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으로

구한말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등 혼란스러웠던 시절에 즉위한 고종은 집권초기 흥선대원군 주도로 안동김씨를 비롯한 권문세가를 몰아내고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등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서구 열강세력에 비해 군사적.사회적.경제적인 측면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국가역량이 크게 뒤떨어졌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실권한 이후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된다.

개항 이후 조선은 근대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는 했지만, 근대화에 대한 실질적인 진전은 느렸으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과 청나라 세력의 영향력 확대가 이어졌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1880년대에 서구열강들과 본격적으로 수교함으로써 국제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에서 서구열강의 지원을 받았던 일본이 승리하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등 19세말 조선의 정세는 혼돈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근대국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으나, 그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국권을 빼았기고 말았다.

조선사회가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많은 조치가 필요했는데, 첫번째 조치는 군사력 강화를 위한 신식군대의 도입이었으며, 이는 오히려 임오군란이라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근대식 우편제도의 도입을 위한 우정국의 설치 또한 급진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과 함께 시도되었다. 조선의 실질적 근대화는 청.일전쟁 이후 기존의 제도를 근대적인 제도로 탈바꿈한 갑오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갑오개혁 이후 많은 조치가 이루어졌으며, 대한제국의 선포가 근대화의 절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모순이 극대화되었던 19세기말에 빠른 변화가 필요했지만 조선의 그 속도가 상당히 늦고, 국가적인 역량 또한 외세를 극복하기는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과 황실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사회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즉위한 고종은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0년 외교.통상업무를 강화하고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를 주도하였다. 고종은 대내외에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건설을 이룩하기 위하여 1897년 연호를 광무,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 등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미국.유럽을 통해 전기.철도.우편 등의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경험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유지하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궁내부의 제도를 수록한 책, 궁내부관제(1906년), 궁내부에 대한 연혁, 소속관청의 규정 등을 기록한 책이다. 궁내부는 1894년(고종31)에 관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왕실 사무를 국가 사무와 분리하여 전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궁내부 직원들의 인감을 모은 책, 각원사인감록(1907년), 궁내부 소속 기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직명, 직급 및 성명을 쓰고 인감을 찍어 모아 놓은 책이다. 1894년(고종31) 갑오개혁 이후 본격적인 관제 개혁과 관문서 제도의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개인의 인감이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내장원의 인장, (오른쪽1895년), 내장원에서 쓰던 관인이다. 내장원은 1895년(고종32)에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내수사를 개편한 기관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로 내장원의 권한을 확대하여 산하에 광산 및 철도 사업 등을 담당하는 부서를 설치, 황실은 물론 국가 재정까지 관여하게 하였다. 내무부의 인장(가운데, 1885년경), 내무부에서 사용하던 관인이다. 내무부는 국내외의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1880년(고종17)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의 군국.궁내 사무 기능을 승계한 기관으로 갑오개혁 때 의정부의 내무아문으로 흡수되었다. 예식원의 인장(왼쪽, 1900년경), 예식원에서 쓰던 관인이다. 예식원은 외부가 관장하던 업무를 이관받아 궁내의 외교사절과의 교섭과 일체의 예식, 친서.국서 및 외국 문서의 번역 사무를 맡아 보았다. <출처:고궁박물관>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서구 문물과 제도의 도입
개항 이후 고종은 서양의 기술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져 각종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외국 기술자를 초빙하고 근대식 기계를 도입하는 한편 각종 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근대산업시설을 갖추어 신문을 발간하고 신식무기를 제조하였으며 근대화폐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근대적인 통신제도를 갖추기 위하여 우편 및 전신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1887년(고종24) 마침내 최초로 경복궁 건청궁에서 전등이 점화되었다. 1899년(광무3)에는 전차가 개통되는 등 근대적인 교통수단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서구 문물과 제도의 도입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도구로 이용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으나 근대 국가로의 발전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사회 다방면의 큰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인정전 앞에 세워진 전신주(1900년대), 근대기 서울에 개통된 전차(1904년)

