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북구 무등산 북쪽 자락에 있는 충효동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윤제(1501~1572년)가 낙향하여 작은 정자인 환벽당을 짓고 자연을 벗삼아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지금은 그의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 형제들을 배출하여 정조로부터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충효동정려비각이 마을입구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많은 정자들을 세워놓고 자연을 즐겼다.
마을 앞에는 광주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넓은 광주호가 있고, 입구에는 수령이 수백년된 왕버드나무 3그루가 심어져 있다. 뒷동산에는 조선중기 문신 김윤제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인 환벽당과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취가정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다. 농지가 비교적 넓고 무등산계곡에서 흐르는 증암천의 수량이 풍부하여 양반들이 터를 잡고 살기에 적합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마을이다. 오랜 전통마을이기는 하지만, 정자 외 고택은 남아 있지 않은 편이다. 마을 입구 증암천을 거너는 다리를 기준으로 식영정과 소쇄원이 있는 동쪽은 담양군, 환벽당이 있는 서쪽은 광주광역시에 속한다.
광주 무등산 북쪽 자락에 발원하여 증암천 일대는 삶의 현장인 넓은 들판과 가까우면서도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계곡도 있어 정철로 대표되는 가사문학의 산실이 되었던 곳이다.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등 당시 양반들이 세웠던 정자와 정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의 바탕이 되었던 식영정 부근은 댐으로 막아 넓은 호수로 변하여 옛모습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담양 식영정에서 내려다 본 충효동마을과 광주호 수변 공원. 광주댐을 건설하면서 넓은 호수로 바뀌어, 송강 정철이 식영정에서 즐겼던 경치와는 다르지만 지금도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마을 입구에 심어진 왕버들(천연기념물 539호). 둘레 6m의 엄청나게 굵고 가지가 아름답게 뻗어나간 왕버드나무 3그루가 남아 있다. 원래는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드나무 5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충효동 왕버들, 광주시 북구 충효동
이 왕버들 세그루의 높이는 10m 내외, 둘레는 6m 정도이며 수령은 약400년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 마을에는 일송일매오류라 하여 소나무 한그루, 매화나무 한그루,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왕버들 세 그루만 남아 있다. 이 일대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 유서깊은 정자와 빼어난 풍광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출처:광주시청>
입구에 있는 2그루의 왕버드나무. 자연스럽게 가지가 뻗어나간 고목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각. 이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김덕령 형제를 배출하여 정조로부터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려비각이다.
충효동정려비각,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장공 김덕령과 형 덕홍, 아우 덕보, 부인 홍양이씨 등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788년(정조12) 왕명으로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 받고 이듬에 그 유래를 밝힌 이 비를 세웠다. 비각은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792년에 처음 세웠다. <출처: 광주시청>
글씨가 적혀 있는 현판. 정려비의 내력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작은 동산. 김윤제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환벽당이 자리잡고 있다.
환벽당 앞을 흐르는 증암천.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이다. 이곳에 김윤제가 정철을 처음 만났다고 전해지는 조어대와 용소가 있다.
지금은 호수로 바뀐 증암천. 건너편 언덕에 식영정이 자리잡고 있다.
뒷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환벽당(環壁堂, 명승 107호)이다. 조선중기 학자 김윤제가 경치가 빼어난 곳에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환벽당 안쪽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전했다가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작은 정자인 취가정이 있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