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대한제국 황실 가족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황실은 일본 귀족으로 관리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족으로는 잘 알려진 인물은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그의 이복형인 의친왕 등이 있다. 영친왕은 마지막 황태자로 일본에서 오랜 세월 볼모 생활을 하였으며, 일본 귀족의 딸인 이방자와 결혼하였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는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또한 1960년대까지 창덕궁에서 마지막을 보낸후 조선왕실 중 마지막으로 왕릉에 묻혔다. 또한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대마도 귀족과 강제 결혼하여 불행한 삶을 살다 귀국하여 영친왕비와 함께 1980년대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은 자식이 많아 지금도 생존해 있는 후손들이 많은 편이다.

고궁박물관에는 마지막 조선왕실이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최근까지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유물들은 그리 많지 않은편이다. 조선왕실이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을 비롯하여 장신구 등 영친왕비가 사용했던 유물들이 남아 있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순종황제 어차(1918년경, 등록문화재 318호),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로 미국의 지엠GM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7인승, 31.25마력, 8기통 엔진, 배기량 5,152cc로 연식은 1918년경으로 추정된다. 차체는 철재가 아닌 목재이고 외부는 칠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 20대만 남아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정효황후 어차(1914년경, 금속.목제, 등록문화재 319호),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탔던 어차로 영국의 다임러사가 제작한 리무진이다. 7인승.20마력.4기통엔진.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경으로 추정된다. 순종황제 어차와 같이 차체는 목재이고 외부는 칠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전 세계적으로 3대만 남아 있고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자동차로 순종황제 어차와 함께 자동차 발달사는 물론 황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사자료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대한제국기의 수입 도자기
조선왕실은 전통적으로 왕실 관요에서 생산한 그릇을 사용하였으나,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한 이후부터 왕실에 양식기가 유입되었다. 특히 1885년 베베르 K.I. Weber 러시아 공사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서양식 음식 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했던 손탁 Antoniette Sontag 여사는 대한제국 황실에 유럽 자기를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대한제국기의 수입 도자기들은 대부분 영국,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것이며 그 중 상당수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 주문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디너 세트용 식기들(일본.프랑스, 20세기 초) 일본의 노리타케 Noritake와 프랑스 삘리뷔Pillbuyt 자기제작사 등에서 황실용으로 주문 제작한 디너 세트용 식기들이다. 도자기 표면에는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을 황금색으로 찍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채식 꽃무늬 항아리(일본, 20세기초), 일본에서 제작하여 수입한 항아리로 몸통을 6등분하여 넓은 입사귀 무늬로 채우고 윗부분에 나비, 잠자리, 벌 등의 곤충을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대한제국기 황실에서 수입하여 사용한 도자기로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새로 제정된 법규를 엮은 책(1908년), 1895년부터 이듬해까지 새로 제정된 여러 법규를 하나로 엮은 책이다. 1900년부터 1908년까지 관복 규정 개정 내용이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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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이 입었던 군복(1900년경), 영친왕이 3~4살 때 입었던 군복으로 부장예복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근대기 황실 궁궐 내부 모습(20세기초), 대한제국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궁궐 내부는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한 의자, 탁자, 커튼, 카펫 등의 입식 생활에 사용되는 가구와 장식용품으로 꾸며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구 등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샹들리에와 같은 전기시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덕수궁, 창덕궁 등 당시 황실 일원들의 생활공간은 점차 서양식으로 변모해 갔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덕수궁 석조전 접견실에서의 영친왕 일행 (1911년), 일행의 뒷편에 현재 전시되어 있는 전등 입식대와 오얏꽃 무늬 자수 병풍이 보인다.

