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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황산대첩비지(사적),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물리친 곳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지(사적)이다. 이곳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황산대첩이 있었던 지역이다. 황산대첩비는 선조 10년(1577)에 황산대첩 승리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송인의 글씨를 새긴 승전비이다. 당시에는 비각, 별장청 등 부속건물도 함께 지어 비를 지키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2차세계대전 막바지로 치달은 1945년 1월에 남원 경찰이 비를 폭파하고 비문에 새겨진 글자를 없애버렸다. 현재의 비석은 1963년에 다시 세웠으며, 비각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들을 단장하였다. 일제가 파괴한 비석 또한 옆쪽에 따로 전시하고 있어 당시 일제의 만행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위치한 황산대첩비지(사적)>.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격파한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승전비를 세웠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이 이곳을 크게 파괴하면서 비석이 훼손되었다.

황산대첩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1882)에 다시 고쳐 지었으며 이때 어휘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출처:문화재청>

<황산대첩비 비각>

이곳이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비석을 새로 만들어 원래 있던 거북받침돌 위에 다시 세웠다.

<황산대첩비>

<황산대첩비 거북받침돌>

조선중기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세울 때 사용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얼굴은 용의 형상을, 몸통은 거북형체를 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답게 조각수법은 뛰어난 편으로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파비각>

일제가 파괴한 비석의 몸돌이 한쪽편 파비각에 옮겨져 있다.

<조선중기에 세워진 옛 비석 몸돌>

비석을 두동강이 내고, 정으로 쪼아 새겨진 글자를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파비각(破碑閣)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때 세웠던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들을 모아 안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어휘각>

<글씨가 새겨진 부분>

이성계의 업적을 기리는 글씨를 새겨 놓았던 바위이다. 일제는 이곳도 정으로 쪼아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어휘각(御諱閣)
이 어휘각은 조선 태조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고려 우왕 6년, 1380)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지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렷하였던 그 성적(聖跡)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에 따라 본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사적비 비각>

황산대첩비를 세운 경위와 황산대첩 내용을 기록한 사적비가 위쪽에 세워져 있다.

<황산대첩 사적비>

황산대첩사적비,
이 비는 고종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이다. 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비각 등이 함께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황산대첩은 고려말 우왕 6년(1380)에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한 전투로 용비어천가에도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왜구는 대선단을 이끌고 금강 어귀로 침입하였다. 고려는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사용해 포구에 정박해 놓은 왜구의 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때 내륙으로 들어갔던 왜구들이 여러 지역을 노략질한 후 지리산 부근에 집결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토벌군은 이곳 황산 일대 협곡에서 큰 전투를 벌려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비롯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성계의 전공에 대해서는 과장되게 서술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적은 병력임에도 공세적으로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이성계는 전국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이 전투는 그의 조선 건국에 큰 기반이 되었다. 이후 한반도에서 왜구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고려는 공세적인 태도로 왜구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가 이 비석을 파괴한 사실에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입장에서도 중요했던 전투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첩비에서 내려다 본 황산대첩이 있었던 운봉읍 일대>

이 앞을 흐르는 하천인 람천를 따라 형성된 동쪽편 협곡에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 함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이며,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쌓은 산성들이 함양과 남원 일대에 많이 남아 있다.

<황산일대를 흐르는 람천>

운봉읍 일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실상사를 거쳐 산청으로 흐르는 남강의 주요 지류이다.

<황산 주변>

왼쪽편이 황산이며, 오른쪽이 지리산 봉우리들이다. 황산대첩은 이 계곡 주변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졌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