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함께 조선후기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실학자들에게 정조의 죽음은 큰 영향을 미쳤다.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규장각은 그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실학자들 또한 중심부에서 크게 멀어졌다. 노론세력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어졌던 19세기에 북학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 추사 김정희나 최한기 등에 의해 명맥을 이어왔으며, 개화사상에 영향을 주기는 했으나 큰 학문적 성과나 세력화를 이루지는 못하고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1800년 백탑파의 행로 및 그 이후
19세기가 시작될 쯤 백탑파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조의 죽음은 이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모에 휘말려 귀양을 떠나거나, 몸담고 있던 기관이 해체되거나, 세도가 판치는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여생을 마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과 사상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습니다.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과 유본예, 박제가의 아들 박장암은 부친의 뒤를 이어 검서관으로 일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사상이었던 북학을 이어 받아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박제가의 제자 김정희, 실학과 개화의 교량이었던 최한기가 19세기의 새로운 지식인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이전 단계의 현실적인 개혁론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청에서 발달한 고증학의 영향으로, 학문을 통한 개혁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연구 대상과 관심이 대단히 광범위하였으며 그 깊이도 심화되었고, 초기 개화사상에 영향을 줍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도정치의 시작과 조선사회의 변화
1800년 정조가 즉위한 지 24해 째였습니다. 정조 재위 동안 조선의 국력은 신장되었고 문화는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주요 개혁 대상이었던 정치, 토지, 노비제 등 민감한 사안은 번번이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또한 자신의 친위 세력 양성소였던 규장각 관료마저 그에게 등 돌리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정조는 세자의 장인이자 사돈이었던 김조순을 불러 외척으로서의 세도를 담당해 줄것을 당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행해왔던 의리탕평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6월28일, 병석에 누운 지 보름 만에 49세의 나이로 정조가 사망했습니다. 누구보다 백성을 아꼈으며, 시대의 변화를 수용할 줄 알고, 세상의 소외된 이들에게 힘이 되었던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세상은 죽음과 함께 멈추었습니다. 변화를 꿈꾸던 조선 역시 희미하게 빛을 잃어 갔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날 유시(酉時)에 상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어느날 갑지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런바 거상도(居喪稻)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大喪)이 났다. – 『정조실록』 정조 24년 -
김정희는 박제가의 제자로,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경서 및 금석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진척시켰습니다. 또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비판하여 제주도에 유배되는 상황에서도 학문적 성숙과 추사체를 이루어 ‘추사학파’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학파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문하에는 허유, 오경석, 강위 등 중인계층과 신헌, 민규호 등 양반 사대부 계층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19세기 후반, 개화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 實事求是”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의 도에 있어 배치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 김정희, 『완당전집』 실사구시설 -
김정희의 제자 남병길이 간행한 김정희 편지 모읍집으로, 김정희가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16인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과천에 살던 김정희가 임자년에 황간(현 충북 영동군) 관아에 보낸 편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김정희가 과천에 거처할 때 영하스님에게 보낸 편지다. 영하스님은 초의스님과 함께 김정희와 긴밀히 교류하던 인물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최한기는 기(氣)철학 입장에서 서양과학기술을 수용하였으며, 실학을 확대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부민(富民)이 주도하는 상공업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여, 조선 말 중인과 성공업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한 조성의 민감한 반응을 비판하며, 문호개방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지식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나라의 제도나 풍속은 고금이 각각 다르고,
역산(曆算)과 물리(物理)는 후세로 올수록 더욱 밝아졌으니,
주공과 공자가 통달한 대도(大道)를 배우는 자는 주공과 공자가 남겨준 형적이나
고집스레 지키고 변통하자 않아야 되겠는가, 아니면 장차 주공과 공자가
통달한 대도를 본 받아서 지킬 것은 지키고, 변혁할 것은 변혁해아 하겠는가.
- 최한기, 『기축제의』-
일식과 월식, 절기차 등 천체 운행에 대해 각 절기마다 그림을 그리고 해설을 덧붙였다. 19세기 실학자의 천체관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각종 관개용 수차의 크기.모양.사용법.원리 등을 그림과 해설로 기록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최한기가 제작한 근대식 목판본 세계지도로, 김정희가 판각을 맡았다. 중화주의를 극복한 19세기의 사실적인 지도로평가받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규경은 조부인 이덕무의 학문을 이어받아 다양한 분야에서 넓은 지식을 드러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에서 오주(五洲)라는 말을 따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풍부한 지식이 보고인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썼습니다. 또한 동양의 전통사상과 서양의 실용적인 과학기술, 의학, 음양오행, 동식물, 풍속 등 다양한 방면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방대한 지식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살펴보며, 급변하고 있던 19세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이 역사.종교.천문.풍속 등 다양한 내용을 조선과 중국의 서적을 고증하여 간단히 저술한 책으로, 백과사전적 성격을 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오랜 관직생활을 하며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논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북학을 계승하는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근대로 향하고 있는 조선의 앞날을 위해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그의 제자들과 함께 조부의 문집인 『연암집』을 통해 새로운 문명과 세계를 논했습니다. 또한 자주적 개국으로 외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조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박규수가 평면의 원에 남.북반구의 별자리를 표시한 것으로, 별자리의 위치를 통해 시간과 계절을 측정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역대 중국의 뛰어난 인물들이 쓴 글을 폭넓게 발췌하고, 그것을 가지고 벗들과 날이 삼아 문장을 지어보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책이다.
박규수의 시문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조부 박지원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개화사상 및 활동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꿈은 어느덧 사라지고
정조는 소모적 당쟁을 끝내고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젊고 재능 있는 문신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와 장용영은 폐지되었으며, 규장각은 대폭 축소되어 사실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노론은 다시 정권의 핵심으로 자리잡았고, 정조의 측근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백탑파 역시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19세기가 되면 특정 소수가문에 그 힘이 집중되어 정국이 운영되는 ‘세도정치’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세도가문들은 군주라는 중세적 정치체제의 전통적 권위에서 존립했고, 제도개혁이나 민생의 안정에는 관심이 약했으며, 중첩된 혼인을 통해 협력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