순종의 남서 순행
순종은 1909년 두차례에 걸쳐 순행에 나서게 되었다. 첫번째는 1월7일에서 13일까지 대구.부산.마산 등지를 거쳐 돌아오는 남순행이었고 두번째는 1월27일부터 2월3일까지 평양.의주.신의주 등지를 거쳐 돌아오는 서순행이었다. 이 두번의 순행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정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추진된 것이었다. 당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반일 의병 항쟁이 격화되자, 순종을 내세워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일본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이를 기획한 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순행에서 백성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와 대한제국의 황제를 열렬히 환호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애국심을 표출하고 단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종황제 서순행 사진첩(1909년), 순종이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3일까지 8일동안 서북 지역을 순행한 일정을 기록한 사진첩이다. 사진첩에는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통감과 각부 대신들의 수행을 받으며 궁정열차를 타고 평양, 신의주 등을 순행한 일정이 총 62장의 사진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종황제 남서순행 기념장(1909년), 순종이 남순행과 서순행을 마친 후 1909년 6월 이를 기념하여 순행에 봉영했던 자들에게 수여한 기념장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운명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왕직이라는 기구를 두어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을 일본의 귀족으로 관리하였다. 이는 명목상 기존의 황실을 대우하는 것으로 선전하여 식민통치에 활용하려는 의도였기에 대한제국 황실 일원들은 철저하게 일본의 감시 하에 생활하여야 했다. 특히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미혼자들은 전통이나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귀족들과 혼인하도록 강요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 일본 귀족의 딸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이방자)와 혼인하였으며, 고종황제의 고명딸이었던 덕혜옹주 역시 대마도의 일본 귀족 소 다케유기와 강제 혼인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과 영친왕비의 결혼사진(1920년), 영친왕 이은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사진이다. 영친왕은 24세 되던 해에 일본 황족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는 결혼 후 일본 풍습에 따라 남편의 성인 ‘李’로 성을 바꾸고 ‘이방자’가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덕혜옹주가 영친왕에게 보낸 엽서(1929년) 1929년 1월1일에 덕혜옹주가 영친왕에게 보낸 신년인사엽서이다. 덕혜옹주가 영친왕비에게 보낸 엽서(1929년), 1929년 1월1일에 덕혜옹주가 영친왕비에게 보낸 신년 인사 엽서이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복녕당 귀인 양씨 사이에 태어난 고명딸로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 종주 소 다케유키와 강제혼인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건이 영친왕에게 보낸 문안 엽서(1930년대), 의친왕의 장남 이건이 영친왕에게 보낸 문안엽서이다. 이건은 13세에 일본에 유학 명목으로 보내졌으며, 23세에 일본 귀족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하였다. 1947년 일본에 귀하하여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하였다. 이우가 영친왕 부부에게 보낸 문안엽서(1930년대), 의친왕 차남 이우가 영친왕 부부에게 보낸 문안엽서이다. 이우는 일본 여성과의 정략결혼 정책을 거부하고 박영효의 딸 박찬주와 혼인하였으며,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때 피폭되어 사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 수첩(1920년대), 일본의 경제, 교육 등 여러 현안 및 유럽 국가들의 정세에 관한 메모를 기록한 영친왕의 수첩이다. 단편적인 기록들이지만 이를 통해 세계 정세에 관한 영친왕의 높은 관심과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비 일기(1919년), 영친왕과의 결혼 한 해 전인 1919년에 쓴 영친왕비의 자필일기이다. 총130면에 1월1일부터 12월31일 간의 개인의 일과와 결혼을 앞둔 심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의 환국을 촉구하는 편지 (1961년), 1961년 충남 대전 중동의 상지회 대표 이유립 외 14명이 영친왕에게 쓴 편지이다. 영친왕의 처지를 중국의 여러 역대 왕에게 빗대어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후원에서의 고종(1884년경)

OLYMPUS DIGITAL CAMERA고종과 왕세자(1888년경), 대한제국 선포전 고종과 왕세자인 순종 사진으로 모두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을 하고 있다. 1888년 한국을 여행하고 사진을 수집해간 샤를르바라 Louis Charles Varat의 책(1892년)에 실려 있다. 상복을 입은 고종(1896년 경), 하얀 상복차림의 고종 사진으로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시기에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의하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상복을 입은 모습을 촬영한 것이라 한다. <출처:고궁박물관>

황실의 군예복 착용 모습, 대한제국의 군복은 계급에 따라 별 개수와 소매부분의 ‘人’자형 계급장 수가 달랐다. 원수부의 대원수인 황제는 11줄, 원수인 황태자는 10줄이었고, 대장은 9줄, 부장은 8줄, 참위는 1줄로 수가 달랐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들 속에서도 고종, 순종, 영친왕 등이 황실의 군예복을 차려입고 위엄을 갖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종과 순종(1900년경), 고종과 황태자가 각각 대원수복과 원수복을 착용하고 있어 원수부가 존속했던 시기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순종.영친왕(1900년경), 고종.순종.영친왕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고종(195년),

OLYMPUS DIGITAL CAMERA 어좌에 앉은 고종(1902년경), 일월오봉병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고종이다. 1902년 네지에르 Joseph de la Neziere의 삽화와 거의 같아 1902년경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중화전으로 보인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는 황룡포와 금척대수정장과 금척장을 패용하고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 의친왕비, 궁중여인들(1904~1907년 경)

OLYMPUS DIGITAL CAMERA고종(1907년경), 강제 퇴임이후 태황제 복장의 고종이다. 순종(1907년경), 순정효황후(1907년경), 영친왕(1907년경)

OLYMPUS DIGITAL CAMERA 순종과 순정효황후(1907년 이후),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1907년), 순종과 순정효황후(1907년 이후), 순종의 육군대장 복식차림으로 미루어 1907년 이후 촬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의친왕비(1907년 이후), 고종과 원로대신들(1908년), 1908년 9월8일 고종의 탄일을 기념으로 열린 기로연 후에 고종이 기로소 대신들과 경운궁 준명당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황실가족사진(1918년경), 오른쪽부터 덕혜옹주, 순정효황후, 고종, 순종, 영친왕 순이다. 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축하하며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1926년), 순종황제의 붕어는 6.10만세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6월10일 장례식을 마친 융희황제 순종의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나자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하여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을 잇는 민족적, 전국적 항일운동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친왕과 영친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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