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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프라하] 초기의 방어시설, 성채

9세기 말 체코인들이 보헤미아 왕국을 세운 이래로 프라하는 새로운 국가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이때 체코공작들이 거주하는 프라하 성이 지어졌으며, 블라타강 건너편에는 비셰흐라드라는 성채가 만들어졌다. 이때의 성곽은 나무와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이후 탑이나 망루 등이 세워지고 성곽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대체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의 규모가 확대되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 성벽은 점차 도시의 규모에 걸맞게 확장되었다. 특히 체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4세기 후반에 프라하 읍성의 성곽은 대대적으로 보강되었으며 이때의 성벽들과 탑 등 많은 방어시설들이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다.

9~10세기 경에 프라하 소지구에서 축성된 초기 중세 성곽 잔재로 추정되는 선형의 토목 구조물의 일부, 2002년, 얀 하브르다.

토목(土木)성곽.

나무 격자판과 흙, 간헐적으로 돌을 채워 넣었다. 각각의 나무는 성곽선과 직각으로 설치되었다. 최다 11개 나무 격자판 겹이 발굴되었다. 뒤쪽(안쪽) 성벽은 커다란 쌍 기둥으로 구성되었다. 바깥쪽은 건조식으로 축성된 이회암 성벽이었다. 2002년, 얀 하브르다.

금상감 철제 도끼, 비셰흐라드 성채 포드스칼리 출토, 철, 황금, 은, 10~11세기

중세, 각 구역의 방어시설이 어디서 어떡게 구축되었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성벽이 점차 성 아래로 뻗어 나갔다. 성 아래에는 외군 침입과 내국 반란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도시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부 유럽 지역에서 프라하의 위치가 중요해짐에 따라 도시 규모가 커져서 성곽을 보강할 필요가 생겼다. 중세의 절정기는 까렐 4세(Karel IV, 1316~1378)의 재위 기간이었다. 그는 프라하 도읍지를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전체의 정치 및 문화적인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명령으로 방어 시설의 대대적인 공사와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사업은 새로 개발된 신도시 편입 및 기존 도시 구역의 확장과 관련되어 있었다. 공사는 체코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였다. 황제의 도읍지는 수 킬로미터의 튼튼한 성곽과 보루로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제일 중요한 대문 보강에 초점을 맞춰 대문이 독립된 보루로 발전했다. 당시의 건설 공사 품질을 오늘도 확인할 수 있었다. 왼쪽 강가의 성곽 대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심한 전란과 악독한 기후 조건도 잘 버텨 왔다. 당시의 성곽과 탑은 주로 석회 모르타르와 퇴적암인 이회암을 결합시켜 쌓았다. 다만 성곽 보행로나 성가퀴가 벽돌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마태 운게르(Matous Unger) 필경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프라하 구시가 및 유대인 지구 그림지도, 채색된 그림 복사본, 1642년 경.

비셰흐라드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누셀스키 골짜기, 앞에는 신사가의 남은 석곽 일부, 사진(왼쪽, 1930년경), 구시가 교탑 대문은 강의 맞은편(왼쪽 강변)으로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대문이었다. 사진(가운데, 1920년대). 구시가 성곽 일부인 고딕양식의 탑, 앞쪽에는 10세기의 군주 묘지 발굴현장, 사진(오른쪽, 1936년).

페트르진 언덕으로 올라가는 까렐 4세 때의 성곽 및 우예즈드 대문 사진(왼쪽, 1870년경), 동쪽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의 성 스테판 성곽탑, 펜 그림(오른쪽, 1898년).

투겁식 쇠뇌 화살촉(철, 15세기경), 투겁식 화살촉( 철 14세기경).

한손 반검(장검), 강철, 가죽, 15세기

화승총, 철, 참나무, 15세기

투석기 알(각암, 15세기 전반), 새총용 총알(복제품, 돌, 15세기 전반)

