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공주 고마나루(명승), 웅진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금강 나루터

공주 무령왕령이 서쪽편 금강변에 위치한 고마나루(명승)이다.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고 표시되며, 공주의 옛 이름이다. 웅진기 백제때에는 왕성의 관문으로 중국, 일본, 고구려 등과의 문물을 고역하던 국제 항구로 이용되었으며, 백제가 멸망할 때 당나라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며 웅진도독부가 설치되기도 했다.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해 이곳을 건너 피난을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에는 공산성 나루터가 호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주교통로가 되었으며 이곳은 일반인들이 예산, 아산 방면으로 건너다니는 나루터로서민들의 생활터전이 되었다고 한다.

<고마나루터>

공주의 옛이름 웅진(熊津)의 유래되는 고마나루터이다. 지금은 마을도 없는 한적한 공원이지만 삼국시대 웅진기 백제의 관문이었던 곳이다. 고마나루는 금강변 나루 일대와 무릉왕릉 주변 구릉지대, 서쪽편 연미산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치가 실제로 아주 빼어난 곳은 아니고 웅진기 백제를 대표하는 장소이자 금강을 건너는 나루터로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어 명승으로 지정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금강물이 많지 않던 곳이었지만 공부보(公州洑)가 설치되어 호수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이곳에는 곰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며,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터와 곰사당이 남아 있다. 공주박물관에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돌곰이 전시되어 있다. 곰과 관련된 전설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그리스 신화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볼 때 불교와 함께 전해진 서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마나루터 아래 공주보>

고마나루터 주변에는 최근에 금강을 가로막은 공주보가 설치되면서 작은 호수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원래는 강폭이 좁았을 것으로 보이며 바다에서 금강수로를 이용하여 큰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여울목과 비슷한 지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마나루 북서쪽 연미산>

<금강변>

<고마나루 솔밭으로 연결되는 길>

예로부터 소나무숲이 조성되어 경치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마나루 솔밭>

<곰사당>

곰사당
금강에 빠져 죽은 암곰과 새끼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낸 사당이다. 앞마당에 있는 웅신단비에는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적혀 있다. 1972년에 백제 때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곰이 웅진동에서 출토되어 현재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향교이 대성전을 본떠 소박하게 건축하였으며 야트막한 담작과 아늑한 솔숲이 어우러져 신묘한 기운을 자아낸다. <출처:문화재청>

<사당 앞 웅진단비>

고마나루 전설
옛날 연미산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따. 짝을 맺으려고 수컷을 찾고 있던 암곰은 한 나그네를 발견하고, 그를 동굴로 데려와 남편으로 삼았다. 암곰은 먹이를 물어 나르며 나그네를 극진히 보살폈다. 나그네와 함께 산 지 1년이 지날 무렵 둘 사이에서 곰과 인간을 모두 닮은 새끼가 태어났다. 나그네가 도망가지 않을 거라 안심하고 문을 열어둔 채 곰이 밖으로 나간 사이 나그네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암곰은 새끼를 들어 보이며 돌아와 주기를 애원했지만 끝내 나그네는 돌아오지 안았다. 슬픔에 몸부림치던 암곰은 끝내 새끼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출처:문화재청>

<돌곰>

사당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돌곰이다. 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뒤에서 본 모습>

무령왕릉 맞은 편 남쪽 구릉의 경사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선명하지 않은데, 본래부터 강한 선으로 조각되지 않은 것 같다.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약간 위로 향하고 있으며,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를 구부려서 앉아 있는 모양이다. 입을 다물고 양쪽 눈은 뜨고 있으며, 양쪽 귀는 뒤로 붙어 있다. 곰나루와 가까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곰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많히 남아 있다. 이 돌곰이 출토된 곳이 바로 곰사당이 있던 자리로 생각된다. <출처:공주박물관>

<사당 뒷편 솔밭길>

<웅진단터로 가는길>

사당에서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조선시대까지 금강에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터를 볼 수 있다.

<웅진단터>

공주 웅진단터(熊津壇址)
이곳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주관으로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장소이다. 웅진단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웅진사(熊津祠), 웅진단(熊津壇), 웅진제소(熊津祭所)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2011년 발굴조사 결과, 고려.조선시대 기와건물지 1동과 담장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제사에 이용되었던 분청.백자제기와 기와,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웅진단터 아래 금강.>

공주 고마나루, 명승
이곳은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상의 금강 변과 나루터 일대, 연미산 지역을 아우르는 명승지이다. 고마나루는 곰나루라고도 부르며 한자어로는 웅진이라고 한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고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公州)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수도의 관문이자 물길과 물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1010년에는 고려의 현종, 1624년에는 조선의 인조가 이 나루를 통해 공주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 692~667년)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금강을 거슬러와 주둔했고, 백제 멸망 뒤엔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던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였다. 천신(天神), 지신(地神),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국가의 공식적인 제사터와 암곰의 원혼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냈던 웅신 숭배의 제사 공간이 남아 있다. 이곳은 금강변 백사장이 있는 강 언덕, 수백여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굽이치는 금강과 수려한 연미산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곰과 인간에 얽힌 애잔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