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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입구에 위차함 무형전시관이다. 이곳은 웅진기 백제 고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송산리고분군 주요 무덤인 무령왕령과 5호분, 6호분을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으며, 주요 출토 유물의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공산성 서쪽에 송산(宋山) 중턱에 위치한 무덤들은 웅진기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다. 1~7호분은 일제강점기에, 무령왕릉은 1970년대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고분 내부는 유적의 보존을 위해 폐쇄되어 있어 출입구와 외관만 확인할 수 있다. 대신에 이곳 모형전시관에서 백제 고분 내부의 모습과 특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공주 송산리고군(사적)>

무령왕을 비롯하여 웅진기 백제 왕과 왕족들의 무덤인 것을 추정하고 있다.

웅진시대의 시작과 송산리 고분군
백제의 22대 문주왕은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성(서울)이 함락되자, 웅진(공주)으로의 천도를 단행한다. 이후 26대 왕인 성왕이, 538년 다시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은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들은, 바로 웅진 도읍 기에 재위했던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현재 사적1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해발 130m 나지막한 송산(宋山)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송산리 고분군이라고 한다. 현재 이 고분군에는 7기의 고분이 있는데,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위 북동쪽으로 1~4호분이 있고, 아래쪽으로 무령왕을 포함해 5호분과 6호분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도 웅진시기 백제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했었는데,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웅진백제 왕릉원임이 보다 확실해졌다. <출처: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 발굴과정
송산리고분군이 무덤7기 중 1~4호분은 1927년에 발견되었다. 4기 모두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발굴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이 진행되었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고 1~4호분으로 명명되었다. 발굴 당시 금제와 은제, 그리고 금동제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6호분은 1932년에 앞서 발굴한 4기의 고분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기 위해, 관람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 무덤 역시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1~4호분과 마찬가지로 굴식돌방 무덤이고, 벽돌로 만든 관대가 두개 남아 있으며, 입구에서 널방에 이르는 널길이 우측에 붙어 있다. 5호분도 부실한 조사와 도굴 등으로 인해 약간의 금.은제 장신구와 그리고 토기, 철제 유물 등이 남아 있다. 6호분은 1932년 일본인 가루베지온인 발견, 발굴하였는데, 공식적인 조사는 193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뤄졌다. 특히 사신도로 유명한 6호분은,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으로, 규모가 무령왕릉에 필적할 정도지만, 이 또한 잘못 된 발굴과정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에 6호분의 현무릉으로 인식되어 주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문인지 다행스럽게 도굴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 왕릉은 1971년 여름 장마철에, 5호분과 6호분에 스며드는 물기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4,600여 점 이상에 이르는데, 그 하나하나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학술적 가치또한 매우 높다. 또한 무덤속에서 나온 묘지석으로 인해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백제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이고, 나아가 새로운 백제사 연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 고분군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굴식돌방무덤을 대표하는 5호분, 벽돌무덤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6호분과 무령왕릉 내부를 재현해 놓고 있다. 무령왕릉과 백제 고분에 대해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송산고분군 입구에 위치한 5호분>

<송산리 5호분 내부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

<널방 내부>

관을 놓았던 자리가 있다.

<단면으로 5호분을 재현해 놓은 공간>

송산리 5호분
송산리5호분은 굴실돌방무덤으로, 구릉 남쪽의 경사면을 파고 들어가 묘광을 만들고 안에 자연활석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이 무덤은 널길과 널방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널방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거의 비슷한 정사각형의 형태이다. (남북 3.5m, 동서 3.3m) 무덤을 만든 방법은, 깬 돌을 이용하여 1.3m 가까이 수직으로 쌓은 다음, 그 위쪽부터는 점차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아 천장이 돔형태가 되도록 하고, 천장에는 큰 판석을 1매 올려놓았다. 이런 천장의 형태를 궁륭상 천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벽과 천장에는 백회를 발랐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다.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은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 한편 널방에는 목관을 올려놓았던 관대 2개가 동서로 나란히 남아 있었다. 1~4호분이 강돌을 깐 것과 다르게 벽돌을 이용했는데, 길이가 큰 서쪽(2.4m)이 남자, 동쪽(1.8m)이 여자용으로 추정된다. 5호분도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도굴되어 금.은제 장신구 및 철제 유물이 약간 발견되었을 뿐이다. 5호분도 웅진시대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고분군 입구에서 2번째에 위치한 6호분>