비셰흐라드, 도시의 시타델라 성채
비셰흐라드의 역사는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1세기 말경에 비셰흐라드에 토성을 대체한 석성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비셰흐라드의 발전 단계 중 제일 중요한 시기는 14세기 후반이었다. 까렐 4세가 작성한 즉위식 시행령 중에 새로운 군주는 즉위식 전날 비셰흐라드까지 걸아가야 하는 규정이 있는데 군주는 체코 건국신화에서 나온 농부 출신 프르제미슬 오라츠의 신발과 사용했던 주머니를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까렐 4세는 비셰흐라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1348~1350년 사이에 성곽 재건축을 시켰다. 석성을 튼튼하게 축성하였고 더불어 철저하게 보강되고 독립된 성채 형태로 세워진 쉬피츠카라는 대문을 만들었다. 전쟁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구 시대의 성곽은 효용가치가 반감되었는데 특히 대포의 보편화에 따라 효율성이 매우 떨어졌다. 30년 전쟁 초반 비셰흐라드의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 성곽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흙으로 된 바스티온을 축조했다. 1653년에 비셰흐라드는 수비군 병사, 무기 창고, 탄약 창고 등을 갖춘 도시 시타델라 성채로 개조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다음 수십년 동안 소규모로 계속되었다. 시타델라 성채는 거의 200년간 개선되어 왔는데도 프라하 방어에 크게 기여한 적은 없다. 프라하 변두리에 위치한 데다가 수비병력 부족과 전방의 방어시설 부재로 그 중요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1741~42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상속문제로 발생한 전쟁에서 비셰흐라드는 프랑스군에게 점령되는 동안 몇 차례 개선 공사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2년 뒤에 프러시아 군에 함락되어 10주간 점령당했으며, 프러시아 군 철수 후 폭파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공사 시기는 1808~9년 나폴레옹 전쟁 때였다. 마지막 추가 공사는 1848년의 혁명을 계기로 축조된 포대를 갗춘 V자형 방비벽이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비세흐라드 시타델라 성채, 1668년의 복원된 모습, 윗쪽 성곽 돌출부에 중세때의 쉬피츠카라는 주 대문이 그려져 있다. 채색 목판 인쇄, 19세기 말.

레오폴드 황제의 이름 딴 비셰흐라드 시타델라 성채의 주 대문, 1669년 건립, 사진 1930년대

안쪽에서 바라 보이는 비셰흐라드 성채의 타보르 대문, 그림엽서(채색된 사진복사, 1900년경), 비셰흐라드 절벽 위에 위치한 성채에서 당시 주요 교통로인 브르타바 강을 통제할 수 있었다. 사진(1870년대).

현재까지 남아있는 곳(중세유적지), 한국관광객이 많이 찿는 곳
까렐 4세때 축조된 성곽 중 비교적 긴 두 부분이 현재 보존되어 있고 또 주거용 건물이나 종탑으로 개조된 탑들이 많이 남아 있다. 중세 방어시설로 현존하는 많은 구조물이 프라하성 내에 있으며, 성곽의 총 길이는 2.5킬로미터에 달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2. 구시가지 쪽 교탑(1380년), 10. 누셀스케 골짜기를 가로 지르는 중세 성곽(14세기 중반)

11. 유디트 교탑(12세기), 12.소지구 교탑 및 대문(1560년대), 13. 페트르진 언덕 위 소지구 방어시설( 1460년대)

15. 흑탑과 동쪽 대문(1140년 경), 21, 화약 포탑(1490년대)

초기의 방어시설 – 성채
프라하 분지의 성곽 도시 역사는 체코 건국때부터 시작된다. 블타바 강 유역에 길게 뻗은 완만한 언덕 위에서 9세기경 당시 체코공작들이 거주하는 프라하성이 지어졌다. 그 다음에 성채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인접한 소지구에 방어 시설이 설치되었다. 프라하성이 분지를 북쪽에서 지키듯이 남쪽 강 건너편에 서기 1000년경 비셰흐라드(Vyšehrad)라는 성채가 만들어졌다. 먼저 참호를 깊게 파고 그 뒤에 적합한 고지대나 층대에 나무와 흙으로 된 성벽을 쌓았다. 나중에는 누각이나 탑, 또는 보루로 보강되고 튼튼한 대문을 갖춘 석조 성곽으로 대체되었다. 나무와 흙으로 된 성벽은 먼저 빈곳을 자갈로 채운 다음, 나무 격자판을 모르타르 없이 쌓아 올린 이회암(석회질의 이판암)으로 된 바깥 석벽과 묶었다. 성벽의 안쪽은 통나무로 되어 있고, 구조물 전체를 진흙으로 채워 단단하게 다졌으며, 위에는 통나무 방책이 세워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