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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보물)과 양화당

창경궁 함인정 뒷편으로 침전건물인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이 남아 있다. 4동이 건물 모두 비슷한 규모의 건물로 국왕과 왕비, 대비들을 위한 처소로 지어진 건물이다. 동궐에서 국왕의 처소는 창덕궁이 중심이었기때문에 이 건물들은 국왕부부, 세자부부, 대비들이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넓은 마당에 큰 건물들만 남아 있는데, 원래는 각 건물들이 행각으로 둘러져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궐도와 현재의 건물배치를 비교해 보면 환경전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가 다른데, 이는 현재의 건물들이 대부분 19세기에 중건되었기때문이다. 국왕과 대비들의 처소 동쪽편으로는 궁궐에서 살았던 여러 후궁들의 처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여러 국왕들이 후궁들의 소생이었기때문에 많은 왕들이 창경궁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환경전>

경춘전과 환경전

창경궁 편전에 해당하는 문정전과 숭문당, 함인정 뒷편으로는 왕실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연조(燕朝)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대비를 비롯하여 왕실어른들을 위해 지은 창경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 등이 개최되었던 함인정 뒷편으로는 국왕과 왕비의 침전에 해당하는 환경전과 경춘전이 자리잡고 있다. 환경전은 국왕과 왕비의 처소로, 경춘전은 대비전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동궐의 중심은 창덕궁이었기때문에 실제로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환경전은 세자의 동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경춘전 또한 대비전이지만 세자빈의 처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1834년에 중건된 것으로 동궐도에 표현되어 있는 건물과는 다른 크기와 건물배치를 보이고 있다.

<동궐도에 표현된 경춘전과 환경전 영역>

함인정 뒷편으로 행각으로 둘러져 있는 남향건물인 국왕의 침전인 환경전과 왼쪽편에 서향을 하고 있는 대비전인 경춘전이 보인다. 현재의 건물들은 19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동궐도에 표현된 위치보다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두 건물 모두 행각과 담장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환경전>

창경궁에서 국왕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세워진 건물로 창경궁을 창건할 때 처음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대에 중건했고, 순조대에 화재로 소실한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경전은 국왕을 위한 공간으로 국왕이나 세자가 주로 이용하였다고한다.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승하했을 때 빈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환경전 주변은 행각으로 둘러져 있어서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환경전만이 남아 있다.

<처마와 공포>

<모서리 처마와 공포>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이익공 공포를 하고 있다. 궁궐 건물답게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창호와 문살>

건물내부에는 온돌은 없고 전부 우물마루로 깔았다고 하는데,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국왕이 외부인사를 접견하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양쪽에 서재나 침실 등으로 꾸몄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대청과 방을 구분하던 칸막이 벽이나 문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고 한다.

<추녀마루 잡상>

<뒤에서 본 모습>

통명전과 연결되는 뒷마당이 앞마당보다 높게 되어 있다. 뒷편 작은 툇마루에서 걸터 앉아 쉴 수 있다.

<경춘전>

창경궁의 내전으로 대비전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은 창경궁이 창건되었던 성종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에, 순조대에 화재로 불탄 것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궐도에서는 현재의 위치보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화계와 마당을 향하고 있었는데 중건을 하면서 위치와 방향이 바뀌었다. 경춘전에서는 정조와 헌종이 탄생하였다. 경춘전은 대비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자빈의 침전으로 사용하는 등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사용한 건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고 한다.

<처마와 공포>

현판은 현재의 건물을 중건한 순조가 쓴 글씨이다.

<대청마루>

가운데 3칸은 대비가 손님을 접견하는 집무 공간 성격을 갖는 넓은 대청마루를 하고 있으며, 앞쪽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기둥과 창호>

경춘전은 4면에 문을 달아 놓고 있으며, 띠창살을 하고 있다. 양쪽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경춘전 후원 마당>

화계에 나무를 심어두고 있으며,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이 있다.

경춘전과 환경전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이고, 환경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두 건물 모두 1834년에 다시 세웠고, 원래는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다. 경춘전은 왕비의 산실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내부에 ‘탄생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 경춘전 현판은 순종 임금의 솜씨이다. 환경전은 중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이며, 건물 뒤편 북쪽은 여러 대비들의 침전이 밀집해 있었으나 지금은 빈터로 남았다. <출처:문화재청>

