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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과학문화

조선왕실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고궁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유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가장 많은 분야가 천문.과학과 관련된 분야일 것이다. 조선시대 과학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의 기본이 되는 분야로 제왕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는 하늘을 뜻을 이해하고 대리함을 의미하는 천문과 기상관련 분야를 직접 관장했다. 이는 오늘날 날짜를 계산하는 주요 역법이 로마의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만든 그레고리력, 이슬람에서 사용하는 역법이 통치자나 종교지도자와 관련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의 역법이나 과학기술 등을 사용하다가 세종대에 조선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역법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에서는 중국의 것을 조선의 지리적 특징에 맞게 보정을 하였으며, 표준시계를 할 수 있는 물시계인 자격루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다. 조선중기 이후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형태의 해시계가 만들어졌는데, 고궁박물관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대부분의 해시계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 농업생산과 관련된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경제생활의 기본이 되는 도량형 표준이 되는 각종 유물들도 고궁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오목해시계(앙부일구, 보물, 조선, 18세기)

청동으로 만든 반구형의 해시계로 ‘솥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으로 앙부일구라고 불렀다.

새겨진 눈금

그림자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시반의 눈금과 12지신의 시간 표시가 있고, 시반과 수직으로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13개의 절후선(계절선)이 태양의 남중 고도에 따른 24기(12절기와 12중기)의 눈금을 표시하고 있어 절기를 측정한다.

앙부일구
‘하늘을 쳐다보는 솥모양의 해시계’라는 듯으로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져 사람의 통행이 많은 서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하였다. 앙부일구의 구조는 오목한 반구 안에 해 그림자를 받는 수영면과 그 위에 그린 시반, 해의 운동을 그림자로 만들어 주는 뾰족한 막대의 영침과 반구 위에 붙인 지평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움직임에 따라 태양의 빛이 영침의 뾰족한 끝 부분을 지나면서 그림자가 오목한 수영면에 형성된다. 그림자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시반의 눈금과 12지신의 시간 표시가 있고, 시반과 수직으로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13개의 절후선(계절선)이 태양의 남중 고도에 따른 24기(12절기와 12중기)의 눈금을 표시하고 있어 절기를 측정한다. 앙부일구는 그 날의 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나라 해가 뜨고 지는 시간까지 알 수 있다. 또한 지평환에는 24방위가 표시되어 있어서 1년 동안 해가 뜨고 지는 방향을 알 수 있는 다목적 기능의 해시계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간평해시계와 혼개 해시계(간평일구.혼개일구, 보물, 1785년),

 

간평일구 부분

앙부일구를 그대로 수평면 위에 투영한 것과 같은 모양으로 세로선은 시각을, 가로선은 절기를 나타낸다.

혼개일구 부분.

원은 절기를, 부채살 모양의 선은 시각을 나타낸다.

간평해시계와 혼개 해시계에 대한 설명

북극을 중심으로 둥글게 선을 새긴 해시계를 하나의 돌에 새긴 독특한 형태의 해시계이다. 위쪽의 간평일구는 앙부일구를 그대로 수평면 위에 투영한 것과 같은 모양으로 세로선은 시각을, 가로선은 절기를 나타낸다. 아래의 혼개일구의 원은 절기를, 부채살 모양의 선은 시각을 나타낸다. 하단부에는 한양의 북극고도인 37도 39분 15초를 새겨 놓았다. <출처:고궁박물관>

평면 해시계(신법지평일구, 보물, 명나라, 1636년),

장구모양의 선을 새겨 세로선은 시각, 가로선은 24절기를 나타내고 있다.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중국 명나라에서 제작한 신법지평일구이다. 장구모양의 선을 새겨 세로선은 시각, 가로선은 24절기를 나타내고 있으며, 표준 위도는 북경의 북위 39도 54분으로 계산되어 있다. ‘신법지평일구’라는 명문 외에도 제작년대와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평면해시계에 대한 설명