일제강점기에 6번째로 발굴.조사된 무덤이다. 무령왕릉과 함께 중국 남조에서 성행한 벽돌식무덤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벽돌위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출토된 유물이 거의 없어 무덤 주인을 확인할 수 없다.

<6호분 모형 입구>

<6호분 내부>

관을 놓았단 자리가 1개만 마련되어 있다.

<아치형으로 잘 만들어 놓은 널길>

<작은 감실>

벽에는 불을 밝히는 등잔이 놓여 있던 작은 감실이 있다.

<사신도 중 서쪽 백호>

<남쪽 주작>

<동쪽 청룡>

<북쪽 현무>

강서대묘의 뱀과 거북이 싸우는 형상을 하고 있는 현무도와 비슷하다.

사신도
사신도는 사방(四方)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을 그린 그림이다.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봉황의 형상을 한 주작, 북쪽에는 뱀과 거북을 하나로 한 현무를 그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고분벽화의 소재로 등장하는데, 이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사방을 수호하고 사악한 것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에서 그렸다. 사신도는 중국 한나를 통해 전래되었으며, 고구려의 강서대묘, 통구사신총, 진파리 1호분 등의 사신도가 유명하다. 백제에서는 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 동하총에서 발견되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 6호분
6호분의 가장 큰 특징은, 벽돌무덤으로 고구려와 같은 사신도 있다는 점이다. 무덤 내부는 길이가 3.7m, 폭이 2.2m이고 천장은 터널형이다. 구릉 상부 쪽에 묘광을 파고 벽돌로 전체를 축조하였으며, 벽면은 중국 돈 오수전 무늬의 벽돌이고 가로와 세로 쌓기를 반복해서 쌓아 올렸다. 또한 동벽과 서벽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등감(燈龕)이 각각 3개씩이고, 북벽에 1개가 있다. 동감 바로 위에는 가창(假窓)이 있어 마치 집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무덤은 네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어 송산리 벽화 고분이라고도 한다. 벽면에 사신도를 그리는 방법은 벽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먼저 서벽에는 백호, 남벽에는 주작, 북벽에는 현무를, 그리고 남벽의 주작 좌우에는 해와달, 구름을 묘사했다. 이 6호분의 사신도는 웅진시대 유일한 벽화이자 부여 능산리 동하총 벽화와 함께 백제의 대표적 고분 벽화이다. 6호분도 도굴과 잘못된 발굴로 인해 아쉽게도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널방에는 관대가 1기만 남아 있어 한사람만 안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령왕과 관계가 깊은 인물로 보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학자에 따라서는 동성왕으로 보기도 하고, 무령왕의 전 왕비로 보기도 한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1970년대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

송산리고분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그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다. 도굴을 당하지 않고 유물들이 온전히 남아 있다.

<무령왕릉 내부 모형>

<널길에서 본 무령왕릉 내부>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
무령왕릉을 축조하는데 사용된 벽돌의 종류는 모두 28가지이다. 주로 사용된 벽돌은 연꽃무늬가 있는 벽돌이지만 글자가 있는 벽돌과 무늬가 없는 벽돌도 사용되었다. 연꽃무늬 벽돌은 벽돌을 쌓는 위치에 따라 문양이 3종류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부여 정동리 가마터에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으로 추정한다. 무덤의 벽을 쌓아 올리는 방법은 4평1수(四平日羞)식으로 먼저 벽돌을 눕혀서 4단의 벽을 쌓은 뒤(가로쌓기), 그 위에 1단을 세워 쌓는(세로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라갔다. 글자가 있는 벽돌은 6종류가 보이는데 ‘대방(大方)’, ‘중방(中方)’, ‘급사(急使)’ 등의 문자가 압출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는 사용위치를 지정한 일종의 설계부호로 이해되고 있다. ‘대방’이란 글자가 새겨진 벽돌은 바닥면에 깔 벽돌이란 의미이다. 벽을 올리는데 이용할 벽돌은 ‘중방’, 천장에 들어갈 벽돌은 ‘급사’라고 표현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무령왕릉 내부>

