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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조선의 궁궐

궁궐은 국왕이 곳이자 국왕과 신하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의 중심이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천도를 결정하면서 새로운 수도와 궁궐터를 건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이 궁궐을 짓고 수도를 건설하는데에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의 「고공기」를 기본으로 하여, 풍수리리사상과 군사,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건설되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태조4년(1395)에 종묘.사직과 함께 수도 한양에서 제일먼저 건설되었다. 도시의 설계에 있어서 궁궐을 중앙에 두고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을 두기는 했지만, 「고공기」에 정의된 궁궐 뒷편에 시장을 비롯한 주거지를 둔다는 개념은 지켜지지 않고 궁궐 앞 육조거리 동쪽에 세워지는 등 풍수지리사상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

<수도 한양과 5대 궁궐 (도성도 중)>

조선은 법궁인 경복궁을 세운 후 상왕을 위한 공간이자 유사시 사용할 수 있는 궁궐로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경복궁 동쪽에 세웠고, 궁궐 주변에 지배층의 주거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후 창덕궁이 확장되면서 그 옆에 창경궁이 세워졌다. 임진왜란을 궁궐들이 화재소실되자 창덕궁을 우선 복원하여 법궁으로 삼고, 이궁(離宮)으로 서궐이라 불렸던 경덕궁(경희궁)을 세웠다. 덕수궁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구한말 대한제국을 선포할때 조성하기 시작한 궁궐로 경운궁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이 세웠던 5개의 궁궐들은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지만, 그 원형이 남아 있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그 중 창덕궁은 조선중기 이후에 중건되었지만, 가장 오랜 기간동안 국왕이 거처했던 궁궐로 한국적인 정원이 특징인 후원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1990년대 옛 총독부건물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제모습을 찾기 시작한 경복궁은 조선을 대표하는 법궁으로서 그 위용을 되찾아가고 있다.

조선 왕조 5대 궁궐과 종묘

경복궁(사적),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으로 1395년(태조4)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모두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867년(고종4)에 재건하였다.

창덕궁(사적적,유네스크 세계문화유산),

1405년(태종5)에 이궁으로 세운 궁궐로 임진왜란 이후 가장 오랫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경궁(사적),

1483년(성종14)에 수강궁 자리에 창건되었다. 창덕궁과 접해 있으며,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다.

경덕궁(현 경희궁, 사적),

동궐에 대응하여 서궐이라 불리며, 1671년(광해군9)에 창건을 시작하였다. 초기 궁명은 경덕궁이었으나 1760년(영조36)에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운궁(현 덕수궁, 사적),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1897년 고종이 경운궁에 근거지를 옮기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후 10여년간 대한제국 격동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묘(사적)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으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1395년 경복궁의 왼편에 지었다. 지금의 종묘는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궁궐 영건 역사와 사용기한,

조선시대 수도 한양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현 경희궁), 경운궁(현 덕수궁) 등 5개의 궁궐이 있었다. 임금은 한 궁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경우에 따라 궁궐을 옮겨가며 사용하였는데,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사랑을 받으며 사용된 궁은 창덕궁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수선전도,

서울의 옛지도(19세기, 복제), 김정호(?~1866년)의 제작으로 추정되는 목판본의 서울 지도이다. 서울 한성의 주요도로와 궁궐.종묘.사직.문묘.성곽.교량.산천.봉수.명승과 도성 밖의 동리와 산 등을 자세히 그려 넣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선사’ 현판(1895년),

‘영선사’는 궁궐의 건축이나 수리 등 토목 관련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1895년 궁내부에 설치되었다가 1907년 폐지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궐지(1834~1849년),

숙종대에 편찬한 『궁궐지』원본 1권과 헌종 대에 증보 간행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궁궐지 등 총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궐지