평면해시계(신법지평일구, 보물, 조선, 1713~1730년),

 평면해시계에 대한 설명. 세로선은 시각, 가로선은 24절기를 나타낸다.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은 명나라의 신법지평일구를 토대로 조선의 관상감에서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게 제작한 해시계이다. 세로선은 시각, 가로선은 24절기를 나타낸다. 여기에 삼각형의 영표를 세우면 그림자의 빗면이 시간을 가리키고, 그림자 중간의 홈이 절기를 나타낸다. <출처:고궁박물관>

평면해시계(지평일구, 조선, 19세기),

평면해시계에 대한 설명

서양 해시계의 영향을 받아 1881년(고종18)에 강윤이 만든 해시계이다. 평면 위에 그려진 반원에 묘시(오전 5~7시)부터 유시(오후5~7시)까지 낮 동안의 시각을 눈금으로 새기고, 삼각형의 영표를 세웠다. 영표의 그림자 끝이 가리키는 점으로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영표 남쪽에는 24방위를 나타낸 둥근 홈이 있고, 북쪽에는 한양의 북극고도인 37도39분15초를 새겨 놓았다. <출처:고궁박물관>

로마신전(폼페이)의 해시계와 중국의 해시계(북경 국자감).

로마는 오목해시계, 중국은 평면해시계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해시계
조선시대에 국왕은 하늘을 관측하여 백성들에게 시간과 절기를 알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천문 관측과 더불어 시간과 절기를 알려 주는 일은 서운관(관상감)의 매우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시간을 측정하는 관측기구로는 해시계, 물시계, 별시계 등이 있었다. 그 중에 해시계는 영침 막대의 그림자의 이동으로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태양의 궤도를 투영한 평면 시반에는 절기선과 시각선이 그려져 있어 하루 동안 매 시간 그림자의 위치와 길이가 바뀌고, 계절에 따라 태양 남중고도의 변화로 그림자의 위치와 길이가 바뀌는 것을 이용하여 시각과 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보통의 해시계는 평평한 평면형 해시계이나 앙부일구처럼 오목형 해시계도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재현품)

세종대에 장영실이 고안한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시계을 물을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계장치가 상당히 정밀하고 복잡하여 중종대 이후 고장난 것을 복구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위에서 본 모습

물시계는 누각 위에 물을 공급하는 3단의 파수호(왼쪽 상단)를 올려놓고 중간에 2개의 수수호(가운데), 자동시보장치를 동작하기 위한 각종 기계장치(오른쪽 하단), 기계장치에 의해 징,북,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창경궁 자격루 누기(국보)

 현존하는 자격루는 1536년(중종31)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른 물을 받는 수수호와 2단의 파수호가 남아 있다. 중종대의 물시계는 2단의 파수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이 자격루는 창경궁 명전전 뒤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하며, 원래의 돌받침대는 명전전 뒤에 남아 있다.

자격루의 시간 알림 장치 내부 구조(모형)

자격루의 복원 제작 과정에서 작동을 모의 시험하기 위해 만들었던 시보장치이다. 시보장치는 하루12시간과 밤 시간인 5경을 시각과 청각으로 알리는 장치이다. 물시계 쪽의 잣대 위에서 떨어진 작은 구슬이 상자 내부로 굴러 들어가 상자 안의 큰 구슬을 밀쳐 떨어뜨리고, 이 큰 구슬이 움직이면서 상자 위쪽의 인형이 종, 북, 징을 울리는 구조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시보장치 내부

시각을 나타내는 12지신 인형

물시계에 물을 공급하는 파수호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지. 인형이 북.종.징을 울리는 형태이다.

