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경주 감산사지, 창건내력이 적힌 불상이 발견된 통일신라 절터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불국사와 신라 원성왕릉(괘릉)에서 멀지 않은 마을 뒷편에 남아 있는 감산사(甘山寺) 옛 절터이다. 현재 절터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석조비로자불상을 모신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불전들이 들어서 있으며, 뒷편에 통일신라 때 조성된 삼층석탑과 주변 공터만이 이곳에 옛절터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광배에 감산사 창건내력이 적인 명문이 남아 있다. 명문에 따르면 719년(성덕왕 18)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출토된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은 현재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불상에 적힌 기록 외 감산사 내력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감산사 옛 절터>

주불전인 대적광전에는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비라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주불전인 대적광전>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179)에 중아찬 김지성이 자신의 장전을 희사하여 부모의 명복과 일족.국왕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현재 대적광전에 봉안된 석조 비로자나불의 머리부분과 앞면은 훼손이 심하고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 양쪽 다리는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지권인을 결하고 있으며, 넓고 건실하게 조각된 무릎과 더불어 어깨선도 각이 진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석불의 뒷면 왼쪽과 앞면 중앙하부의 띠 매듭과 뚜렷한 옷주름은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남산 삼릉계석조여래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의 옷주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석불은 얼굴이 파손되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불신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장한 풍모로 미루어보아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 중 초기에 조성되었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감산사, 2015년)


<대적광전에 모셔진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광배 뒷편에 불상을 조각한 내력을 적은 명문이 남아 있는데, 김지성이 어머니를 위해 이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은 김지성이 아버지를 위해 조성했다는 기록이 광배 뒷편에 적혀 있다.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광배 뒷편에 적힌 명문 탁본>

<대적광전 앞 사자상.>

<승려들이 수행하는 생활공간인 요사채>

<대적광전 뒷편 삼층석탑 주변>

불상 외 특별한 유물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감산사(甘山寺)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을 탑신을 올려 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기단과 탑신 몸돌에 기둥을 새겨놓은 것 외 특별한 장식을 하고 있지 않다. 2,3층 몸돌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각수법과 전체적인 비례 등이 양호한 편이다.

<감산사(甘山寺)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

<석등 하대석>

8세기를 대표하는 석등 부재 중 하나이다.

<석탑 앞에 놓인 석재들>

배례석 부재로 추정하여 이곳에 놓은 것으로 보인다.

<절터 안쪽편에 모아 놓은 석재들.>

남월산(南月山)
이 절은 서울의 동남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金堂)의 주불 미륵존상화광후기(彌勒尊像火光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개원(開元) 7년 기미(己未)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喰)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부인(觀肖里夫人)을 위하여 감산사(甘山寺) 한 채와 돌미륵 한 구를 정성껏 조성하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喰), 아우 양성(良誠) 소사(小舍),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와 또한 서형(庶兄) 급한(及漢) 일길찬(一吉喰), 일당(一幢) 살찬(薩喰), 총민(聰敏) 대사(大舍,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하여 함께 이 선한 일을 경영하였다. 돌아가신 초리(肖里)부인은 고인이 되어서, 동해(東海) 흔지(欣支)가에 [뼈를] 흩었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남월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