궁궐지, 궁궐에 관한 기록
궁궐지는 조선시대 궁궐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이다. 숙종의 명으로 편찬된 것으로 현재는 헌종 대의 증보판과 순종대 편찬본이 전한다. 헌종대의 증보판은 숙종 대 편찬된 원본 1권과 헌종 대에 증보한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 4권을 하나로 하는 5책 한 질과 숙종 대의 원본 대신 도성지 1권을 필두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 4권과 5책을 한 질로 하는 2가지 종류가 편찬되었다. 헌종 대 증보판은 각 궁궐별로 전각의 위치와 그곳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순종 대 편찬본은 숙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시작한 공사가 끝난 뒤 편찬한 것으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만을 대상으로 하여 각 궁의 전각 및 모든 건물의 칸수와 척량, 구조형식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삼지창(궁궐 건물에 새가 앉지 못하도록 처마 밑에 꽂아서 부시의 역할을 하였다.), 고리침(환침), 돌쩌귀(접철), 문고리(문환),

 철제손잡이(철병), 쇠못(정),

익공,

기둥의 상부에서 지붕의 하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공포 부재 중 하나이다.

반자 청판, 나무망치 ‘메’, 목퇴,

반자 청판, 궁궐 전각 내부의 경사진 빗천장에 끼워 놓았던 청판이다. 단청으로 문양을 그려 화려하게 장엄하였다. 나무망치 ‘메’, 목퇴, 각종 부재를 맞추거나 치는 용도로 사용하던 나무망치이다.

경복궁 수습 건축 부재,
2001년부터 이루어진 경복궁 흥례문 권역 복원 과정에서 수습된 각종 건축 부재들이다. 지붕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짜 맞추어 댄 공포와 주두, 소로, 첨차, 살미 등의 목조 건축 부재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또 공사에 쓰였던 다양한 크기의 철못과 띠철, 꺽쇠, 망치를 비롯하여 다수의 기와,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궁궐 건축의 특징과 역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우리궁궐의 역사와 복원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이상국가 구현의 철학을 담아 당대 최고의 기술로 궁궐을 조성하였다. 이후 600여 년간 여러 역사적 사건 속에서 영건과 중건, 수리가 거듭되어 왔다. 그러나 1910년 국권 피탈로 인하여 일제에 의해 궁궐의 훼손과 철거가 자행되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제 모습을 잃고 공원이나 유원지으 모습으로 바뀌고, 박람회와 같은 행사장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 경제 발전과 맞물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문화 관광 산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즈음 조선 왕궁의 복원.정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궁궐은 과거 공원과 유원지의 모습을 탈피하고 역사성을 보존하는 사적지로 인식의 전환을 맞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궁궐의 복원과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총독부 청사와 같은 이질적인 건물과 시설물들을 철거하고 본래의 건물들을 복원하면서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 가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온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우러러보고 출입하기 때문에 그 제도를 웅장하게 하여 존엄을 보이고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 -『궁궐지』-

북궐도(경복궁, 1975년),

혜촌 김학수(1919~2009년) 화백이 경복궁 관련 도면 및 각종 자료 등을 근거로 하여 고종대 중건 당시의 경복궁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경복궁 근정전 상량문(1867년),

근정전 중건 공사 내력을 적은 글로 조두순이 짓고 김병덕이 글씨를 썼다. 2001년 근정전 중수공사 때 상층 종도리 하단에서 발견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예를 행하는 궁궐의 중심공간, 정전(正殿)
정전은 궁궐의 가장 중심 전각으로 법전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조하를 받는 장소이며, 국가의 중요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다. 경복궁은 근정전, 창덕궁은 인정전, 창경궁은 명정전, 경희궁은 숭정전, 덕수궁은 중화전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마당에 박석을 깔고 월대 위에 높이 세워져 있어 궁궐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자 중심 전각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낸다. 정전 앞 박석이 깔린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 하며, 정1품부터 종9품까지 백관의 품계에 따른 정렬을 위한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문반은 동편 품계석 옆에, 무반은 서편 품계석 옆에 정렬하였다. 전각 내부 임금의 자리에는 용상, 일월오봉도 병풍, 당가, 보개 등 왕의 상징물들을 설치하여 왕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참여를 밝힌 글(1867년),

