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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외조, 홍화문(보물)과 명정문(보물)

동쪽을 향하고 있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창덕궁 후원 연못들과 춘당지를 거쳐서 흐르는 금천이 있고,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인 옥천교가 제일 먼저 보인다. 창경궁에서는 홍화문과 정전 출입문인 명정문 사이를 외조(外朝)라고 할 수 있으며 외행각으로 둘러져 있다. 외조는 국왕의 즉위식이 치러지는 장소이며, 정전에서 국가적인 행사를 치룰때 하급관리들이 대기하는 장소이다. 창경궁은 법궁이 아니었기때문에 외행각에는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지 않고,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외조 남쪽으로는 세자 시강원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는 국왕직속기관에 해당되는 실무 관청건물이 들어선 궐내각사가, 북쪽에는 후궁들의 처소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창경궁 외조>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외조 마당이다. 금천과 옥천교, 답도, 명정문과 명정전과 조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궐도에 표현된 창경궁 정전인 명전전 일대>

정문인 홍화문, 명정문과 명정전이 동향으로 나란해 배열되어 있다. 외조를 둘러싸고 있는 외행각은 회랑처럼 꾸며놓은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방이 있는 행각으로 되어 있다. 정전 남쪽에는 많은 관청들이 들어선 궐내각사가 있고, 북쪽에는 후궁들의 처소들이 자리잡고 있다.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보물384호)은 다른 궁궐 정문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고 있다. 앞면 5칸 규모를 하고 있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과는 달리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국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소맷돌로 장식한 답도를 두고 있지 않다. 궁궐 정문으로서는 약간 작은 규모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양쪽에 한쌍의 십자각을 두었다고 한다.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나무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홍화문은 성종 15(1484)에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정문으로도 사용했던 건물로 여러 차례 수리를 하고 단청을 입혔기때문에 옛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17세기초 목조건축 양식이 잘 남아 있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보물)>

한때 동물원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조선후기에 세워진 건물로  수차례의 중건과정을 거치면서 옛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창경궁은 상왕이나 대비 등 왕실 어른들과 후궁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궁궐을 격식을 갖추고 있지만 남향을 하고 있는 법궁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어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화려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지어진 건물로 2층 문루에는 조총의 공격에 대비하여 총안이 있는 판벽으로 막아 놓고 있다.

<출입문>

홍화문은 앞면 3칸 규모로 궁궐 정문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며, 다른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계단, 소맷돌이 있는 답도, 궁궐을 지키는 석수 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홍화문 내부>

<천장>

홍화문 내부에는 화강석을 다듬은 판석을 깔아 놓고 있으며, 삼도를 별도로 구분해 놓고 있지 않다. 천장은 단청을 입힌 우물반자를 하고 있으며, 문짝 위에서는 홍살을 달아 놓고 있다.

<추녀마루 잡상>

<안에서 본 모습>

2층 문루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해 놓고 있다.

<창경궁 앞을 지나는 도로>

맞은편에는 서울대병원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대병원에는 조선시대 활터인 함춘원 있었다고 한다.

창경궁 옥천교(보물)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금천을 지나는 옥천교와 정전인 명전전 출입문인 명정문,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의 답도, 명정문 사이로 보이는 조정과 명정전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옥천교(보물)는 궁궐 앞을 흐르는 명당수인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로이다. 현재 남아 있는 돌다리 중 조형미와 안정감이 뛰어나다. 궁궐 금천교 중에서는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천은 국왕이 사는 궁궐과 바깥 세상을 구분하는 상징적의 의미를 갖는 작은 개천으로 중국 자금성에서는 금수(禁水)라고 부르며, 조선에서는 금천(禁川)이라고 이라고 부른다. 창경궁 금천은 동궐의 후원에 있는 반도지, 춘당지 등을 거쳐서 창경궁 외조를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 내려간다.

<옥천교(보물)>

옥천교는 국왕의 가마와 행렬이 지나가는 다리로 폭이 비교적 넓은 편이며, 화강석으로 만든 판석이 깔린 삼도가 지나간다.

