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궁중 복식과 장신구

조선시대 궁중복식은 TV드라마 사극을 통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눈에 익숙한 복식이다. 예전에는 고증이 철저하지 않아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조선시대 궁중복식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궁공복식은 TV를 통해 눈에 익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실 궁중문화와 관련된 유물들을 가장 많이 소장.전시하고 있는 고궁박물관에서도 궁중복식의 경우는 대부분 복제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특히 자료를 통해 궁중복식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만, 실물은 많지 않으며 마지막 왕과 왕비로 1980년대까지 창덕궁에서 거주했던 영친왕비가 소장했던 복식들을 통해 실물을 확인하고 박물관에 이를 재현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궁중복식은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사회전반적인 분위기로 소박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왕실로서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색감이나 디자인, 장신구 등의 측면에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궁중에서는 실제로 사용했던 의복류나 장신구 등에 대해서 한글로 목록을 정리하여 소중히 간직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적의차림 대수머리에 사용하는 비녀(20세기초), 1922년 영친왕 내외가 순종임금을 배알 할 때 영친왕비의 대수머리를 장식한 비녀들이다. 대수머리는 대례복인 적의를 입을 때 갖추는 가체의 일종이다. 머리를 어깨까지 내리고 양 끝에는 봉황장식비녀, 윗부분에는 떨비녀와 봉황장식비녀를 꽂았다. 머리에는 옥으로 장식된 금댕기를 둘러 화려한 왕실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적의차림 대수머리에 사용했던 다양한 종류의 비녀들

OLYMPUS DIGITAL CAMERA옷감목록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 가례시, 비녀 목록, 보잠발기(1866년). 비녀 목록을 적은 것이다. 별지로 써서 붙인 종이에 ‘병인가례시’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종과 명성황후 가례시의 비녀 목록임을 알 수 있다. 큰머리 칠보용과 조짐머리 칠보용으로 나누어 총31점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규삼과 창의(20세기초, 복제), 사규삼과 그 안에 입는 창의이다. 사규삼은 남자아이가 관례시 입었으며, 복건과 함께 평상복으로 입기도 하였다. 영친왕비의 『의대목록』에 “초록대화단부금사계삼, 다홍대화단창의내작, 일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벌로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자적용포(20세기초, 복제), 조선후기 왕세자의 평상복이다. 자주색 비단 겉감에 붉은색 안감을 대어 만들고 가슴과 등, 양 어깨에는 동일한 자주색 천에 발톱이 넷인 용을 금박한 사조룡보를 달았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사혜(대한제국, 1907년), 태사혜는 양반이나 양반가의 아이들이 신던 마른신이다. 꽃무늬로 장식한 녹색비단으로 만들고 앞코와 뒤축에 자주색 비단으로 태사문을 장식하였다. 