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백탑파이야기] 탑골에서 부는 바람

실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대두된 현실개혁적인 조선시대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당시 청나라의 고증학과 더불어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에 그 근원을 두고 양국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면이 있다. 청대의 고증학은 경서의 해석에 치중한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서구문물의 영향과 함께 농업에서 부터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구한 학문으로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실학이 기존 성리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학문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의 학문이다. 농업생산력 향상과 토지 소유관계에 따른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중농주의부터 상업과 청나라 문물의 도입을 강조하는 북학파, 민족의 정체성으로 되찾고자하는 시도를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와 형태의 학문들이 실학의 범위로 분류된다.

오늘날 ‘원각사지 구층석탑’이 남아 있는 탑골공원 주변에는 조선후기 중흥기를 이끈 정조대 실학자 중 박지원을 비롯하여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등이 살았다. 이들은 청나라 연행 등을 통해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북학파의 중요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이 살았던 지역 이름을 따서 백탑파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2014년 겨울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이들의 삶과 사상 등을 되돌아보는 의미로 “탑골에서 부는 바람 – 백탑파이야기”라는 제목을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시에서는 정조대 백탑파 사람들이 살아왔던 모습과 교류관계,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회 등을 되돌아 보는 내용들이다.

빙두른 도성 한가운데 백탑
종로 2가 30번지,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탑골공원. 먼지와 비바람을 피해 유리 보호각 속에 초라하게 서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조선시대에는 도성 한복판에 우뚝 솟아 흰 자태를 뽐내던 탑이었습니다. 그 탑을 배경으로 18세기 한양의 뛰어난 수재들이 모여 ‘백탑파’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었으며, 조선의 폐단을 여지없이 꼬집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과 지식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조선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015년 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탑골에서 부는 바람 – 백탑파 이야기』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백탑파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탑골공원 주변에 살았던 영.정조대 실학자 박지원, 홍대용, 이서구 등이 서로 교류했던 모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한양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주변 주택가를 묘사한 그림.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대표하는 이정표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18세기 동아시아 3국(조선, 청, 일본)은 이른바 ‘중흥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정조와 시대를 같이하는 청나라 건륭제, 일본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은 임진왜란 이후 지속된 평화 속에서 자국의 체제정비와 함께 실격 배양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각국은 전 시기보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상품경제가 활발해졌으며, 상업발달로 부를 축적한 서민들의 의식은 성장했습니다. 또한 지식인들은 자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학문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들 세 나라는 부분적인 개방을 통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청은 광저우를 통해, 일본은 나가사키를 개방하여 서양문물을 직접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조선은 예외적으로 청과 일본 등을 통해 서양문물을 간접적으로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지도층의 지적 호기심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며, 19세기 서양 열강의 세력에 밀리게 됩니다. 천하의 중심이 ‘중국’으로 인식되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국제질서로 동아시아 세계가 재편된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변화하는 한양
18세기 한양. 인구 20여 만이 넘어선 도성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인구증가와 상품화폐의 발달로 인한 경제구조의 다변화는 신분계층의 분화와 서민층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명분을 앞세우며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내세우던 성리학은 그 힘을 점점 잃어갔고, 대신 피지배계층의 현실에 맞춰 정책이 수행되고 학문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 발전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조선은 관념적인 세상에서 벗어나야 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경제가 곧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하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르 새 시대를 향한 사람들의 열기와 희망이 한양을 활기 찬 도시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육의전기(六矣廛旗), 육의전박물관(복제), 20세기.

육의전은 시전 가운데 으뜸이 되는 여섯 곳으로, 대체로 선전(비단).면포전(무명과 은).면주전(명주솜으로 짠 옷감).저포전(모시).지전(종이).어물전을 말한다. 육의전에 걸었던 이 깃발들은 중요한 제사인 재신제.시전진수제.산신제 등에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탑골공원 토층에 남아 있는 원각사터(圓覺寺址)의 역사
서울의 중심부인 종로2가에는 조선시대 왕실사찰인 원각사가 있었다. 태조때 세웠던 흥복사(興福寺)의 옛 터에 세조10년(1464) 원각사라는 새이름으로 절을 세웠다. 그 뒤 왕실사찰로 위용을 자랑하다가 연산군 10년(1504)에 폐사되었다. 원각사에 있던 종은 숭례문으로 옮겼다가 종루로 다시 옮겨 달았으며, 탑은 위쪽 3층이 헐리운 채 폐사로 남았다가 1946년에 이르러 원형대로 복구되었다. 2001년 원각사가 있던 탑골공원의 재정비를 위해 탑골공원 성역화계획이 세워졌다. 이에 우리 박물관은 혹시 모를 매장문화재의 훼손을 막기 위해 시굴조사를 했다. 시굴조사에서 원각사터는 깊이 2m 아래에 잠들어 있음이 드러났고 많은 유물과 유구가 개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전시된 토층은 원각사터의 북동쪽에 해당하는 토층의 전사모형으로 지하 2m 아래의 자연층 위에 조선 전기.조선후기.일제강점기의 토층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탑골공원 원각사지 절터 토층 모형. 조선초 사찰이 조성된 이래 다양한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원각사지 출토유물
원각사지 시굴조사는 2001년 서울시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 시행에 따라, 문화재 확인 및 유적 보존방법 계획 수립을 위해 2개월 간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총 11종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다량의 자기와 기와류.토제마상.동전.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원각사지 출토 기와.

