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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불상

신라가 불교를 받아 들인 이후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사찰에는 사리를 모신 불탑과 함께 부처를 표현한 불상을 모신 금당이 세웠졌다. 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삼국시대 황룡사 금당에 모셔진 신라삼보 중 하나였던 장륜존상을 들 수 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하는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2점이 남아 있는 석가모니가가 고민하는 모습을 표현한 반가사유상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굴암에 모셔진 본존불을 들 수 있다. 중국을 통해 서역에서 전해진 신라의 불상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아시아 삼국의 반가사유상>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은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와 외형이 거의 비슷하다.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의 상을 말합니다. 이 자세는 훗날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하기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6~7세기를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불교에서 불상이나 보살상들은 대부분 정면을 바라보고 앉거나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예배 대상으로서의 경건함과 위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성스럽고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진 상들은 참배자들에게 심리적인 거리감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성불하기 이전에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을 자연스러운 자세로 표현한 반가사유상은 인갅거인 친근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유하는 행위는 보는 이들에게 비슷한 경험을 연상시켜 공감하게 하고 동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어떤 경우는 고뇌를 뛰어넘어 인간과 세상을 관조하거나 명상에 빠진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반가사유상이 시대와 종교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이 아닐까요?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에 이른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삼산반가사유상’이라고도 부른다. 반가사유상은 원래는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을 반영하여 미륵불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삼존불 형태로 많이 표현되고 있으나, 삼국시대에는 단독불상으로 주로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눈.코.입등이 표현이 뛰어나 조각품으로서 높은 예술성을 평가받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정화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백제 또는 신라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고류지에 남아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그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머리에 해와 달이 장식되어 있는 ‘일월신보관’을 쓰고 있다. 이런 양식은 사산조페르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문화로 볼 수 있다. 얼굴과 신체의 표현, 신체 각부분의 비율 등에서 다른 반가사유상(국보)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세련된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은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좁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하지만, 대체로 보살상.신장상 등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불상이라 일컫는다. 원래 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탑이나 보리시, 금강보좌 등이 중심이었으나 이집트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방과 인도의 마투라에서 처음 만들어져 대승불교의 전파경로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초기까지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었으나 후대에 들어서면서 탑보다는 불상을 보신 금당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다.

<석조약사불좌상, 신라 8세기말~9세기, 경주 낭산>

이 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존명이 약사불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약사불은 중생의 몸의 질병과 무지의 병을 고쳐준다고 하여 대의왕불(大醫王佛)로도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재앙도 물리쳐준다고도 믿어져 신라 통일기에는 약사불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 약사불좌상의 오른손은 석굴암 본존불처럼 땅을 짚은 항마촉지인의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항마촉지인을 취한 약사불좌상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신라 통일기 약사불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신라 통일기의 소형 금동불은 기록이 없어 대부분 정확한 존명과 용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하체의 옷주름 형식을 기준으로 크게 Y자형과 U자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대좌와 불신을 따로 주조한 뒤, 발바닥의 촉을 대좌 윗면의 구멍에 꽂아 고정하고, 등 뒤에 촉을 내어 광배를 부착한 상이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상은 불신과 대좌를 함께 주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금동불상(9세기), 금동불상(9세기, 감은사터), 금동불상(9세기, 성동동 전랑지), 금동불(8세기, 경남 김해), 금동불(8세기, 경남 하동)>

<금동약사불(9세기, 서면 방내리), 금동약사불(8세기, 경북 청도)>


<금동비로자나불, 9세기>

비로자나불은 햇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부처로서, 신라 후기에 유행하였습니다. 신라의 비로자나불상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한쪽손으로 반대편 손의 검지를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의 자세를 취하되, 중국이나 일본 밀교의 보살 형상과는 달리, 여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약사불, 8세기>

신라 후기에는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듯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 신앙이 유행하여 약사불상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약사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다른 불상들과 쉽게 구별됩니다. 신라 통일기의 금동약사불은 대부분 서 있는 입상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약사불, 보물, 8세기>


<금동불상, 8세기, 경북 금릉>

<금동반가사유상 머래(7세기, 황룡사터), 금동반가사유상(7세기, 성건동)>

금동반가사유상 머리, 7세기, 황룡사터
머리에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같은 삼산관(三山冠)을 썼습니다. 오른쪽 뺨 아랫부분에 손가락을 댄 자국이 있어 반가사유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신라 불상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7세기, 성건동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같은 계통으로서, 신라 지역에서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유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보살상(7세기)과 금동천인상(6~7세기)>

