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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무대왕릉(사적), 대왕암이라 불리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능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동해안에서 200 m 떨어진 곳에 있는 ‘대왕암’으로 불리는 문무대왕 수중릉이다. 대왕암은 5천만년 전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된 자연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능이다. 내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으며, 가운데에는 길이 3.7 m의 거북모양 바위가 수면 아래에 놓여 있다. 실제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내부에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남아 있고, 관련 사실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어 이곳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으며, 수중릉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인 이견대(利見臺)에서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한다.

<경주 문무대왕릉(사적)>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은 백제를 정벌한 태종 무열왕에 이어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며, 당의 세력을 축출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은 자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동해에 묻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 앞 큰 바위에 장례를 치르면서 대왕암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져 있던 문무대왕릉비 조각에는 화장하여 바다에 뿌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낭산 북쪽 배반동 언덕에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져 있는 능지탑이 남아있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 661년 (음) )
문무왕(文武王)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막내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여동생이다. ~ 생략 ~ 법민은 외모가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 영휘(永徽) 초에 당나라에 갔을 때 고종(高宗)이 태부경(太府卿)의 벼슬을 주었다. 태종(太宗) 원년(654)에 파진찬으로써 병부령(兵部令)이 되었고, 얼마 뒤 태자(太子)에 봉해졌다. 현경(顯慶) 5년(660)에 태종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022년)

동해 먼바다에서 몰려오는 거센 파도와 싸우고 있는 조그만 바위섬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릉 (사적)이다. 문무왕이 죽은 후 불교식으로 화장을 한 후 유골을 모신 곳이라 전해진다. 대왕암까지 직접 가 볼수는 없고 해안에서 물새들이 앉아 있는 모습과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문무대왕릉 내부.>

내부에는 인공적으로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으로 수로를 만들어 놓고 있는데, 사리를 모신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수면 아래에 거북모양의 바위돌이 보이는데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인공적인 시설을 만든 것은 아니고 유골을 뿌린 장소로 추정하고 있다.

< ‘대왕암’이라 불리는 문무대왕릉(사적)>

대왕암으로 불리는 문무대왕릉은 약 5천만년전에 형성된 자연암석이다. 주위의 솟아 있는 작은 바위들은 대왕암을 호위하는 호석으로 여겨진다

<2009년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자연적 특징
문무대왕릉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수중릉이며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문무대왕릉을 구성하는 암석은 약 5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화강암이며 암석의 표면에서는 약 3000만 년 전의 대규모 지진으로 생긴 북동-남서방향의 절리가 관찰된다. 문무대왕릉 인근에서는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해 지층이 깎여 만들어진 단구애가 있고 해안을 구성하는 퇴적물의 분급을 보면 내륙에서 바다쪽으로 갈수록 모래에서 굵은 자갈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안의 남쪽으로 내려가면 문무대왕릉과 같이 생성된 같은 화강암을 볼 수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대왕암이 있는 경주 봉길리 해안>

<봉길리 해안과 대왕암>

<봉길리 해안에서 보이는 대왕암>

<봉길리 해안 북쪽 언덕에 위치한 이견대>

<이견대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왕암>

경주 문무대왕릉, 사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쪽에 보이는 대왕암(大王巖)은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완성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재위 661~681년)의 바다무덤이다. 대왕암은 바닷가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길이 약 20m의 바위섬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조그마한 수중 못이 있고 그안에 길이 3.6m, 너비 2.9m, 두께 0.9m 크기의 화강암이 놓여 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가.”라는 대왕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 장례법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대왕암은 가까이 이견대(利見臺), 감은사(感恩寺)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문무대왕의 거룩한 호국정신이 깃들인 곳으로 이런 형태의 능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한편 여기를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곳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봉길리 해안은 토함산에서 발원한 대종천이 동해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다. 동해안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석호가 형성되어 있다.

<이견대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봉길리 해안과 대왕암>

대종천은 경포호수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작은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세원 감은사는 이 호숫가 언덕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모래톱 안쪽 대종천>

<감은사에서 내려다 본 모습>

신문왕이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세웠다고 한다. 불국사를 지나 토함산 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자동차로 한참을 달려 가다보면  ‘두개의 탑’이 우뚝 서 있는 감은사지(사적)를 볼 수 있다.

<감은사지(사적)>

문무왕이 죽다 ( 681년 07월01일(음) )
가을 7월 1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유언으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다. 세속에 전하기를, 왕이 변해 용이 되었다고 하므로 그 바위를 가리켜서 대왕석(大王石)이라고 한다. 남긴 조서는 다음과 같다. “과인은 나라의 운(運)이 어지럽고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생략 ~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것은 즐겨 행할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10일 뒤에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 상복의 가볍고 무거움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장례를 치르는 제도를 힘써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 생략 ~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022년)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장소 중 하나인 경주 낭산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능지탑지이다.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능지탑이라 불리웠던 구조물의 일부가 남아 있다. 원래 이 탑이 있던 자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을 화장했던 장소라고 한다

<경주 능지탑지>

사천왕사는 경주에서 7곳의 신선한 숲 중 하나인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는 사천왕사(사적) 절터>

<문무왕 비, 경주 동부동 출토, 681~682년>

문무왕 비는 681년 혹은 682년에 사천왕사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졌던 문무왕 비를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이던 홍양호가 재발견하고 경주 관아로 옮겼습니다. 이 때의 탑본이 ‘해동금석원’이라는 청나라 책에 실렸습니다. 이 비석은 또 다시 행방을 알 수 없다가, 1961년에 여기 전시된 비편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른 한 편이 2009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비문의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와 신라 김씨의 내력 등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국학소경 김__이 썼으며, 구양순체의 해서는 단아하고 활달한 느낌을 주는데 대사 한눌유가 썼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년
  5.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