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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개평마을, 노참판댁 고가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인 노참판댁 고가이다. 구한말 우리나라 바둑계의 일인자였던 노근영이 태어나고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이 집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집이라고 한다. 다른 저택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채와 안채가 일렬되어 있는 전형적인 남부지방 한옥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후기 참판을 지낸 사람이 살았던 저택이지만 건물 규모는 크지 않고 검소한 편이다.

<함양 개평리 노참판댁 고가>

마을에서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앞쪽에 사랑채, 뒷쪽에 안채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

양쪽에 문간방이 있는 평대문을 하고 있다. 솟을대문은 아니지만 구한말 도시형 한옥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앞면 4칸 규모로 소박하고 검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랑채 옆 광채>

<이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

개평마을은 안동과 함께 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함양의 대표적인 양반들이 세거지이다. 하동정씨, 풍천노씨와 초계정씨가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다. 조선중기 유학자이자 문신인 일두 정여창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일두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오담고택을 비롯하여 많은 전통 한옥들이 남아 있다. 개평(介坪)이란 말은 두개의 하천 사이에 있다는 뜻이다. 마을 특산물로는 정여창 종가에서 손님을 접대했던 지리산 솔송주가 있다.

<함양 개평마을>

함양 개평리 노참판댁 고가,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조선 말기 우리나라 바둑계의 일인자였던 사초 노근영(1875~1944년)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의 호가 사초여사 사람들은 노사초라고 즐겨 불렀으며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검소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재산을 내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 등지로 다니면서 가다니 8단과 혼다슈고 초단에거 백을 들고 만방으로 이기는 등 프로기사가 없던 시절에 조선 바둑계의 국수로 불려졌다. 특히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갔다가 바둑친구를 만나 약을 손에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가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선생의 증조부 감모재 노광두(1771~1859년)공이 만년에 낙향하여 기거한 곳으로 공은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매우 청렴하였다. 특히 이 지방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임금께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상소하여 탕감을 받게 된 인근의 주민들이 그 고마움으로 재물을 갖다 주었으나 받지 않아 사랑채를 지어 주었는데 이와 같은 일은 전국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드문 경우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