왕명을 받들어 실질적으로 경복궁 중건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의 업적을 공사 감독관 목록에 넣지 않고 격을 달리 해 붉은 비단에 따로 쓴 글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 연간의 경복궁 중건
1395년(태조4)에 창건된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래 중건되지 못하고 폐허로 남아 있었다. 경복궁의 중건 논의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270여 년이 지난 1865년(고종2)에 신정왕후의 명으로 재건이 결정되었다. 재건 공사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1867년(고종4) 11월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이 완공되었다. 고종은 같은 해 11월 16일 친히 경복궁에 나아가 근정전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으며, 1868년 7월2일 경복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2001년 근정전 중수공사를 위해 종도리를 살피던 중 1867년 중건당시에 봉안했던 근정전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근정전 중수공사 관계자 명단, 영건도감감동좌목(1867년),

근정전 중수공사를 위해 만든 영건도감의 도제조인 조두순과 김병학을 비롯하여 제조21인, 부제조4인 등 관계자 156명의 이름을 적은 글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경복궁 근정문 상량문(복제, 1867년),

1867년(고종4) 경복궁의 근정문을 상량할 때 넣은 것으로 2001년 중수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왕에 대한 칭송과 나라의 안녕을 염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경복궁, 조선의 법궁
경복궁은 1395년(태조4)에 가장 먼전 창건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1553년(명종8)의 대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고 난 이후 재건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어 오랜 기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867년(고종4)에 재건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고 경내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의 수난을 겪다가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복원정화 사업이 추진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던 정전인 근정전,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편전인 사정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잇는 중심 영역을 주축선으로 하여 고대의 규범과 질서에 따라 대칭구조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을 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동궐도(창덕궁.창경궁도, 1828~1830년),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동궐 그림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궐’이라 하였다. 궁궐 각 전각의 외형은 물론 다양한 설치물과 조경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당시 궁궐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1828년 무너진 금루각은 터만 그려져 있지만 1830년 화재로 타버린 창경궁의 환경전, 영화당, 경춘전 등의 건물은 모두 원래 모습대로 그려져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청기와

청기와는 점토로 기와 형태를 빚은 후 염초로 만든 유약을 발라 푸른 빛깔이 나도록 구운 고급 기와이다.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 등 궁궐의 중요한 전각을 청기와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사치를 지양하고 백성의 수고를 덜고자 비용도 많이 들고 공정이 까다로운 청기와의 사용을 줄였다. <동궐도>에는 선정전과 징광루 두 곳에 청기와 지붕이 보인다. 두 건물은 모두 1647년(인조25) 창덕궁 중건 때 청기와가 얹혀 있던 인경궁의 편전과 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선정전의 청기와 지붕은 현존하는 궁궐 건축 중에서 유일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선정전에 사용되었던 청기와

궁궐 출토 기와,

경복궁과 창덕궁 발굴조사 때 출토된 기와 조각들이다. 궁궐 지붕에는 찰흙을 빚어 구운 토기와뿐만 아니라 푸른 빛깔이 나도록 유약을 발라 구운 청기와 등을 얹었다. 기와의 종류에는 수키와, 암키와, 막새 등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며, 막새기와에는 운룡문, 봉황문 등을 장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평면도,

창덕궁 전각의 배치도를 그린 평면 배치도이다. 경훈각,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대조전, 대비의 공간인 집상전이 나타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의 동궐, 창덕궁
창덕궁은 1405년(태종5)에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된 이후 가장 먼저 복구되어 1867년(고종4) 경복궁이 중건되기 이전까지 오랜 기간동안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부 형태나 규모가 개조되고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1990~1999년에 대규모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은 창덕궁 앞에 위치한 종묘로 인하여 궁궐의 서쪽에 치우쳐 있다.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대조전도 주변 지세에 맞춰 축에 변화를 주어 배치한 점은 남북축으로 일직선상에 전각을 배치한 경복궁과 대비된다.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추괴었으며 동쪽으로는 창경궁과 연결되어 공간 활용이 더욱 유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위장낙인, 통부낙인, 통부, 야간 통행패, 