OLYMPUS DIGITAL CAMERA구 백동화 교환 기한에 관한 고시(1908년), 1908년 구 백동화를 교환하여 사용할 것을 알리는 탁지부의 고시문이다. 1908년 11월까지 구주화를 교환할 것을 알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05년부터 일본의 주체로 구 백동화의 교환이 시행되어 화폐부족으로 인한 금융 공황 등이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구 백동화 교환 기한 고시
구 백동화의 교환기간은 금년(1908년) 11월3일로 한하고 그 기한이 지난 후는 통용함을 금함을 금년 3월 탁지부령 제3호로 임의발령하였으니 만일 구 백동화를 두었다가 홀연히 그 기한을 지나면 불요한 손실을 당할지니 속히 금고 등 기타 금융기관에 가서 교환함을 청구하여 불측한 손실을 당치 아니함이 가함. 교환기간 후라도 6개월 간은 공납에만 한하여 바침을 득하나 국고금 취급소 외에는 이를 수입치 아니할 터인즉 극히 불편할지니 반드시 기한 안에 속히 교환함을 청구함이 가함. 융희2년(1908) 8월28일, 탁지부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구 백동화 사용 금지에 관한 고시(1909년), 1909년 구 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는 고시문이다.

구 백동화 사용금지 고시
구 백동화는 지난 융희2년(1908) 11월 말로서 일반 통용을 금하고 다만 공납에 한하여 본년 12월 말까지 사용함을 허가하였으나 명년 1월1일부터는 결코 통용함을 금지할 터이니 인민들은 그 가진 백동화를 본년 내로 공납에만 사용하되 오히려 남은 것이 있거든 역시 본 기한 내로 매수함을 청구하여서 의외의 손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함이 가함. 융희3년(1909) 11월1일, 탁지부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오냥원판목조틀(뒷면), 십냥원판(뒷면, 앞면),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 원판, 호조태환권원판(1892년 경), 우리나라 최초 지폐인 호조태환권의 원판이다. 1891년(고종27) 「신식화폐조례」공포에 따라 신.구 화폐의 교환업무를 위하여 설치된 태환서에서 제조되었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발행 되지 못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근대 훈장제도의 성립
1894년(고종31) 갑오개혁을 시작으로 계속된 근대적 관제 개편의 일환으로 1899년(광무3) 7월4일 「표훈원관제」의 반포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훈장 제도가 성립되었다. 1900년 4월17일에는 「훈장조례」가 제정되어, 금척대훈장.이화대훈장.태극장.자응장 4종류의 훈장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1901년 4월16일에는 위의 조례를 개정하여 팔괘장이 태극장과 같은 격으로 추가되었으며, 다음해인 1902년에는 서성대훈장이 추가되었다. 1907년 3월30일에는 「훈장조례」가 개정되어 내명부 및 외명부의 여성, 공주, 옹주 등 여성에게 수여되는 서봉장이 제정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팔괘장, 1901년 칙령 제10호로 「훈장조례」를 반포하며 제정한 훈장이다. 등급은 훈공1등에서 훈공8등으로 차이를 두었다. 훈장 위에 역삼각형으로 접은 훈장대의 중앙에는 오얏꽃을 접어 달았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근대식 교과서(왼쪽, 1895년), 1895년(고종32) 학부편집국에서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이다. 국한문 혼용체로 양반은 물론 상민들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전통 역사는 물로 세계 여러 나라의 풍물과 선진문물을 소개하고 있다. 학부의 직원목록(오른쪽, 1900년), 1900년에 작성된 학부의 직원 목록이다. 학부는 근대적인 교육행정기관으로 1895년(고종32)에 학부아문이 개칭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파리 만국박람회 그림(왼쪽, 프랑스, 1990년), 프랑스 주간 화보지 『르 쁘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1900년 12월16일 자의 삽화로 1900년 4월 개최된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졌던 한국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장 지도(오른쪽).『파리박람회안내서 The Paria Exhibition』에 실려 있는 만국박람회장의 지도로 한국관은 C2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대한제국이 최초로 독립적인 전시관을 만들어 참가한 박람회로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자원과 산업을 대대적으로 소개할 수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파리 만국박람회 기념동전(프랑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제작된 주화이다. 한 면에는 왕관을 쓴 여신상이 양각되어 있고, “LEXPOSITION DE PARIS 1900″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다른 한 면에는 근대 산업화를 상징하는 배, 열기구, 전신주, 카메라 등이 양각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제사회에 등장하다. 외교정책의 변화
조선은 전통적으로 외세에 대하여 쇄국 정책을 고수해 왔으나 19세기 이후 세계 정세의 급속한 변화에 점차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875년(고종12)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게기로 1876년(고종13)에 굳게 닫혀있던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조선정부는 국제질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여 여러모로 불합리한 첫 국제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곧 근대적인 국제법을 익히고 기존 국제 조약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다른 나라들과의 조약체결을 준비하여 1882년(고종19) 서양 열강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조선정부는 그 뒤 잇달아 영국, 독일, 러시아 등 9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으로 세계 외교 무대에 등장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이 영국과 맺은 통상조약(1883년, 복제), 조선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문이다. 1882년(고종19) 체결한 ‘조영통상장정’을 영국 측 입장에서 보강하여 수정한 것으로, 조선측에서는 민영목이, 영국측에서는 해리 파아크스 Harry Parkes가 협상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제국 시기에 발급된 여권(1904년), 대한제국 외부에서 1904년 10월8일 상인 이상목에게 발급한 여권으로 통상과 여행을 위해 인천항을 출발하여 일본 도쿄 등지로 여행하는 일정을 증명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울의 외국 공사관

