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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보물) 일원, 조선왕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거처했던 궁궐 전각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위치한 낙선재(보물) 일원은 1846년(헌종 12)는 창건된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와 취운정.한정당.상량정, 승화루, 삼삼와, 칠분서 등을 볼 수 있는데, 승화루 등 낙선재 뒷편에 있는 건물들은 실제로는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에 속한 건물들이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이었던 경빈을 위해 지은 건물로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 경복궁 건청궁처럼 국왕이나 왕비들이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사대부 저택처럼 꾸며놓은 처소이다.

낙선재는 사대부저택을 형식을 궁궐 건물이 적용한 건축적인 의미가 많은 곳이지만,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궁궐 전각이다. 낙선재는 헌종이 자신와 왕비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한 거처로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고자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낙선재는 19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황제가 된 후 창덕궁에 머물렀던 순종은 일제강점기에 순정효향후와 함께 낙선재 일원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또한 순정효황후는 해방 이후 1966년까지 낙선재에서 머물렀으며, 영친왕 또한 1970년 이곳에 죽었다. 영친왕비와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가 1989년 이곳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날때까지 조선왕실 인사들의 마지막 거처 역할을 했던 장소이다.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와 함께 거처 할 목적으로 지었으며 정조 때 왕의 독서처로 지었던 수강재와 나란히 이어져 있다. 예술품을 감상하며 여가를 보내는 사랑채 역할을 했던 낙선재는 헌종의 문예 취향을 잘 보여준다. 낙선재 일원은 사랑채인 낙선재, 안채인 석복헌, 대비가 거처할 곳으로 마련한 수강재로 구성되어 있다.

<동궐도에 나타난 낙선대 일원>

동궐도는 연경당이 세워지기 이전인 순조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낙선재가 그려져 있지 않다. 낙선재가 있는 곳에는 정조대에 세자를 위한 동궁으로 중희당을 건립하면서 규장각과 비슷한 기능을 갖는 공간으로 세운 소주합루(지금의 승화루)가 있었다. 소주합루는 헌종대에 낙선재가 세워지면서 ‘승화루’로 개명되었고 규장각처럼 도서를 소장하는 서고 역할을 했다. 승화루에는 실제로 많은 책들과 서화가 소장되어 있었다.

<낙선재 행각>

낙선재 일원은 사대부가 살았던 대저택처럼 궁궐내 지은 전각이다. 조선시대 국왕들 중에는 궁궐에서 태어나 세자나 왕자를 지낸 후 국왕에 즉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바깥 사저에서 태어나거나 어린시절을 보낸 후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국왕들은 어린시절 편안했던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이궁(離宮)으로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궁궐을 지었는데, 창덕궁 연경당과 낙선재, 경복궁 건청궁이 대표적이다.

<정문인 장락문>

행각 중간에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의 출입문이다.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 건물이지만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 않으며, 왼쪽편 모서리에 따로 두고 있다. 국왕이 드나드는 장락문은 신하들이나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 출입문>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바깥에서 마당이 보이지 않는다.

낙선재는 사대부 저택 사랑채처럼 지은 건물로 당시 유행하던 누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이다. 낙선재에는 청나라 명필 옹방강 쓴 주련을 대청마루 기둥에 걸어 놓고 있는 등 헌종의 중국 문물에 대한 취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복헌은 경빈을 위해 지은 건물로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 안채와 거의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반면에 대비 처소로 마련한 수강재는 일반 사대부 저택의 사랑채나 별채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세건물 후원에는 다른 궁궐건물과 마찬가지로 경사진 언덕에 장대석으로 화계를 꾸며 놓고 있으며, 그 뒷편에 후원 정자 또는 별당이라 할 수 있는 한정당과 취운정을 두어 사대부저택 구조를 완성하고 있다. 낙선재 건물들은 대체로 구한말 유행했던 사대부 저택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창살문양이나 정자 등에서 당시 상류층들이 선호했던 청나라 건축양식을 많이 볼 수 있다.

<낙선재 마당>

대문을 들어서면 낙선재 누마루와 그 뒷편의 중국풍 정자인 상량정이 보인다.

<낙선재>

 낙선재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왼쪽에 돌출한 1칸이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로 되어 있다. 누마루 뒤로는 온돌방 1칸을 두고, 대청2칸, 온돌방 2칸, 다락방 1칸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낙선재 상량문 현판(1847년)>

헌종이 1847년(헌종13) 낙선재를 세우고 지은 상량문 현판으로 당시 승정원의 도승지였던 조봉하(1817~?년)가 명을 받아 글씨를 썼다.

<누마루>

석재로 길게 만들어진 주춧돌 위에 건물을 얹은 누마루는 구한말 양반들의 저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건물은 간소하게 지어졌지만, 문살과 장식등에서 궁궐 전각의 화려함이 남아 있다.