위장낙인, 위장패 뒷편에 찍었던 낙인이다. 위장은 궁궐의 동서남북 위장소에서 숙직하며 수시로 순찰하면서 도둑.화재 등 경비 상황을 점검하였다.통부낙인, 조선시대 궁궐 출입자의 야간통행증인 통부에 위조 방지를 위해 찍었던 낙인이다. 통부, 야간 통행패, 궁궐 출입자의 야간통행증이다. 둥근 패의 한 면에 ‘통부’라고 새기고 그 위에 다시 같은 글자의 낙인을 찍어 위조를 방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위장소인, 호위청인, 순장패, 

위장소인, 위장소(1459~1857년)는 오위도총부의 위장이 숙직하던 곳으로 동서남북의 4개소에 설치되었다. 각 소의 위장과 부장은 매일 밤 맡은 구역을 시간별로 나누어 순찰하였다. 호위청인, 호위청은 인조반정 이후 궁궐의 숙위를 위해 1623년(인조1)에 설치한 병조 소속의 관청이다. 순장패, 야간순찰패, 조선시대 궁궐과 도성의 야간순찰을 책임지던 순장이 지니고 있던 표신이다. 이 순장패의 한 면에는 ‘순장’, 다른 면에는 ‘신’자가 양각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창경궁의 경비체계

궁궐의 호위체계와 출입
궁궐은 국왕과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자 국정을 운영하는 곳이었던 만큼 경비가 삼엄했고,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궁궐 호위는 병조 관할 내병조의 총지휘하에 오위도총부, 삼군영, 수문장청이 담당하여 궁궐담장 내부와 외부, 궁궐문의 3중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국왕이 주로 계시는 정전과 편전 일대 경호와 경비는 별도로 금군청, 호위청, 선전관청에 소속된 군관들이 담당했다. 궁궐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표식이 필요한데, 궁궐에 드나드는 일꾼들과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관서의 관계자들에게는 신부와 한부를 배포하였다. 9품 이상의 관원들은 별도의 표식 없이도 궁궐 출입이 가능했으나, 특별히 왕의 부름에 응할 때는 승정원에서 명패를 꼭 받아가야 했다. 이처럼 관원들의 지위와 사안에 따라서 여러 가지 출입하는 방식과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낙선재와 연경당
궁궐 건축물은 화려하게 단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창덕궁의 낙선재와 연경당은 단청과 장식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어서 사대부가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와 함께 거처할 목적으로 지었으며 정조 때 왕의 독서처로 지었던 수강재와 나란히 이어져 있다. 예술품을 감상하며 여가를 보내는 사랑채 역할을 하였던 낙선재는 헌종의 문예 취향을 잘 보여 준다. 연경당은 1827년(순조27) 효명세자(1809~1930)가 창건한 곳으로 부모인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가 행해진 곳이다. 현재의 모습은 고종 연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연경당에 걸었던 주련,

 ‘맑은 흥은 솟아오르려는 달보다 높고’, ‘깊은 정은 개봉하려는 술독에 비할 만큼 넘치네’라는 뜻으로 서로 대련을 이룬다. 현재 창덕궁 연경당에 같은 글씨의 주련이 걸려 있다. 창덕궁 연경당에 걸었던 주련, ‘구름 속 도성에는 한 쌍의 궁궐이 있고’, ‘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가 있네’라는 대구의 시를 적은 주련이다. 주련은 건물의 기둥을 장식하기 위해 세로로 글귀를 적어 걸어 놓은 것을 말한다. 현재 창덕궁 연경당에 동일한 주련이 걸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낙선재 상량문 현판(1847년),

헌종이 1847년(헌종13) 낙선재를 세우고 지은 상량문 현판으로 당시 승정원의 도승지였던 조봉하(1817~?)가 명을 받아 글씨를 썼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보소당’현판,

창덕궁 낙선재에 걸었던 현판이다. ‘보소당’은 헌종 임금의 당호로, ‘보소’는 ‘중국 송나라 최고의 문인으로 널리 알려진 소식의 문예를 보배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낙선재 승화루 ‘향천연지’ 글씨 탁본,