자격루가 울리는 시각
자격루의 시간을 알리는 장치는 하루 동안 2시간에 한번씩 시각을 알리는 종과, 밤 동안 시각을 알리는 북과 징으로 구성됩니다. 옛날에는 하루를 자시(밤11시~새벽1시)로 시작하여 해시(밤9시~11시)로 끝나는 시간 체계로 구분하였고 매시마다 자격루의 종을 울렸습니다. 야간에는 해지는 시각부터 해뜨는 시각(하지 때 19시48분~03시52분경)까지를 하루 밤으로 설정한 후 하루 밤을 다섯 등분하여 이를 ‘경’이라 부르고 북으로 알렸으며 1경을 다시 다섯 등분하여 ‘점’이라 부르고 징으로 알렸습니다. 밤의 길이는 게절에 따라 변화하므로 경과 점의 시각 역시 달라졌습니다. 지금 자격루의 시각은 사시(오전9시~11시)부터 시작하여 유시(오후5시~7시)까지로 맞추어 놓았고, 밤에만 울렸던 북과 징을 관람객들이 들을 수 있게 하지를 기준으로 삼아 14시간을 앞당겨 놓았습니다. 약600년 전에 제작된 물의 힘으로 움직이는 시계를 복원한 것이므로, 현대의 시계와 비교하여 1~3분 오차가 발생한다. <출처:고궁박물관>

중국 북경에서 시간을 알려주던 고루에 설치되어 있는 자동 물시계인 비루(碑漏, Beilou).

우리나라의 자격루에 비해서 웅장한 면은 없지만, 삼단의 파수호와 시간츨 측정하는 자가 설치된 수수호, 시보를 작동하는 기계장치와 소리를 내는 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자동 물시계, 자격루
조선시대 왕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각과 절기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제왕은 백성들의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시각제도는 권위와 질서의 상징이었고 통치의 수단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이용하던 물시계는 조선 태종대에 시각 알림 장치를 자동화하여 ‘스스로 치는 시계’라는 뜻으로 자격루가 제작되었다. 세종 임금의 명으로 1434년(세종16) 장영실이 완성하여 경회루 남쪽 보루각이라는 전각에 설치하였다. 자격루의 시각을 알려주는 인형이 치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듣고, 이 신호를 광화문을 거쳐 종류에 전달하여 북과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렸다. 이에 따라 인정(통행금지 밤 시각)과 파루(통금해제 새벽시각)에 궁궐의 문과 한양의 도성문이 열리고 닫혔다. 낮에는 오정(낮12시)을 알려 주고, 밤에는 계절에 따라 밤의 길이가 변하게 되므로 계절마다 다르게 1경에서 5경까지의 밤 시간을 알려줌으로써 당시 한양의 사람들의 생활리듬을 편리하게 하는 표준시계가 되었다. 세종대의 자격루는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1536년(중종31)에 다시 만들어졌는데 그 일부인 물항아리(파수호, 수수호)가 현재 덕수궁에 남아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측우대(1782년, 보물),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네 측면에는 가뭄이 극심해지자 정조임금이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대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 창덕궁에 두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황동 측우기는 보물561호 금영측우기를 복원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측우대에 쓰인 기념글

“측우기는 세종24년(1442)에 시작되었다. 구리로 만들고 높이가 1차5치이며 지름이 7치이다. 서운관과 각 도의 고을에 두어 비올 때마다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였다. 선왕이신 영조 46년(1770)에 옛날 제도를 본떠서 창덕궁, 경희궁과 팔도와 한성부, 개성부에 만들어 두었다. …. 정조6년(1782)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가물어서 임금께서 예복을 갖추고 저녁이 지나도록 찬 곳에서 제사를 올리시고, 날이 샌 뒤에 옥문 밖에 대가를 머무르고 경한 범죄자를 모두 석방하였다. 이에 도성 안 선비와 부인들이 우러러 보고 감격해 하였다. 해가 지기도 전에 큰 비가 밤까지 내렸으니 우리 성상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 비의 양이 미흡하다 여기셔 내각에 분부하여 측우기를 창덕궁 이문원 뜰에 설치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이내 내리는 비에 흡족해 하시고 신에게 이 글을 쓰라 하시니 그 기쁨을 기념한 것이다. ….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들의 걱정과 기쁨이 얽혀 있으니 신 등이 감히 공손하게 지키고 삼가 기다리지 않으랴…” 심염조 지음