OLYMPUS DIGITAL CAMERA토제 마상.

OLYMPUS DIGITAL CAMERA원각사지 출토 도자기류.

벗들에게 가는길
벗을 찾아 백탑 아래 하나 둘 모인 이들은 서울 곳곳에서 많은 이야기와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모임은 수포교와 운종가처럼 활기 넘치는 도성의 한복판뿐 아니라 몽답정.읍청정처럼 풍광이 빼어난 곳, 이덕무의 청장서옥. 서상수의 관재. 이서구의 소완정 등 벗들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이들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한양 곳곳의 풍경과 자연을 묘사하는 시를 지었으며,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부터 그들이 가진 학문과 사상까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모임에서는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기도 했지만, 18세기 조선사회에 유입된 청 문물의 이로운 점을 조선사회에 적용하고자 이용후생의 학문을 치열하게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탑동연첩》<탑동계회>, 조선후기, 전 이방운.

1803년 훈련도감 대장 김조순이 장수들과 탑동 근처에서 모임을 가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화폭 중앙 상단에 원각사십층석탑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성시도, 1830년

도성 안의 주요 건출물을 비롯하여 도로망.하계망 등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다. 탑골 지역을 대사동(大寺洞)과 탑동(塔洞)으로 표기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백탑 아래의 벗
당시 경화사족은 북촌에 모여 살았습니다. 이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백탑 주변으로는 관직이 낮은 양반과 전문기술을 가진 중인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백탑파도 이곳을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유득공은 1757년 운수 아래 옛집에 있다가 곧 백탑이 있는 경행방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서구는 외가에서 살다가 1765년 백탑 아래 본가로 돌아왔습니다. 이덕무는 확교동에 살다가 1766년 백탑 동쪽의 관인방 대사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박지원은 서울 반송동 야동(서소문 바깥 풀무골)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768년 백탑 인근으로 이사한 후 다시 전의감동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박지원의 공작관(孔雀館)

박지원은 1768년 32세 때 백탑 근처로 집을 옮겨 당호를 공작관이라 지었습니다. 그는 1771년경부터 ‘연암’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그 이전에 일시적으로 공작관이라는 자호(自號)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홍대용을 비롯하여 이덕무, 박제가 등 백탑파가 드나들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벗으로 우정과 학문을 나누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덕무의 청장서옥

가난했던 이덕무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서상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덕무가 대사동에 살 때의 집이 워낙 옹색한 고옥이라 바깥채에 작은 서재를 짓고 싶어도 돈이 없어 엄두를 못 내자, 서상수는 자신의 고서를 팔아서 건축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지은 집이 바로 청장서옥(淸莊書屋)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상수의 관재(觀齋)

서상수는 시, 서, 화에 능쌔으며, 퉁소를 잘 부는 예인이었습니다. 또한 서얼 신분임에도 다른 벗들보다 조금 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도동서화(古董書畵)를 즐겼으며 그 방면에 감식안이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박지원은 필세설(筆洗說)에서 서상수에 대해 조선의 서화, 골동 감상을 하나의 학문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습니다. 그의 관재는 백탑파의 시회가 자주 열리던 곳으로, 여러 벗들의 집 가운데서 제일 인기가 좋았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그들이 꿈꾸던 세상
18세기에 조선이 내포하고 있던 모순은 다양했습니다. 빈번한 자연재해로 농촌은 황폐화되었고 여기에 삼정의 문란이 더해져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또한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한 계층분화 및 중간계층의 활발한 신분상승 운동은 기존의 폐쇄적인 지배구조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에 지배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 즉 실학을 연구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 청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하고 상공업 중심의 개혁을 도모한 북학파에는 백탑파의 핵심인물이었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주장한 북한은 각각 독자적인 분야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주자의 학설만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인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며 사회의 폐단을 보다 적극적으로 논했습니다. 또한 연행을 통해 청의 발전된 기술과 생활양식, 교통수단 등을 조선의 사회에 적용시켜 발전된 사회로 나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벽혁이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거나 사회변혁을 도출해 내는 데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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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전도(渾天全圖).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서양 천문학을 반영하여 수정한 천문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파초제시도(芭蕉題詩圖), 19세기, 이재관.

값비싼 종이 대신 파초잎에 글씨를 연습했다는 한 고사로 인해 문인들은 파초잎에 시 쓰는 일을 매우 아취 있게 여겼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선비들이 사랑했던 매화
맑은 곷, 은은한 향기와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매화는 가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선비를 상징합니다. 올곧은 정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매화는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시대에 선비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꽃이었으며, 시나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또한 사랑방에 놓였던 벼루, 필통, 필가, 연적, 담뱃감,, 책장 등에 매화나무 가지 또는 만개한 꽃송일를 장식하여 사랑방에 운치를 더하고 탈속한 선비의 이상향을 그렸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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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매저구도(絶梅著句圖), 18세기, 이방운

매화가지를 꺾어 화병에 꽂아 놓고 이를 감상하며 시구를 짓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다. 절제된 필선과 담채로 묘사되어 차분한 선비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매화형연적, 19세기, 매화를 양각으로 시문한 연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매화가 그려진 백자연적.

OLYMPUS DIGITAL CAMERA인장, 조선, 상단에 매화를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석재 인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매화절지문필통,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문양판, 조선, 옷과 종이 등에 무늬를 찍는 도구로, 매화를 크게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