창덕궁 낙선재 승화루에 있는 돌 연못의 글씨 부분을 탁본한 것이다. ‘향천연지’는 향그런 샘물과 같은 벼루모양의 연못을 뜻한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가족들이 생활공간
궁궐내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은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대비, 후궁 등 왕실 가족 구성원에 따라 그 공간이 구분되었다. 왕과 왕비의 침전은 대체로 정치 공간의 뒤에 위치했으며,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는 동궁이라 하여 편전의 동쪽에 위치했다. 대비는 조선초에는 상왕과 함께 별도의 궁을 마련하여 지내다 성종대 이후 창경궁이 지어지면서 그곳에 기거하였다. 이는 중국의 궁궐제도에서 대비의 거처를 동쪽에 마련한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효종대에 부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하여 창덕궁 내 왕과 왕비의 침전 뒤로 대비전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은 일상생활을 위한 사적인 공간이었으나 왕비가 왕세자와 내외명부로부터 하례를 받는 등 왕실 웃전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의식 등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효의 궁궐, 창경궁
창경궁은 1483년(성종14)에 수강궁 자리에 세 분의 대비(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를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상왕 태종을 위하여 지은 궁궐이 수강궁이며, 이 터에 자리 잡은 창경궁은 부모의 편안한 노후를 생각하는 임금의 지극한 효심에 기초하여 그 마음이 대대로 이어져 온 건축물이다. 창덕궁과 연결되어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고 있는데, 둘을 합쳐서 동궐이라 불렀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616년(광해군8)에 재건되었으며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가 1983년 본래의 명칭을 되찾았다. <출처:고궁박물관>

서궐도 경희궁(경희궁도, 1975년),

혜촌 김학수(1919~2009년) 화백이 눈 덮힌 경희궁(옛 경덕궁)의 옛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경희궁 숭정전에서 열린 잔치 배치도(1710년)

1710년(숙종36) 경희궁 숭정전에서 숙종임금의 환후가 회복되고, 50세 됨을 기념하여 열린 궁중잔치의 좌석 배치 그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의 서궐, 경희궁
동궐에 대응하여 서궐이라 불린 경희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의 집이 있던 곳이다. 1617년(광해군9)에 경덕궁이라 이름하여 영건하기 시작하였고, 1760년(영조36)에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다. 1829년(순조29)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어 후에 재건하였다.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로 넘어가 일본인 학교로 사용되면서 궁궐의 자취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1988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2002년 1차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덕수궁 ‘돈덕전’현판(20세기초),

덕수궁 ‘돈덕전’은 대한제국 초기에 건립된 건물로서 고종이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서양식 건물이다. 현재 철거되어 남아 있지 않다. <출처:고궁박물관>

덕수궁 돈덕전 2층에 서 있는 고종.순종.영친왕(1990년대 초 촬영),

프랑스 잡지 ‘일뤼스트라시옹 L’Illustration’ 1907년 9월7일자에 소개된 고종 사진이다. 덕수궁 돈덕전의 2층 중앙에 고종이 서 있고 바로 왼쪽에 황태자인 순종이 있으며 왼쪽칸에는 양옆의 환관 사이에 영친왕이 있다. 준명당에서 고종과 원로대신들(1908년)

‘경운궁’현판(1905년),

경운궁 즉조당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경운궁은 덕수궁의 원래 이름이며 고종이 직접 쓴 글씨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했던 곳이며,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정전으로도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덕수궁의 역사(1938년),

1938년 덕수궁 내에 신축한 이왕가미술관의 개관에 맞추어 발간한 책으로 일본인 오다쇼고(1871~1954년)가 저술하였다. 덕수궁 내에 건립된 건축물들의 내역과 사진을 수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경운궁 중건배치도(1907~1910년 추정)