금동천인상, 6~7세기
몸에 걸친 천의(天衣)는 앞쪽에서 X자 형으로 교차한 뒤 머리 위로 휘날려 마치 광배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착의 방식과 호리호리한 생김새로 보아 제작시기는 6~7세기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다.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서탑)>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다.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서탑)>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 신라 9세기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에 있었습니다. 본래 5층 동서 쌍탑의 1층 몸돌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온전한 모습의 탑신석이 동탑, 한쪽면이 결실된 탑신석은 서탑의 일부였습니다. 두탑신석 네면에 부조된 불상의 조각 수법과 자세는 약간씩 다르나, 각각에서 동쪽면으로 비정되는 약사불은 왼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약그릇으로 보이는 둥근 물건을 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 있는 자세의 사면불상은 경주 지역 석탑에서만 보이는 특징으로 주목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국사와 석굴암 – 불국토의 이상향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에 위치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불교문화재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재상을 지냈던 김대성의 발원으로 751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석불사)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지었다고 하니, 이 두절은 그의 깊은 신앙심뿐만 아니라 지극한 효성의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국사는 평지에 세워진 여러 건물의 집합체이고, 석굴암은 산 중턱에 지어진 단일한 인공의 석굴사원이란 점에서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부처의 나라’를 뜻하는 불국사는 여러 부처의 세계가 드넓게 펼쳐진 것과 같습니다. 반면, 석굴암은 우주의 질서를 하나의 불국토로 응집한 작은 결정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조적인 성격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의 원대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함께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완성으로 비로소 신라땅에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경주 불국사>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774년에 완공하였다.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삼국시대 이래 평지에 세워진 기존 사찰의 가람배치와는 달리 경사진 지형에 인공으로 축대를 쌓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람배치를 계승함과 동시에 아래쪽에 아마타불을 모신 극락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 등 후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전 중심의 가람배치도 함께 공존하는 독창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가람배치는 후대에 세워진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국사만의 특징이다.

<석굴암 석불(국보)>

지금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2차례에 걸치 석굴암 보수공사의 결과로 석굴암 본존불은 유리창안에 있고, 그 앞에는 보호각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석굴암 범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대 제작

범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어졌던 최고의 천신이었습니다. 이 신은 불교가 성립된 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불교에 수용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보호하는 역할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범천상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상입니다. 석굴암 범천상은 둥근 주실 입구의 좌우에 제석천상과 대칭되게 서 있습니다. 몸에는 승려와 같은 가사를 입은 뒤 장신구를 착용하였습니다. 왼손을 내려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쥐었고, 오른팔은 굽혀 먼지떨이인 불자를 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입니다. 이 상은 작품의 형상과 완성도 면에서 8세기 동아시아 범천상의 기준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석굴암 제석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제석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敎)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신앙되었습니다. 벼락을 무기로 사용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 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신도 범천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립된 뒤 불교에 수용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석천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桓因) 천왕과 동일시되어 우리나라에서 중요시 되었습니다. 석굴암 제석천상은 신들의 제왕답게 몸에는 임금처럼 소매가 길고 화려한 도포식의 옷을 입었고, 왼손바닥 위에는 제석천의 무기인 벼락을 형상화한 금강저(金剛杵)를 올려 놓았습니다. 조각상임데도 불구하고 마치 회화를 보는 듯이 자연스러운 자세와 세부 표현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금동불두, 8세기, 경주 양북면>

<금동보살판불, 보물, 680년경, 월지>

<금동삼존판불, 680년경, 월지>

<금동보살판불, 680년경, 월지>

월지에서 출토된 2구의 삼존상과 8구의 보살좌상으로 이루어진 금동판불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하단에 돌출된 촉과 광배 테두리에 뚫린 구멍으로 보아 본래 불감(佛龕) 같은 곳에 부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존불의 경우,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 이와 같은 설법인(說法印) 즉 전법륜인(轉法輪印)의 손갖춤을 한 아미타불상이 널리 유행하였으므로 본존불은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라 통일기 불교 미술의 국제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679년(문무왕 19)에 태자가 동궁을 지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제작시기는 7세기 말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상과 영험
신라때 불상은 예배 대상으로서 신자와 상호 소통하며 교감하는 인격체처럼 신앙되었습니다. 예컨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생의(生義)라는 승려가 꿈을 꾸고 경주 남산에서 돌미륵을 파내어 삼화령에 모셨다거나, 693년(효소왕 2)에는 북쪽 오랑캐에 끌려갔던 화랑 부례랑이 부모가 백률사 관음상에 기도하자 즉각 귀환하였으며,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분황사의 천수관음상 벽화에 어머니가 빌자 눈 먼 딸이 눈을 떴다는 등 여러 종류의 영험담(靈驗談)이 전합니다. 또한 불상은 승려의 수행을 돕고 계율을 내려주는 역할로 등장하거나, 불교의식에 모셔져 사용되는 등 신이(神異)한 감응을 일으키는 주체로도 인식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이 불상을 대할 때 지녔던 이와 같은 태도나 사고방식은 현재 전하는 수많은 신라 불상들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팔부중이 새겨진 석탑 면석, 경주 남산 창림사터, 신라 9세기>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창림사터 주변에서 수습되었습니다. 신라 통일기 후기 석탑의 부조상으로 유행했던 팔부중 가운데 가루라(迦樓羅)를 새긴 상층기단 면석의 일부입니다. 몸에 갑옷을 걸치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구름 위에 유유히 앉아 있습니다. 가루가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속의 새로서 입이 새의 부리 모양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