측우기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해마다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를 지내고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의 중요성을 알렸다. 한 해의 풍작과 흉작을 좌우하는 비의 양을 관리하는 것 또한 왕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세종은 1441년(세종23) 강우량을 관측하는 ‘측우기’의 발명을 지시하고 서운관(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에 설치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이탈리아의 과학자 카스텔리가 1639년에 발명한 강우량 측정기보다 200년 정도 앞선 것으로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다. 돌로 만든 측우대 위에 철제 원통으로 만든 측우기를 올려 놓고 비가 온 뒤에 그 속에 고인 빗물에 주척을 꽂아 물의 깊이를 읽었는데, 눈금을 푼(分,약2mm) 단위까지 재어 보고 하도록 하였다. 양란 이후 과학 기물과 기록들이 소실되어 측우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1770년(영조46)에 과거 세종 대의 제도를 본 뜬 청동 측우기를 만들고 개량된 규격을 택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출처;고궁박물관>

놋쇠자(유척, 조선), 조선시대에는 악애, 측량기구, 옷감 등 쓰임새에 따라 다른 자를 사용하였다. 놋쇠로 만든 표준 자이다. (포백척, 황종척, 사각기준척, 영조척, 주척)

천칭저울, 조선

저울추(칠전, 일량, 이량, 십량, 이십량, 삼십량, 오십량)

조선의 도량형제도
도량형은 길이.부피.무게를 재는 수단 또는 단위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사회경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제도를 제정하여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량형의 통일은 필수적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도량형 제도의 정비와 시행은 유교의 정치이념과 관련하여 예악 정치의 표상으로 강조되었다. 유교경전에서는 왕이 정치를 행함에 덕행으로써 교화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하지만 정사를 통솔하는 길은 도량형의 통일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한 세금 수취 제도의 확립에 도량형의 통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태종대에서 세종대에 걸쳐 정비된 도량형 제도는 이후 그대로 『경국대전』「공전」도량형조에 규정되어 법제화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경혈을 나타낸 청동 인체상(조선),

청동으로 만든 인체상에 전신에 흐르는 경혈을 선으로 새기고, 선 위에 총 354개의 경혈을 표시하였다. 궁중의 내의원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약을 가는 기구(약연, 조선)

약장(조선)

편주의학입문내집(조선),

내의원에서 중국 명나라 이천이 지은 의학입문서에 주석을 달아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의학서이다.

동의보감(조선, 허준지음),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서이다. 의학 서적으로는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은 16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 기술을 자세하게 다뤄 의료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조선시대 의학을 발달
조선의 의학은 고려의 의학과 제도를 계승하고 보완해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향약을 연구하고, 자기 관찰과 실험에 의해 간행된 의석가 모두 90여종이 넘는다. 세종대 출간된 『향약집성방』과『의방유치』는 우리 풍토와 체질에 맞는 약재와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고, 선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역대 고금의 한의방의 정수를 채택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일본과 청에 번각되어 우리의 수준 높은 의학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 의서이다. 또 고종대에 이제마는 사람의 체질을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식이요법과 감정을 다스려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사상의학을 발전시켰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의 과학문화
조선시대에 과학은 새롭게 창건된 국가의 위상을 정립하고 통치를 견고히 하는 제왕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조선초부터 각 방면의 과학과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여러가지 저술과 발명이 이루어졌다. 역대 왕들은 민생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기술 연구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여러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어 농업.천문.의학.인쇄.무기 제조 등의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농업은 나라 경제의 근본이었으므로 조선 풍토에 맞는 농사 기술의 개발을 위해 천문.기상.역법.측량에 대한 연구에 힘써 각종 기구가 발명.제작되었다. 의약분야에서는 우리나라 풍토에 알맞는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개발하고 이를 집대성한 각종 전문 서적들이 발간되었다. 또한 국방력 강화를 위한 무기 제조 기술도 크게 혁신하여 화포와 화차 등이 만들어졌다. 한편 활발해진 편찬 사업으로 활자와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러 분야의 학문과 지식의 보급이 촉진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