덕수궁, 경운궁과 고종
본래 월산대군(1454~1488년)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자 선조의 행궁으로 사용되었다. 1611년(광해군3)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가 생겼으며, 1615년(광해군7) 재건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궁역을 확장하고 전각들을 신축하여 1897년 고종황제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법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고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궐로서 이름도 고종의 궁호에 따라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1.정관헌(건립시기: 1901년 이전, 설계자: 사바틴 A.I. Serdin Sabatin(러시아)),

고종이 연회를 즐기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태조의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다. 서양풍의 건축 양식에 전통의 목조 건축요소가 가미된 절충식 건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2. 구성헌(건립시기:1897년, 설계자: 사바틴 A.I. Serdin Sabatin(러시아)), 접견실 또는 황태자가 거주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으며, 1907년 이후에 철거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3. 석조전(건립시기:1910년, 설계자: 하당 J.R. Harding(영국)),

고종의 처소와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외관은 19세기초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하였다. 당시에 건축된 서양식 건축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4. 돈덕전(건립시기:1901년 이전, 설계자: 사바틴 A.I. Serdin Sabatin(러시아)), 외교 사절을 접견하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1907년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으며, 1921년 이후에 철거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5. 중명전(건립시기:1899년 이전, 1901년 화재로 신축, 설계자: 사바틴 A.I. Serdin Sabatin(러시아)),

건립 당시 황실 도서관으로 사용되었으나, 1904년 경운궁의 화재로 고종이 돈덕전에서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편전 겸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명칭도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변경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궐안 서양식 건축물
궁궐내에 서양식 건축물이 건립된 것은 1891년(고종28) 경복궁 건청궁 내의 관문각이 처음이었다. 이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궁으로서의 위엄과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경운궁과 그 주위에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 등의 서양식 건물들을 다수 건립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유리전등 갓 (20세기초),

궁궐 전각의 천정에 설치했던 전등기구의 유리 갓이다. 연꽃봉우리 모양에 오얏꽃 문양의 장식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희정당 접견실, 창덕궁 대조전 침실,

창덕궁 대조전 이발소, 창덕궁 대조전 세면실과 욕실

커튼장식 스케치(1907~1917년, 복제),

일제강점기 창덕궁을 수리하면서 전각 내부에 설치할 커튼의 모습을 가상해서 그린 스케치이다. 3중으로 설치된 커튼 중에 푸른색을 칠한 가운데 커튼에는 오얏꽃 문장을 중앙에 배치하고 좌우에 용문양을 배치하였다. 창덕궁 대조전의 커튼과 커튼박스 설계도(1907~1917년, 복제), 20세기초 창덕궁 대조전을 수리하면서 내부에 설치할 커튼과 커튼 박스를 그린 상세도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마루와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 서양식 인테리어로 내부를 개조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사진첩(20세기초),

인정전을 비롯한 창덕궁 전각의 외부 전경과 행각의 내부 등을 촬영한 사진들이다. 서양식 인테리어 장식과 실내외 설치된 전등기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흑백으로 촬영된 원판사진에 채색을 입혀 보정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궁궐의 근대시설
19세기 후반 조선의 근대화 물결과 함께 궁궐에도 각종 근대 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1887년(고종24)에는 경복궁 건청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설치되었고, 1894년(고종31)에는 창덕궁에 전기가 들어왔다.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덕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커튼을 설치하는 등 서양 실내 장식 위주로 개조되었고, 1908년에는 대한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Co.)에서 창덕궁 수도 철관을 설치하였다. 대조전 일대에 근대 수도 시설을 갖춘 세면실과 욕실 등이 남아 있어 조선 궁궐의 근대화된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의 궁궐
궁궐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수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한다. 조선은 고려의 구세력 기반 제거와 나라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풍수지리 사상을 기반으로 새로운 수도와 궁궐터를 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북쪽 백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남산, 남쪽), 타락산(낙산, 동쪽), 인왕산(서쪽)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백악산을 뒤로하여 법궁인 경복궁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다. 조선은 경복궁 이외에도 창덕궁(1405년 건립), 창경궁(1483년 건립), 경덕궁(현 경희궁, 1620년 건립), 경운궁(현 덕수궁,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어) 등을 지어 상황에 따라 궁궐을 옮겨가며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