<무령왕릉 입구 널길>

무령왕과 무령왕릉 발견의 의의
백제 25대왕인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여 목을 백강에 버리고 혼란한 정국을 수습했다. 또한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지배를 강화하는 등 왕권 강화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정치를 안정궤도에 올려 놓았다. 무령왕은 대외교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고구려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진문물을 과감하게 수입함과 동시에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서 국가의 대외적 발전을 꾀했다. 이렇듯 백제는 무령왕의 뛰어난 통치력을 바탕으로 고대 동아시아에서 그 위상을 높이는데 성공한다. 사실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1년 무령왕릉의 발견을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무령왕릉은 왕릉 자체가 갖은 가치뿐만 아니라 그 안에 부장되어 있던 4,600여 점의 다양한 유물들 하나하나가 백제의 정신이자 세련된 백제 문화의 진수 그 자체였다. 이 가운데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금속공예품은 높은 품격과 고도의 제작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당시 백제 장인들의 예술적 감각과 금속을 다루는 기술수준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출토유물인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이라는 것과 연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고대사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술하는데 유용한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동시에 당시 동아시 및 삼국관계에서 차지하는 백제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무령왕릉 유물 발굴 당시 모습(재현)>

살아있는 무령왕릉
무령왕릉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놀라며 주목한 것은 무덤 앞에 놓여 있던 지석이었다. 이 2매의 지석은 삼국시대의 여러 왕릉급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발견된 것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왕의 지석에는 묘지와 방위도가, 왕비의 지석에는 묘지와 매지문이 새겨져 있다. 지석의 내용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뜬 날짜와 장례절차에 관한 것이며, 왕비으 지석에 쓰여진 매지권은 땅으 신들에게 묘를 조성할 토지를 사들인다는 내용이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벽돌로 쌓은 무령왕릉 입구 널길>

<진묘수와 묘지석>

무령왕릉 입구에는 무덤을 지키는 석수와 무덤의 주인을 밝혀주는 글을 적혀 있는 묘지석이 놓여 있다. 묘지석에는 토지신에게 토지를 매입했다는 기록과 중국 동전인 오수전이 그 위에 놓여 있다.

<무령왕릉 묘지석(복제품)>

<제기로 보이는 그릇들>

그 앞에는 제기로 보이는 중국에서 수입된 청자 항아리 등이 놓여 있다.

<널방 내부>

바닥에 무령왕릉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 각종 장신구와 고리자루칼 등이 놓여있었다. 시신을 모셨던 관의 일부도 남아 있었다.

<무령왕 금제관식(복제품)>

<무령왕 금귀걸이와 뒤꽂이(복제품)>

<무령왕 허리띠와 청동거울(복제품)>

무령왕
501년 동성왕의 뒤를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그의 나이 40세, 늦은 나이였지만 즉위 직후 반란 세력을 진압하며 혼란했던 정국을 수습하고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든든히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속해 한강 일부를 수복하였다. 강대국이었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받았고, 이웃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백제는 무령왕의 강력한 통치를 바탕으로 왕권국가를 재건하는데 성공하며 스스로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선언하였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무령왕 흉상>

기록들을 바탕으로 상상으로 만든 흉상이다.