<금천과 옥천교>

궁궐 입구 금천을 지나는 전형적 금천교로 2개의 아치를 놓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려 놓고 있으며, 양쪽은 돌난간을 세워두고 있다. 옥천교라는 조선중기인 성종 14년(1483)에 처음 세웠다. 옥천교라는 이름은 당대 문신이었던 서거정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다리 입구에에는 돌을 깎아서 만든 석수를 세워놓고 있으며, 2개의 아치가 만나는 부분에 호신적인 의미를 갖는 도깨비얼굴을 새겨 놓고 있다.

<옥천교 홍예(아치)>

2개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예사이에는 도깨비얼굴인 귀면으로 장식하고 있다. 앞쪽에는 원래 석수를 올려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돌을 놓여 있다.

<창경궁 앞을 흐르는 명당수인 금천>

동궐 후원에서 발원하여 반도지, 춘당지 등의 연못을 지나 창경궁 앞을 흐른다. 창경궁 금천은 비교적 수량이 풍부한 편으로 다른 궁궐 금천교에 비해서 운치가 있다. 금천은 궁궐과 바깥 세상을 분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개천으로 조선에서는 금천(禁川), 중국에서는 금수(禁水)라고 부른다.

<홍화문과 옥천교>

홍화문과 외행각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보물384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1616년에 다시 세워진 이 문 앞에서 국왕이 일반 백성들을 친히 만나기도 하고 앞에 있는 왕실 언덕인 함춘원에 활터를 세워 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규모는 3칸 대문이지만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궐(闕)’이라는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대문 안쪽에 명당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옥천교(보물)를 건너는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다. 이 마당을 둘러싼 외행각은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다. <출처:문화재청>

창경궁 명정문과 행각

창경궁은 창덕궁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지만 창경궁은 창덕궁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지만, 별도의 정전인 명전전과 조정을 두어 창덕궁과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창경궁 정전은 국가행사를 위해서 많이 사용된 공간은 아니지만 권력이 대비에 집중되던 수렴청정 기간 등에 주요 행사가 치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정전인 정문인 명정전 앞에는 행각으로 둘러져 있어 외조(外朝)를 형성하고 있지만,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달리 중문을 따로 두지 않고 정문인 홍화문과 옥천교를 지나면 명전전 앞 마당에 이르게 된다. 법궁이 아니었기때문에 실제 이곳에서 큰 행사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 또한 크지 않은 편이다. 외조 북쪽편으로는 주로 후궁들이나 왕실가족들이 거처했던 공간들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국왕을 보좌하는 실무관청들이 들어선 궐내각사가 있었다.

<창경궁 조정 출입문인 명정문>

명정문은 성종대 창경궁을 처음 세울때 지었으며, 현재의 것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은 광해군대에 중건한 것으로 보물 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명정문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었지만 조선전기 건축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처마와 공포>

<명정문 천장>

명정문 천장은 일부 우물반자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을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출입문 위에는 홍살을 설치해 놓고 있다.

<계단>

명정전은 정전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경복궁이나 창덕궁 정전과는 달리 소맷돌이 있는 답도나 석수로 장식한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있다.

<명정문 사이로 보이는 조정>

<창경궁 명정문과 좌.우의 행각(보물)>

명정문 앞 외조를 둘러싸고 있는 외행각. 창경궁은 법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외행각은 국왕을 보좌하는 관청에서 사용하지 않고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남쪽 행각>

동궐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면서 머물렀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중기에 들면서 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을 비롯한 왕실가족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확장되었으며,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처음 지은 궁궐이다. 태종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상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국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들이 존재했다. 이런 까닭에 창경궁은 주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위한 공간의 성격이 강한 궁궐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실제로 많이 사용하지 않다가,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하면서 좁은 창덕궁 영역을 보완하는 궁궐로 자리잡았다.

<건물터만 남아 있는 창경궁 남쪽편 궐내각사터>

동궐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면서 머물렀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중기에 들면서 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을 비롯한 왕실가족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확장되었으며,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처음 지은 궁궐이다. 태종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상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국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들이 존재했다. 이런 까닭에 창경궁은 주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위한 공간의 성격이 강한 궁궐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실제로 많이 사용하지 않다가,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하면서 좁은 창덕궁 영역을 보완하는 궁궐로 자리잡았다.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보물,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하였다. 명정문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서 조선 중기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