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선덕여왕릉(사적), 신라 27대 선덕여왕

경주시 보문동 낭산 남쪽 정상부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사적)이다. 둘레 74m, 높이 6.8m의 둥근 흙으로 봉분을 쌓은 형태로 아랫부분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석이 있다. 삼국통일 이전의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석물을 두고 있지 않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기는 하나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릉이 아래에는 문무왕이 세운 대표적인 호국 사찰인 사천왕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높이는 108m의 높지 않는 산으로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렸다.

선덕여왕은 신라 27대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TV드라마를 통해서 잘 알려진대로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키고 구휼사업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자장법사를 중국에 보내 불법을 들여여고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인 첨성대를 건립하였고, 분황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들을 창건하고 황룡사 목탑을 세우는 등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를 김유신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당나라와는 외교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낭산 남쪽 정상부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다 ( 632년 01월(음) ),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마야부인(摩耶夫人)註 003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 임금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의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는데,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비록 빼어나게 아름다우나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라고 하자 〔덕만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꽃이 매우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을 심으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는데,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선덕왕이 죽다 ( 647년 01월08일(음) ), 〔16년(647) 1월〕 8일에 왕이 돌아가셨다.시호(諡號)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선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능은 직경 24m의 흙으로 쌓은 원형봉토분으로 삼국시대 신라 고분의 무덤양식이 남아 있다. 내부는 발굴.조사가 없었기때문에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돌방무덤 형태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왕릉 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위치와 일치하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주위 둘레석>

봉분 주위에는 둘레석을 쌓아 봉분을 보호하고 있다. 후대에는 십이지신상 등을 새긴 석재를 이용하여 둘레석을 쌓았는데, 이런 형태의 둘레석은 삼국통일 이전에 조성된 왕릉에서 볼 수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앞에 놓여진 상석. 후대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낭산 정상부 선덕여왕릉으로 오르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사천왕사 뒷편 선덕여왕릉을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선덕여왕릉 앞 소나무숲>

OLYMPUS DIGITAL CAMERA<낭산 남쪽에 위치한 사천왕사 절터>

사천왕사는 경주에서 7곳의 신선한 숲 중 하나인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천왕사 절터와 선덕여왕릉 사이를 지나는 철도>

OLYMPUS DIGITAL CAMERA<사천왕사 절터에서 본 낭산>

신라 선덕여왕릉, 사적 182호, 경주시 보문동
이 능은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에는 “내가 아무 날에 죽을 것이나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를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30여년이 지난 문무대왕 19년(679)에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문화재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