<처마와 공포>

현판은 청나라 섭지선의 글씨라 한다.

<‘보소당’ 현판>

창덕궁 낙선재에 걸었던 현판이다. ‘보소당’은 현종임금의 당호로, ‘보소’는  ‘중국 송나라 최고의 문인으로 널리 알려신 소식의 문예를 보배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대청마루와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기둥에 걸린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스승으로 당대의 명필인 청나라 옹방강이 썼다고 한다. 낙선재를 세운 헌종의 문예 취향을 잘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낙선재 행각>

낙선재 행각에는 국왕의 집무실과 침전으로 사용했던 공간으로 국왕을 수행하던 내관들을 비롯한 많은 인원들이 머물 수 있도록 크고 작은 방들을 두고 있다. 이는 사대부 저택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뒷마당 화계>

작은 꽃나무, 벽돌로 쌓은 굴뚝, 수석 등이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석복헌 출입문>

낙선재에서 안채에 해당하는 석복헌 출입문이다. 솟을대문을 하지 않고 있으며, 문간채가 있는 출입문을 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고, 연결복도가 보인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 내부를 바깥에서 볼 수 없도록 한 동선배치이다.

<석복헌  마당>

석복헌은 사대부 저택 안채처럼 ‘ㅁ’자로 지어진 건물이며, 중문 앞 마당에 문간채들이 들어서 있다.

<문간채>

중문이 있는 문간채이다. 다른 건물에 비해서 특히 사대부 저택의 형태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안마당>

석복헌은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을 들이면서 거처할 공간으로 마련한 공간이다.  앞면 6칸에 양쪽에 날개채를 두고 있다. 중정을 두고 있는 ‘ㅁ’자형 사대부 저택의 안채 형태를 하고 있는데, 특히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 안채와 거의 비슷한 구조이다.

<대청마루>

<동쪽 날개채>

.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과 비슷한 구조이다.

<서쪽 날개채>

<부엌>

부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궁이만 있고 부엌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결 복도>

왕비가 머무는 처소인 석복헌은 대왕대비 처소로 마련한 수강재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수강재 마당>

수강재는 헌종이 대비를 위해 마련한 거처이다. 이는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의 거처와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수강재>

사대부 저택의 안채로 지어진 석복헌과는 달리 수강재는 ‘ㄱ’자형 사랑채와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다. 일반사대부 저택의 양식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건물형태나 배치는 궁궐 전각의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행각>

수강재 마당은 크고 작은 방들이 있는 행각으로 둘러져 있다. 대비를 수행하는 인원들이 머무는 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위치한 수강재 출입문>

<바깥에서 본 모습>

수강재 바깥쪽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어서 바깥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수강재 뒷편으로는 한정당.취운정 등의 정자와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수강재 뒷편 취운정과 주변의 울창한 수목들>

<수강재 동쪽 건물>

수강재 동쪽으로는 ‘-‘자형으로 된 2동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수행원들이 거처하는 공간과 부엌, 창고 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쪽 건물>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방과 여러개의 부엌과 광으로 구성된 건물로 음식을 준비하는 행랑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뒷편 건물>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긴 건물로 창고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낙선재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보인다.

<건물 사이의 공간>

<종묘로 향하는 연결되는 길>

<낙선재 뒷편>

낙선재 뒷편으로는 중국풍의 육각형 정자인 상량정이 있다. 창호를 열면 주위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구조이다. 뒷편에 있는 행각은 동궁에 속한 서적들을 보관하는 서고였다고 하며, 상당히 많은 서적과 그림을 소장했다고 한다.

<낙선재 서쪽 화계>

경사진 언덕에 계단을 조성하여 크고 작은 수목들을 심어 놓고 있다. 화계 윗쪽에는 승화루가 위치하고 있다. 승화루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에 속한 건물로 정조가 세자를 위한 동궁인 중희당을 건립하면서 주합루를 모방하여 ‘소주합루’를 세웠는데, 헌종대에 승화루로 바뀌었다.

<창덕궁 낙선재 승화루 ‘향천연지’글씨 탁본>

창덕궁 낙선재 승화루에 있는 돌 연못의 글씨 부분을 탁본한 것이다. ‘향천연지’는 향그런 샘물과 같은 벼루모양의 연못을 뜻한다. <출처:고궁박물관>

 낙선재 일원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등을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신곳이었다. 헌종의 뜻에 따라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외형을 지녔으며, 또한 외국 문물에 대한 왕의 기호를 반영하듯 낙선재 창살무늬와 상량정의 건축 양식 등에서 청나라 양식을 볼 수 있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며, 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