바닥은 가죽, 코르크, 가죽으로 3중 처리를 하였다. 영친왕비 당혜(20세기초), 표면은 홍색 모란문 은직단으로 만들고 신코와 뒷축에 각각 연두색과 청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같은 색의 가는 선으로 테를 둘렀다. 바닥은 솜일 어어 붙여 폭신하게 하였다. 린이용 솜누비버선, 흰 무명에 솜을 두어 촘촘히 누벼 제작된 어린아이의 누비 버선으로 ‘타래버선’, ‘오목버선’이라고도 한다. 주로 돌옷과 함께 신는 것으로 장식이 많다. 발등 위 발볼에는 수를 놓고 버선코에는 색실로 된 삭모를 달았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당의와 남색대란치마(20세기초, 복제), 조선시대 여성들이 예복으로 착용하였던 당의와 남색의 대란치마이다. 당의는 조선시대 여성복의 소례복으로 평복 위에 입었으며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입었다. 왕비나 빈의 당의에는 꽃무늬와 박쮜 또는 壽.福 등의 글자를 민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금직이나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스란은 예장용 치마에 장식한 금직 또는 금박의 단을 뜻하는 것으로 한 단 더한 것은 스란치마, 두 단 더한 것은 대란치마라고 하였다. 스란치마 밑에는 대슘치마와 무지기라는 속치마를 겹쳐 입어 치마를 풍성하게 부풀려 입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대대(20세기초), 원삼 위에 착용하는 대대로 허리부분에서 뒤로 매서 아래로 드리운다. 다홍색의 비단에 구름과 봉황문을 금박으로 장식하였다. 대홍원삼 옷감, 대홍원삼의 겉감에 사용된 운봉문 비단을 전통방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바탕은 붉은 정수자직에 능직으로 봉황문양을 써 넣었으며, 그 위에 금실을 사용하여 구름과 봉황문을 화려하가 직금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대홍원삼(20세기초, 복제), 원삼은 왕실에서 황후, 왕비, 왕세자비 등이 착용한 예복이다. 지위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황후는 황원삼, 왕비는 홍원삼, 왕세자비는 자적원삼, 공주와 옹주는 녹원삼을 착용하였다. 대홍원삼은 구름과 봉황무늬를 화려하게 금실로 직조한 홍대단으로 만들어 앞뒤에는 두마리 봉황무늬 흉배를 장식하였다. 대례복을 착용할때에는 다섯발가락 용무늬를 금실로 수 놓은 보를 양어꺠와 앞뒤에 덧붙이고 소례복에는 두마리 봉황무늬 흉배를 앞뒤에 더하여 장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의대목록(1932년), 왕실에서 영친왕비일가에게 내린 의대목록으로 의복 및 그와 관련된 장신구 목록을 한글로 적어 놓은 것이다. 말미에는 “소화칠년십이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32년 12월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경대(20세기초), 붉은 색과 검은색 옻칠을 하고 백동으로 장식한 경대이다. 서랍과 화장도구를 넣었으며, 손잡이 좌우는 도안화한 ‘壽’자와 ‘福’자로 장식하였다. 경대의 서랍 속에는 머릿기름합과 분합이 들어 있었다. 영친왕비 머릿기름합과 분합(20세기초),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빗(20세기초), 빗치개(20세기초), 빗치개는 빗살 틈에 낀 때를 제거하거나 머리의 가르마를 타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쇠붙이나 뿔, 뼈 등으로 만들며, 한쪽 끝은 둥글고 얇아서 빗을 치게 되고 다른 쪽 끝은 가늘고 뾰족하여 머리에 가르마를 타는데 쓴다. <출처:고궁박물관>

