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관 창평면 소재지에 있는 삼지천마을이다. 옛 창평현 관아가 있던 읍치로 북쪽으로 창평천, 남쪽으로는 3개의 지천이 모인 삼천천이 흐르는 물이 풍족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읍치에는 관아에 근무하는 아전들이 터를 잡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마을은 김씨, 이씨, 고씨가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그 중 장흥고씨가 많이 거주하는데, 고재선가옥, 고정주가옥, 고재환가옥, 고재욱가옥 등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다른 가옥들도 대부분 양반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댐 부근 고읍리에 있었던 창평현 관아가 양반들의 세거지가 형성된 이후인 정조 때 이곳으로 옮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마을을 이루고 있던 고택들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마을 이루고 있던 옛 돌담들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최근에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삼지천마을이 가지고 있는 내력과 여러 특징들때문에 2007년에 슬로시티로 인정을 받아 자연친화적인 마을로 바뀌고 있다.
창평현은 전남 담양군 남쪽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함평, 남평과 함께 3평 고을이라 하였다. 남쪽과 동쪽으로 무등산을 중심으로 높고 깊은 산악지대로 막혀 있고, 북쪽으로 낮지만 담양과 경계를 이루는 산자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지금도 호남고속도로, 88고속도로, 담양.고창고속도라가 창평지역에서 만나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남 각지방을 연결해 주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조선시대에서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고장이다. 주변 산악지대에서 흘러내려오는 크고 작은 하천들로 수량이 풍부하여 관개시설이 충분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농사짓기가 편리하여 양반들이 선호했던 세거지로서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어 호남지역에서 양반들의 세거지가 특히 많은 고장이다. 창평현 일대를 흐르는 증암천, 창평천, 삼천천 등의 풍부한 수량과 넓은 들판에서 산출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반들의 풍류와 교류의 장이었던 소쇄원, 명옥헌, 식영정, 환벽당 등과 후학을 양성하는 학구당 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평슬로시티로 지정된 삼지천마을.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옛면사무소 앞에서 마을 남쪽을 연결해 주는 큰 길이다. 하천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자연석과 흙을 쌓아서 만든 돌담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길 한쪽편으로 하수도가 지나고 있다.
우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넓게 만들어졌으며, 옛한옥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은 곳도 있지만, 옛돌담의 상당부분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 돌담길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옛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비포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 중 한곳인 ‘고재환 가옥’으로 들어가는 길. 막다른 골목이지만 폭이 넓다.
’고정주 고택’. 이 지역 근대교육의 효식인 영학숙과 창평의숙이 모태가 되는 집으로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인촌 김성수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지금은 낡고 기와가 떯어져 나간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상당히 큰 규모의 저택이다.
하천에서 가져온 둥근돌과 흙을 이용해서 쌓은 담장. 시골마을을 걷는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담장이지만 기와를 얹은 돌담장으로 옛날에는 부유층이 살았던 마을이나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일부가 무너진 옛 돌담장. 담장 안쪽에는 원래 큰 저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농경지 옆으로 흐르는 수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수로로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마을 남쪽에 있는 큰 고택. 도시 한옥처럼 길을 향해 창문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한쪽편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2층 한옥.
농협을 비롯하여 각종 공공기관과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창평면소재지 큰 길.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