OLYMPUS DIGITAL CAMERA홈즈의 『버튼홈즈여행기Burton Holmes Travelogues』(왼쪽, 미국, 1919년), 미국의 여행가이자 사진작가인 버튼 홈즈(E. Burton Holmes)가 1900년 전후에 한국을 방문한 후 쓴 여행기이다. 경운궁 사진, 명성황후 홍릉의 사진 등이 실려 있다. 1908년에 발행된 것을 1919년에 재발행한 책이다. 해밀턴의 『한국Korea』(오른쪽, 영국, 1904년), 앵거스 해밀턴(Angus Hamilton)이 1901~1903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하고 쓴 견문록이다. 해밀턴은 영국 신문기자로 당시 대한제국의 사회상을 통계를 바탕으로 하여 실증적으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롱포드의 『한국이야기 The Story of Korea』(왼쪽, 영국, 1911년), 일본에서 외교관직을 두루 지낸 영국인 롱포드(Joseph H. Logford)가 한국의 역사를 고조선부터 20세기까지 서술한 역사서이다. 서울, 평양의 모습 등을 도판으로 실어 당시 풍속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언더우드의 『상투의 나라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오른쪽, 미국, 1904년),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가 우리나라에서 겪고 느꼈던 것들을 쓴 책이다. 왕비의 시의였던 릴리아스는 고종을 ‘좋은 품성을 가진 친절한 신사’, 명성황후를 ‘진보적인 정책을 펼친 유능한 외교가’로 평가했다. <출처:고궁박물관>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의 탄생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현 덕수궁)을 환궁하였다. 그리고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정궁이자 황도의 중심으로 삼아 황제권을 확립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서구열강의 침입과 압박 속에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한 제국의 건설을 꿈꾸며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마침내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은 황제로 등극한 이후, 명성왕후를 황후로 책봉하고 황제국의 예로 국장을 치렀으며 왕태자와 왕태자비를 황태자와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 또한 선대 국왕을 황제로 추승하는 등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국가 의례를 재정비하여 황실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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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초상(1918년경), 대한제국의 초대황제인 고종의 초상이다.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어 황제의 복식을 갖추었다. 배경의 휘장장식, 얼굴과 의복의 묘사에 사용된 강한 명암 효과 등이 전통 방식의 초상과 차이가 있다. 1918년경 찍은 고종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제국 선포일지

