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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복사지(사적), 김시습 소설 금오신화의 무대였던 절터

전북 남원시 왕정동 남원읍성 서북쪽에 위치한 고려시대 절터인 만복사지(사적)이다. 고려 초에 처음 세워진 만복사는 읍치였던 남원읍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고려시대 평지 찰이다. 조선초기 생육신 중 한명으로 당대의 천재로 이름을 떨친 김시습이 지은 소설 ‘금오신화’의 다섯편 이야기 중 하나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이 곳 만복사이다. 김시습이 소설의 무대로 만복사를 선택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크게 번창했던 사찰로 보인다. 조선중기까지 수백명의 승려가 머무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전각들이 불타버린 후 폐사되었다. 남원 광한루원와 함께 지리산 입구에 교통요지에 위치한 남원지방의 풍부한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만복사는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금당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의 고구려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쪽 금당자리에는 불상을 올려 놓았던 아주 큰 불상대좌가 남아 있으며, 높이 10m의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절터에는 남아 있는 문화재나 절터의 규모 등으로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남원 만복사 절터>

남원읍성 서북쪽에 위치한 고려시대 절터로 1탑3금당식의 고구려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큰 절이다. 절터에는 거대 불상을 올려 놓았던 불상좌대(보물)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만복사지 당간지주(보물)>

만복사지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체 높이가 5m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조각수법에 세밀함이나 조형미 등은 통일신라시대나 삼국시대에 만들어 진 것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절터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석인상>

두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보고 있는 이 석인상에서 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석인상은 원래의 위치에 한쌍이 도로변에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옮겨왔다. 현재의 위치는 만복사의 가람배치에 큰 의미는 없다.

<만복사 절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목탑터>

만복사는 목탑을 중심으로 좌.우.뒷편에 3개의 금당을 두는 고구려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만복사가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의 사찰과는 달리 기도를 하러 절을 찾은 신도들을 위한 탑과 불전 중심의 사찰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목탑 앞에는 석등이 있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옆에서 본 목탑지>

<목탑을 오르는 돌계단>

<목탑 건물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

<목탑 뒷편 금당터>

장륙전과 같은 거대한 불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 기둥을 올려 놓았던 주춧돌>

<주춧돌과 다른 형태의 석조물>

<금당터 뒷편 건물터>

강당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탑 서쪽 금당 터>

기록에는 서쪽에 2층 불전이 있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석조대좌나 건물터의 넓이 등으로 볼 때 높이 10m의 거대 불상이 있었던 장륙전같은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이곳에는  불상을 올려 놓았던 화강석으로 만든 거대한 석좌가 있다. 만복사는 금당에 동으로 만든 높이 10m의 거대한 불상이 유명했다고 한다.

<금당을 오르는 길>

<거대한 불상을 올려 놓았던 석조대좌(보물)>

하나의 큰 돌을 조각하여 상.중.하대를 표현하고 있다. 하대 옆면에는 안상과 꽃을, 위쪽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상대에도 연꽃무늬를 새긴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위쪽에는 불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파놓은 네모난 구멍이 있다. 통일신라 8각형 대좌 형식에서 벗어나 6각형으로 이루진 것이 특징이다.

<건물 기둥을 올려 놓았던 주춧돌>

<서쪽편 금당 뒷편 건물터>

<목탑 동쪽편 금당터>

<금당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동쪽편 금당 뒷편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보물)>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 놓았는데 지금은 4층만 남아 있다. 기단부는 일부 땅에 묻혀 있으며, 탑신 1층 몸돌을 크게 만들어 기단역할을 하고 있다. 탑신 2층부턴 몸돌을 낮게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변 전체가 들려 있다. 고려초에 만복사를 세울 때 조성된 것으로 그 원형이 많이 손상되어 있다. 조각수법이나 조형미도 크게 뛰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전형적인 고려 석탑으로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 만복사에는 거대한 목탑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탑>

지붕돌만 일부 남아 있다.

<오층석탑 동쪽편 건물터>

<불상이 모셔전 건물>

동쪽 금당 뒷편에는 만복사 창건 당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보물)가 모셔진 보호각이 있다. 원래 금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만복사 절터에 남아있는 석조여래입상(보물)>

바위 위에 부처가 서 있는 입상 형태의 불상으로 뒷편에는 광배를 두고 있다. 조각수법이나 조형미 등은 약간 세련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옷주름이나 자세 등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동쪽 뒷편에 남아 있는 건물터>

남원 만복사지, 사적, 전북 남원시 왕정동
이 곳은 고려 문종(1046~1083)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근래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식 배치였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1579) 때 불타 없어졌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일면이나마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경내의 국가지정문화로는 오층석탑(보물 30호), 불상좌대(보물 31호), 당간지주(보물 32호), 석불입상(보물 43호)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