이라 한다. 아마도 러시아 공사관 인사를 비롯하여 많은 외국인들도 구한말 피서지를 찾아서 이 곳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열화당 대청마루>

대청마루에는 분합문을 달아 놓고 있으며, 나무로 만든 계단을 설치해 놓고 있다. 마루 아래에 벽돌을 쌓는 등 당시로서는 화려한 건축기술과 고급자재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열화당 뒷편>

툇마루를 설치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는데, 다른 한옥과 달리 벽돌을 사용하고 있다.

<열화당 뒷편 초가로 지은 정자>

<선교장 중사랑>

선교장 손님 맞이에 주로 사용된 건물이며 전국의 학자, 풍류객들과 교분을 나누던 곳이다. 앞면 5칸의 건물로 5개의 방을 두고 있는데 외지에서 온 고위 인사들이 묵었던 방으로 보인다.

<중사랑 내부>

살림집인 동별당과 안채

99칸의 대저택 중에서 선교장 주인이 실제 거주하는 영역으로는 안채와 안채 앞쪽에 위치한 동별당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인을 위한 공간이지만 안채와 동별당에도 많은 방을 두고 있어 손님이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지체 높은 여자 손님인 경우 안채 쪽에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부분이다.

강릉 선교장의 안채는 넓은 대청을 중심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배열하였다. 당당한 규모의 건물로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안마당>

선교장 동쪽편은 가족들이 일상적으로 생화하는 영역으로 안채주옥과 부속건물, 동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주옥>

1703년 선교장 건물 중 최초로 건립한 건물로써 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이다. 앞면 5칸의 규모가 큰 건물로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대청마루>

일반적으로 안채 대청마루는 집안은 큰 행사나 제사 등을 치루는 공간으로 넓게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선교장은 안채 대청마루는 비교적 넓지 않은 편이다. 집안행사는 다른 공간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채 부엌>

<날개채>

안채가 있는 마당에 별도로 ‘ㄱ’자형 건물이 있으며 많은 방을 두고 있다.

강릉 선교장의 별당 건물로 주인이 주로 생활하던 공간이며, 안채 오른쪽에 있다. 안채보다 한단 낮은 위치에 있는 동별당은 ㄱ자형의 평면을 갖추고 있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선교장 안채 앞쪽에 위치한 동별당>

‘ㄱ’자형 건물 배치를 하고 있고, 집안의 잔치나 손님 맞이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방과 마루의 모든 벽체가 문으로 되어 있으며, 5개의 방으로 구성할 수 있어, 여기서도 손님이 묵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서별당에서 본 안채>

서별당과 연결된 출입문이 있다. 서별당과 안채는 여인들의 공간으로 보이며, 이 곳을 방문한 여자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안채 뒷편에 위치한 사당>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서별당과 외별당

선교장은 안채, 3동의 별당, 행랑채, 사랑채, 열화당과 정자인 활래정을 두고 있는데 구한말 규제가 느슨할 때 많은 증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이 저택에는 독립된 가옥으로 외별당과 서별당을 두고 있는데 서별당은 집안의 어른이 거처하던 곳이고, 외별당은 바깥쪽에 독립된 가옥으로 자식들이 분가하기 전에 임시로 거처하던 곳으로 보인다.

서별당은 강릉 선교장의 별당 건물로 주인이 주로 생활하던 공간이며, 안채 오른쪽에 있다. 안채보다 한단 낮은 위치에 있는 동별당은 ㄱ자형의 평면을 갖추고 있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서별당>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주로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아마도 집안에 여자어른이 주로 이 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건물처럼 화강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위에 건물을 지었다.

<서별당 마당에 있는 연지당>

마당은 받재마당이라 하여 안채로 들이는 곡식이나 금전을 받을 때 사용하였고, 방은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라고 하는데, 방의 갯수가 여러개이고, 건물이 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선교장을 찾은 고위인사 일행이나 일가친적 중 지위가 높은 여인들이 머물수 있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랑채 마당에서 본 서별당과 연지당>

<선교장 건물 동쪽 끝에 위치한 외별당>

담장과 건물로 본채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분가한 가족들이 살 수 있도록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외별당 출입문과 문간채>

동쪽편에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독립된 가옥을 형성하고 있다. 맏아들의 신혼 살림이나 작은 아들의 분가 분가 이전에 사용하던 건물이며 손자들도 사용하였다.

<본채>

건물은 앞면이 3칸인 건물이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날개채>

사랑채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외별당 마당의 장독대>

선교장 부속건물들

<선교장 서쪽 살림집>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살림집들이 있다.

<초가집>

선교장 하인들이 살았던 초가집들을 복원해 놓고 있는데, 지금은 장터처럼 사용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곡식을 저장하던 큰 창고>

<활래정>

선교장 입구에는 창덕궁 후원의 연못을 본떠서 만든 큰 연못과 별당겸 정자인 이 자리잡고 있다. 활래정은 궁궐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물위에 떠 있는 누마루를 두고 있는 정자로 온돌방과, 다실도 두고 있는 별당 역할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연못은 선교장 서쪽 봉우리에서 연못을 거쳐 경포호수로 빠져 나가는 활수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구한말에 세워진 이 건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많은 한국 건축양식들이 대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