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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옥류천일원

창덕궁 후원 깊은 곳에 위치한 옥류천 일원이다. 이곳은 옥류천 물길을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를 흐르게 만든 어정(御井)을 중심으로 작은 정자들인 소요정, 취한정, 태극정, 청의정, 농산정이 모여 있다. 이들 정자들은 농산정을 제외하고는 국왕이 비를 피하거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1~3칸규모의 작은 정자이다. 옥류천 일대 정자들은 대부분 인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며, 옥류천(玉流川)일 적힌 선조의 글씨가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옥류천 일대를 국왕이 찾은 것으로 보인다. 옥류천 뒷편 청의정 주변에는 국왕이 농사를 짓는 시범을 보였던 작은 논이 있다. 원래 국왕은 창경궁 춘당지에 있었던 논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는데, 이곳에소도 간략하게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청의정의 초가 지붕은 이곳에서 재배한 볏집으로 엮었다고 한다.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취규정(聚奎亭)>

옥류천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취규정(聚奎亭)이 세워져 있다. 앞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인조18년(1640)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취규정(聚奎亭)은 ‘학자들이 모인다’는 뜻으로 창덕궁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쉴 수 있게 마련된 공간으로 보인다. 

<취규정에서 보이는 옥류천 일대>

소요암을 흐르는 옥류천을 중심으로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 청의정(淸線亭) 같은 작은 정자들이 모요 있다. 원래는 창덕궁 후원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조용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교정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어 시끄러운 편이다.

<취한정(翠寒亭)>

옥류천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취한정이다. 국왕이 옥류천 어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숙종 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소요정을 지나 흘러 내려오는 옥류천>

인공적으로 축대를 쌓아서 만든 작은 수로이다.

<창경궁으로 흘러내려가는 옥류천>

<소요정(逍遙亭)>

소요정은 옥류천 바로 아래에 있는 앞면과 옆면이 1칸인 사모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인조대에 처음 세워졌으며 후대 국왕들이 이곳 경치를 묘사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소요정은 좁은 공간으로 국왕 혼자 정자에 올라 옥류천 물길을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취한정과 소요정
옥류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취한정이다. 옥류천 언저리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들고 되돌아올 때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소박한 정자이다. 건축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취한정에 대한 숙종과 정조의 시(詩)가 전하고 있다. 취한정의 아래쪽에는 옥류천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소요정(逍遙亭)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정에서는 옥류천과 소요암, 폭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심산 계곡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

농산정은 국왕이 옥류천 일대를 찾았을 때 다과상을 마련하거나 신하들과 강연을 할 수 있는 규모이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을 이곳 옥류천으로 초대하여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으며, 순조와 효명세자 또한 정조을 본받고자 이곳에서 학문이 높은 신하들이나 유생들을 초정하여 강연을 열었다고 하다. 또한 어정에는 홈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하여 그 위에 술잔을 돌리면서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동궐 후원 중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오류천 주변은 국왕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지만, 국왕이 신하들을 초청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던 사교의 장소로 사용된 공간이다.

 <옥류천(玉流川)>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제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에서 시작하여 개울이 되어 흘러 내려간다. 옥류천 어정(御井)은 커다란 바위였던 소요암을 파내어 인공적으로 옥류천 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소요정에서는 어정에서 작은 폭포를 이루면서 떨어지는 시냇물을 감상할 수 있다.

<옥류천 어정>

바위에 홈을 파서 옥류천 물이 흐로고 있다. 국왕이 신하들과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임금의 필적을 모은책.

선조에서 숙종까지의 어필을 모아 판각하여 목판으로 찍은 책이다. 목판본 열성어필은 숙종 년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경조과 영조초에도 간행되었다. 그중 선조임금 난초그림과 창덕궁 후원에 있는 ‘옥류천’을 적은 글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옥류천 어정>

샘물이 솟아 오르는 바위에는 인조가 써 놓은 글씨가 남아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

옥류천 어정(御井)
창덕궁의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한다 인조 14년(1636),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에 U자형의 홈을 파서 물을 돌게 하여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창덕궁의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한다 인조 14년(1636),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에 U자형의 홈을 파서 물을 돌게 하여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청의정(淸線亭)>

 청의정은 옥류천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정자로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청의정 주위로는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로 벼가 심어져 있다. 청의정 지붕은 이곳에서 재배했던 볏짚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태극정(太極亭)>

 청의정 앞쪽에 위치한 작은 정자인 태극정이다. 인조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앞면 1칸에 사모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다른 정자들과는 달리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농산정(籠山亭)>

<옆에서 본 모습>

옥류천 일대 정자 중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농산정이다. 앞면 5칸으로 대청마루2칸, 온돌방2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국왕이 옥류천을 찾았을 때 식사등을 하던 공식적인 공간이다. 농산정은 정조가 규장각 각신들을 옥류천 일대로 초대해서 꽃놀이를 즐겼던 장소이며, 순조와 효명세자 또한 이곳에 성균관 유생이나 학자들을 초대하여 경론을 강론하게 했다고 한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즉흥시 모음(1792년)>

1792년 3월 21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농산정에서 꽃구경하고 수택재(현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긴 후 쓴 시를 모은 두루마리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규장각 각신들과 모임에 정조가 직접 짓고 쓴 정조어제어필>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1792년 정조와 신하들이 짓고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것이다.

청의정(清漪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농산정(籠山亭)
옥류천 공간의 제일 안쪽에는 청의정(清漪亭)이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초가 지붕을 한 특이한 정자이다.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임금이 정자 앞쪽의 논에서 손수 수확한 볏집으로 이엉을 잇게 하였다. 태극정의 아래쪽에는 농산정(籠山亭)이 있는데, 납도리로 엮은 홑처마의 맞배 지붕 집이다. 1636년 인조 14년에 창건되어 임금이 옥류천 주변으로 거동하였을 때 다과상 등을 마련하던 집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이유로 집 모양도 일반 행랑채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1636년 인조 14년에 세운 정자로 처음에는 운영정(雲影亭)이라고 했다. 건물은 굴도리를 엮은 1칸짜리 네모 정자로 지붕 중앙에 절병통을 놓았고 바닥 기둥 밖으로 아(亞)자살로 궁창부를 꾸민 평난간을 둘렀다. <출처: 문화재청>

<옥류천을 나와서 다시 연경당으로 걸어가는 길>

청의정(清漪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옥류천 공간의 제일 안쪽에는 청의정(清漪亭)이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초가 지붕을 한 특이한 정자이다.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임금이 정자 앞쪽의 논에서 손수 수확한 볏집으로 이엉을 잇게 하였다. 태극정의 아래쪽에는 농산정(籠山亭)이 있는데, 납도리로 엮은 홑처마의 맞배 지붕 집이다. 1636년 인조 14년에 창건되어 임금이 옥류천 주변으로 거동하였을 때 다과상 등을 마련하던 집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이유로 집 모양도 일반 행랑채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1636년 인조 14년에 세운 정자로 처음에는 운영정(雲影亭)이라고 했다. 건물은 굴도리를 엮은 1칸짜리 네모 정자로 지붕 중앙에 절병통을 놓았고 바닥 기둥 밖으로 아(亞)자살로 궁창부를 꾸민 평난간을 둘렀다. <출처: 문화재청>

옥류천(玉流川) 일원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이라 한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 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연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 간략한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매우 은밀한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線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내 유일한 초가집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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