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동.서삼층석탑(국보)이다. 문무왕이 세운 사천왕사 목탑과 함께 처음으로 2개의 탑을 세운 쌍탑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물인 목탑을 간략하게 구성한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의 시초가 되는 석탑이다. 후대의 석탑에 비해 상당히 크고 웅장하여 ‘두개의 탑’이란 의미가 저절로 느껴진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삼층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2개의 탑은 같은 규모와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는데 높이 13.4 m로 현존하는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다. 후대의 석탑과는 달리 각부분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조건축물처럼 여러개의 석재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2개의 탑 모두 해체.수리과정에서 사리엄장구가 발견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의 목탑과 함께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적용된 쌍탑형식의 가람배치이다. ’두개의 탑’이란 느낌이 저절로 드는 모습이다. 백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목탑의 형태를 모방해서 간략하게 구현하였다. 후대의 석탑과는 달리 여러개의 석재를 조립해서 만들었다. 전체적이 비례에서 주는 조형미 또한 우수한 편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위층 모두 12장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서리와 각면에 기둥이 표현되어 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4~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3층 몸돌만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다. 3층 몸돌에서 사리엄장구가 발견되었다. 지붕돌 또한 여러개의 판석으로 조립되어 있다. 상류부에는 쇠로 만든 찰주가 남아 있다.
동삼층석탑 3층 몸돌에서 발견된 사리엄장구(보물)는 1996년 해체.수리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가로 활동한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천왕상이 있는 외함,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기와 수정사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동삼층석탑과 같은 규모나 형태를 하고 있다.
감은사 서삼층석탑 사리엄장구(보물)는 1959년 해체.복원할 때 3층 몸돌에서 발견되었다.
감은사(感恩寺)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왜(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우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신문왕때 완공되었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부근 동해바다에 그의 능이 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명복을 빌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자리잡게 되었다. 감은사지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절터에 2기의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感恩寺)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이 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신문왕 2년(682)에 완성한 절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를 지낸 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게끔 금당 밑을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을 만들었다. 금당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장대하며, 제작연대도 확실하다.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세우고 처마밑은 층단을 이루었으며,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1959~60년에 서탑을, 1996년에 동탑을 해체 복원했다. 서탑과 동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그 속에 사리가 들어있는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 등이 발견되어 통일신라시대 탑속에 사리장치 연구의 열쇠가 되고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