<무령왕릉 모형전시관 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공간.>

무령왕릉
왕릉의 구조를 크게 나누면,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과 부부를 모신 널방으로 나뉜다. 널길은 남북길이가 2.9m, 동서너비는 1.04m, 바닥에서 천장짜기 높이는 1.45m이다. 천장의 모습은 반원형의 터널형태, 즉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널방은 길이가 4.2m, 너비가 2.7m이며, 왕 부부가 모셔진 관대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3m이다. 특히 무덤방의 북쪽 벽과 동서 양쪽 벽에는 모두 5개의 보주형 등감이 설치되었다. 등감에는 등잔이 놓여 있고, 그 등잔에는 심지자국이 남아 있어 무덤 내의 조명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내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널길과 널방을 구분하는 공간이 배려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마치 가옥의 현관에 들어선 듯한 인상을 주는 곳으로 너비는 1.10m 정도이며, 0.15m 깊이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무령왕릉은 백제시대의 건축 수준, 나아가 예술적 감각이나 사상적 배경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백제 고분의 종류
백제의 고분은 수백년의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같은 지역 혹은 한 집단 내에서도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고분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백제의 고분을 크게 나누어보면 널무덤(토광묘)과 독무덤(옹관묘),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분), 벽돌무덤(전축분)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널무덤은 지하에 묘광을 파고 직접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백제 전역에서 초기부터 중기까지의 시기에 발견된다. 묘실은 목관 혹은 목곽을 넣기도 했으며, 대체로 단장(單葬)이 기본이나 합장 혹은 다장(多葬)의 널무덤이 발견되기도 한다. 독무덤은 항아리를 관으로 사용한 무덤으로, 백제 전시기에 걸쳐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항아리를 하나 혹은 두 개를 사용했으며, 출토유물은 많지 않다. 전남지역에는 대형독무덤이 나타나기도 한다. 돌무지무덤은 지상에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실을 안치했다. 주로 강가 주변의 평지에서 확인되며(한강유역0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되었다. 이 무덤은 겉모양에 따라 무기단식(無基壇式)과 기단식(基壇式)으로 구분된다. 돌덧널무덤은 지하에 모광을 파고 판돌, 괴석, 활석 등을 사용하여 돌널ㅇ르 만들어 시신을 묻는 무덤 형식이다. 주로 구릉에서 발견되며 4세기부터 조영되기 시작했다. 백제 무덤 가운데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다. 굴식돌방무덤은 땅을 옆으로 파 들어간 후 돌을 이용하여 널방 및 널길, 입구를 만들었다. 4세기 중후반부터 만들어지 시작한 가장 보편적인 백제 무덤 양식으로, 널방의 천장 형태, 널길의 규모와 위치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벽돌무덤은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웅진시기에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왕실에서 벽돌무덤을 만들었다. 널길과 널방의 천장이 터널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널방에는 벽돌로 만든 관대가 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백제고분의 전개와 조사현황
백제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1920년대를 전후하여 이루어졌으며, 백제의 도읍지에 위치한 공주 송산리고분군과 부여 능산리고분군 등에 집중되었다. 이후 백제고분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루어진다. 충청권에서 조사된 백제고분은 웅진천도 전.후로 조성된 고분으로 먼저 웅진 천도 이전 고분 중 주구무덤(주구토광묘)와 널무덤(토광묘)은 1990년대 초반부터 공주.대전.천안 일대에서 발굴되었으며,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은 논산과 금산에서 조사하였다. 그리고 서산.서천 지역에서는 부구묘와 주구묘가 확인되었다. 이들 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초기 지방사회 묘제의 다양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고분들은 1980~90년대에는 공주 시내에 위치한 송산리, 웅진동, 금학동 등에서 발굴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공주 외곽과 청양, 보령, 서산, 서천 등지에서 조사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 천안, 청원, 연기, 공주 등에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웅진 천도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수촌리고분군 유적은 2003년에 발굴되었는데, 금동관모, 환두대도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어 당시의 백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백제의 묘제는 웅진 천도 이후에는 주로 굴식돌방무덤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굴식 돌방무덤은 충남 전역의 여러 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이는 웅진 천도 이후 굴식돌방무덤으로 무덤형태가 통일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는 백제의 지방사회 재편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