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에 있는 소요대사탑(보물)이다. 연곡사 경내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부도(西浮屠)라고도 불린다. 목조건축물을 모방해서 만든 전통적인 승탑 형식을 따르고 있다. 탑신 몸돌 한면에는 문짝을 새기고, 반대편에는 글자를, 나머지면에는 신중상(神衆像)을 새겨놓고 있다. 지붕돌 모퉁이에는 꽃장식을 얹었으며, 머리장식도 온전히 남아 있다. 석종형 승탑이 많이 만들어졌던 조선 중기에 조성된 승탑이지만 통일신라 승탑인 동 승탑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동 승탑이나 북 승탑에 비해 조각수법 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먼저 조성된 2기의 승탑을 모방해서 그런지 동시대 승탑에 비해서 조형미가 양호한 편이다.
소요대사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법명는 태능(太能)이며, 시호는 혜감선사이다. 백양산에서 출가하였으며 속리산과 해인사 등에서 수행했으며, 묘향산에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인조대에 남한산성을 보수하는데 참여하기도 했으며 지리산 신흥사와 연곡사를 중건하였다. 그의 승탑은 장성 백양사, 담양 용추사에도 있다. 같은 인물의 승탑이지만 백양사 승탑은 석종형태를, 연곡사 승탑은 목조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연곡사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연곡사 경내 서쪽에 위치한 소요대사탑(보물). 조선중기 활동한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으로 통일신라말과 고려초에 조성된 동 승탑과 북 승탑의 형태를 계승하고 있다.
8각형으로 된 탑신 몸돌에는 앞쪽에는 문짝 모양, 뒷쪽에는 글자를 새겨 놓고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금강역사로 보이는 신중상을 새겨 놓고 있다.
탑신지붕돌과 머리장식. 지붕 모서리에 꽃장식을 하고 있다. 동승탑이나 북승탑과는 달리 기와골 등을 세밀하게 조각하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통일신라나 고려초 승탑에 비해 조각수법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3단으로 되어 있는 받침돌. 가릉빈가나 팔부중상 등을 새겨 놓는 대신 간략하게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뒷편에서 본 모습. 탑신 몸돌에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 경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보물 1346호). 석종 형태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문화재청>
연곡사는 화엄사의 말사로 지리산의 여러 계곡 중에서 많이 알려진 피아골에 위치하고 있다. 화엄사와 같이 삼국시대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말과 고려초에는 선종 사찰로 크게 번창하였다. 경내에는 국보로 지정된 동승탑(국보 53호), 북승탑(국보 54호)를 비롯하여 탑비, 삼층석탑 등 석조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린 것을 중건하였다. 한국 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어 내력있는 목조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다. 석탑의 위치가 지금은 경내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사찰 규모에 비해 많이 축소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례 연곡사 전경.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건물들이 소실되어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말 대표적인 선종사찰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보물 154호
연곡사 소요대사탑은 탑신의 한 면에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 경인’이라는 두 줄의 글귀가 뚜렷이 새겨져 있어, 탑의 주인과 건립연도(1650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소요대사 태능은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한 스님이다. 이 탑은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의 몸돌에는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금강역사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지막하게 꽃장식을 얹어두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6년)
<출처>
- 쌍봉사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