OLYMPUS DIGITAL CAMERA환구단에서 지내는 제사의궤, 환구단의궤(왼쪽, 1907~1910년, 복제), 환구단에서 동지에 지내는 제사축식을 실은 의궤이다. 본래 광무 연간에 편찬하였던 것을 융희연간에 수정.제작하였기 때문에 고종과 순종 시기의 변화된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선포 의궤, 대례의궤(오른쪽, 1897년, 복제),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관련된 여려 의례와 작업들을 기록한 책이다. 황제 즉위식과 황후.황태자 책봉, 각종 의장물과 어책.오보 제작 등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반차도 도설이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조.문조황제 추존 옥보(왼쪽, 1899년),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국의 에법에 맞게 창업주의 직계 4대조를 추존하자는 논의에 따라 1899년에 순조, 문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제작한 옥보들이다. 옥으로 제작되었으며 손잡이는 모두 용의 형태이다. 영친왕 황태자 금보(1907년), 1907년에 영친왕 이은이 황태자로 책봉될 때 만든 어보이다.  영친왕 황태자 금보(왼쪽, 1907년), 1907년에 이은이 황태자로 책봉될 때 만든 어보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의친왕부의 인장(왼쪽, 1900년경), 궁내부 소속 친왕부 중 의친왕과 관계된 업무를 전담한 의친왕부에서 사용했던 관인의 나무본이다. 영친왕부의 인장(1900년), 영친왕과 관계된 업무를 전담했던 영친왕부에서 사용했던 관인이다. 영친왕부는 1900년 ‘친왕’제도가 생긴 이후 궁내부에 설치되었다가 1907년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폐지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1902년은 고종이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자 망육순(51세)을 맞는 해였다. 고종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존호를 올렸으며,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드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진연을 베풀고 어진을 제작하였다. 한편 세종로 사거리에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비를 건립하고 기념장.기념우표 등을 발행하였다. 이러한 기념행사와 기념물 등은 대내적으로 황제에 대한 위상을 높이는 한편 대외적으로 각국 원수와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과시하여 대한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종왕제 즉위 50주년 기념장(왼쪽, 1912년), 고종의 즉위 50주년 기념장이다.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 즉위 40주년 기념장에 준하여 제작하였다.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장(오른쪽, 1902년), 고종의 망육순(51세)과 즉위 40주년 기념장이다. 앞면에는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이라는 누각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기념문구와 황제가 쓰던 통천관을 새겼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옥책(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옥책이다.

군사제도의 근대화
개항 이후 조선왕조는 군의 근대화와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1876년(고종13)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군사제도 운용전반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1881년(고종18)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여 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1882년(고종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수도 방위의 강화를 위하여 친군영을 두었다. 또한 1895년(고종32) 서울에는 궁성 수비와 도성 경비를 위하여 친위대와 시위대를 두었으며, 주요 도시에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8년에는 황제가 대원수가 되어 친히 육군과 해군을 총괄하였다. 1899년에는 원수부를 설치하여 중앙군과 지방군을 지휘.감독하고 국방에 관한 명령을 관장하는 등 황제의 군권을 강화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친군영 발군 문서에 사용하던 인장(왼쪽, 1883년), 친군영에서 발급되던 문서에 발급 기관 표시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서인이다. 친군영의 인장과 함(1883년), 고종이 친군영의 수장으로 사용했던 친군영 인장이다.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를 담아서 보관하던 인함과 함께 전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친위대 계급장(1895년), 친위대의 계급장이다. 친위대는 1895년(고종32) 「육군편제강령」에 의해 창설된 근대적인 군사조직으로 군대 편제, 수도 한양과 왕궁의 호위가 주임무였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