궁중여성의 머리 모양새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복식의 규정이 엄격하였듯이 비빈, 왕녀 등의 왕족 여인과 일반 궁녀들이 머리형에도 엄격한 차이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왕비나 내인 모두 가리마 가운데 쪽을 진 첩지머리를 하였고, 신분에 따라 장식을 달리 하였다. 왕비를 비롯하여 왕자비, 왕손비는 금.은 장식의 용, 봉황첩지를 착용하였다. 특별한 의식이 있을 경우에는 첩지 대신에 화관이나 족두리로 화려하게 장식을 하기도 했다. 예식용으로 왕비는 대례복 차림에 크고 화려한 대수머리를 하였고, 궁중의 비빈과 외명부들은 어염족두리를 쓴 다음 가체를 땋아 얹고 비녀와 떨잠으로 장식하는 어여머리를 하였다. 어여 머리 위에 나무로 만든 가체를 얹는 떠구지머리는 내와명부는 물론 궁중 잔치 때 내인들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궁중여성의 머리 모양새

OLYMPUS DIGITAL CAMERA다리(20세기초), 다리는 모발의 길이가 짧거나 숱이 부족한 경우 쪽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가발로 가체를 길게 땋고 끝에 자주색 명주로 된 댕기를 달았다. 가체의 시작점은 접착제를 사용하여 뭉친 후 홍색단과 진한 감색 명주로 감아 고정시켰다. 댕기(20세기초), 머리 뒤쪽으로 늘어뜨리는 8가닥 댕기로 ‘마리사기’, ‘수사기’라고도 한다. 『상방정례』에 의하면 왕비나 빈궁의 수사기는 의대용으로 만들어진 댕기로 이 유물은 영친왕비의 대수에 장식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족두리(20세기초), 진한 감색단에 백옥으로 연화, ‘壽’, ‘福’, ‘囍’자를 투조하여 장식한 족두리이다. 족두리는 조선시대에 예복에 갖추어 쓰던 관의 하나로 영.정졷대 가체 금지령이 내린 이후 성행하였다. 왕실에서는 원삼과 당의에 사용하였다. 어염족두리(20세기초), 어여머리의 밑받침으로 사용하던 족두리이다. 예장 시 머리 앞부분에 얹고 잘록한 부분에 어여머리를 얹어 착용한다. 석웅황댕기(20세기초), 석웅황으로 장식한 댕기이다. 석웅황은 광택이 나는 돌의 일종으로 염색이나 채색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녀자나 어린이들이 애용하였으며, 석웅황의 중심에 끈을 꿰어 새앙머리에 매거나, 설날 새댁이 쪽에 장식하기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목제 큰머리(20세기초), 내외명부 및 내인들이 궁중 잔치 때 하던 머리장식으로 가체 대용으로 나무로 만들어 어여머리 위에 장식한 것이다. 어여머리 위에 목제큰머리를 얹고 떠구지라는 큰 비녀를 꽂았다. 목제큰머리 착용 모습(20세기초), 영친왕 이은을 모셨던 신대형 상궁이 궁중행사 때 목제큰머리를 착용한 모습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노리개
노리개는 치마허리나 저고리 고름에 차는 장신구이다.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던 장신구로 신분 지위에 따라 사용하던 재료가 달랐는데,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한 노리개는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 가보로 전하기도 하였다. 궁중에서는 계절에 따라 노리개의 종류를 달리하였는데, 봄.여름.가을에는 구슬과 옥노리개를 차고 겨울에는 마노와 향노리개를 찼다. 국혼과 같은 큰 행사 때 상궁들도 대례복에 노리개를 찼으며 궁녀는 관례를 치루는 날 노리개를 찼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대삼작노리개(20세기초, 복제), 산호, 쌍나비, 불수를 주제로 해서 만든 노리개 세 개를 하나로 꿰어 착용하는 노리개로 궁중 대례복에 착용했던 것이다. 동자삼작노리개(20세기초), 주머니삼작노리개(2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유소,

OLYMPUS DIGITAL CAMERA줄향노리개, 호박구슬 노리개, 종경노리개, 은도금방울노리개, 연당향노리개, 향노리개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장돈노리개, 매듭노리개

OLYMPUS DIGITAL CAMERA매듭노리개, 금속이나 옥으로 만든 장신구 대신 매듭을 지어 장식한 노리개이다. 조선시대에는 매듭의 수가 30여 가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중보자기
궁중에서는 혼수품을 비롯하여 각종 의례에 소용되는 예물과 일상 생활품들을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싸서 보관하였다. 궁중 보자기는 최상급 직물에 화려한 색상과 여러가지 문양으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홑겹의 모시 위에 채색 안료를 사용하여 봉황 한 쌍을 그리고 여러 가지 길상 문양을 그려 놓은 ‘봉황 그림 보자기’는 혼례 물품을 쌌던 것으로 정방형의 모양에 크기는 2폭에서 5폭까지 다양하다. 보자기는 한자로 褓, 複으로 표기하는데, 福자와 음이 같아서 보자기로 싸는 행위를 ‘복을 담는 것’이라고 여겼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패물비단보자기(2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장신구상자(20세기초), 얇은 목재판자에 종이를 발라 상자를 만들고 외부에는 화려한 문양이 직조된 비단을 발라 만든 장신구 상자이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장신구는 보자기로 싸거나 형태에 맞는 받침대를 제작하여 별도의 상자 안에 넣어 보관하였다. 영친왕비 주칠함, 주칠함으로 모서리에는 흑칠 테를 둘렀으며, 내면과 바닥면은 흑칠을 하였다. 전면에는 한지 위에 ‘어식물’이라고 적은 종이가 붙어 있어 솜과 장지, 비단 겹보자기로 싼 패물을 넣었던 장신구 상자임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패물비단보자기(20세기초), 패물비단보자기(2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비녀(2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장신구(2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장신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