통명전과 양화당

창경궁 안쪽 후원과 가까운 곳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통명전(보물)과 양화당은 창경궁의 핵심적인 건물로 통명전은 국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으로, 양화당은 대비가 거처하는 침전으로 지어진 건물다. 동궐도에서는 통명전은 그 터만 남아 있고 그 뒷편에 큰 건물과 행각이 있는데, 지금은 건물 뒷편은 언덕으로 바뀌었다. 19세기에 중건된 통명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큰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이익공계를 하고 있다. 창경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넓은 월대 위에 건물을 세웠으며, 건물 뒷편 일부를 제외하고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는 여러개의 방을 두고 있다. 통명전 서쪽에는 화강석으로 조성한 작은 연못과 정원을 두고 있다. 대비의 거처인 양화당은 앞면 6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로 좌.우엔 온돌방을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통명전(보물)과 양화당>

통명전은 국왕의 침전, 양화당은 대비의 처소이다. 현재의 건물들은 19세기 중건된 것으로 동궐도에서는 지금과 다른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창경궁은 통명전과 양화당을 후궁들을 비롯하여 궁궐에서 생활하던 많은 왕실가족들이 오랫동안 거처했던 공간이다.

<동궐도에 나타난 통명전 일대>

통명전은 월대와 주춧돌만 남아 있고 그 동쪽편으로 대비전과 후궁들의 처소를 비롯하여 많은 건물과 행각들이 있다. 통명전 뒷편 언덕에는 행각이 있는 독립된 공간이 있고, 창덕궁과 연결되는 통로로 사용되는언덕에는 장들을 보관하던 장독들이 모여 있는 장고가 있다.

<창경궁의 핵심건물인 통명전(보물)>

19세기에 중건된 건물로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국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이로 되어 있으며, 창덕궁 대조전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건물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이익공이며,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통명전 월대>

국왕이 거처하는 침전으로 지어진 건물로 삼도의 형식에 맞게 월대에 오르는 3개의 계단을 두고 있다.

<추녀마루 잡상>

<대청마루>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앞.뒤에 툇마루를 두어 잠깐 앉아서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침전은 국왕과 왕비가 같이 사용하는 건물이지만, 대청마루는 왕비가 손님을 접견하는 등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천장>

통명전 현판은 이 건물을 중건한 순조가 직접쓴 글씨라고 한다. 천장은 여러가지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우물반자 천장을 하고 있다.

<통명전 내부 온돌방>

미닫이문으로 여러개의 방으로 분리해 놓고 있다. 통로에 해당하는 바깥쪽에는 국왕이나 왕비를 수행하는 상궁이나 내시가 대기하던 공간으로 생각된다.

<연못>

건물 서쪽편에는 돌다리가 있는 작은 연못을 조성해 놓고 있다. 작은 우물에서 솟아오른 물로 연못을 채우고 있다. 창경궁 통명전 일대에는 전각 주변에 크고 작은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물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은 샘>

연못 안쪽에는 돌로 만들어 놓은 작은 샘이 있고, 샘에서 솟아난 물이 연못으로 흘러든다. 연못 주위에 돌난간과 돌기둥으로 장식하고 있으며, 연못 안에는 섬처럼 수석을 배치하고 있다.

<돌다리와 연꽃모양의 석조물>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계단>

원래부터 있었던 길은 아니고, 동궐도를 살펴보면 장독대들을 보관하던 장고(醬庫)가 있었다.

<행각 건물터>

<통명전 후원>

다른 궁궐과 침전 후원처럼 언덕에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양쪽에 굴뚝이 세워져 있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통명전 후원답게 잘 꾸며져 있다.

<대비의 처소로 지어진 양화당>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환궁하면서 잠시 거처하기도 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다른 창경궁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순조대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좌우엔 온돌방을,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하고 있다. 가운데 2칸에 툇마루를 두어 앉아서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하고 있고, 그 양쪽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달아 놓아 사대부집의 사랑채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툇마루>

조선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난간이 달린 툇마루가 있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내다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처마와 공포>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익공계이며,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을 하고 있다.

창경궁은 세종대에 상왕인 태종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성종대에 대비들을 비롯한 왕실가족을 위해 공간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창경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 명정전 북쪽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연조(燕朝)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버린 이후 대부분의 기간동안 국왕이 거처했던 창덕궁은 실제로 정전, 편전, 동궁전을 제외하고는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지 않다. 실제로 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 많은 후궁들과 그들 소생인 어린 왕자와 공주들, 왕실에 일하던 상궁과 나인 등 왕실에 속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했던 장소는 창경궁 일원이었다고 한다. 창경궁에는 이들을 위한 많은 전각들이 있었는데, 일제가 이곳에 동물원을 조성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은 허물어지고, 환경전,통명전,경춘전 등 국왕이 거처하던 내전의 중요 건물들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경춘전과 환경전 영역>

동궐도에서는 침전 건물들은 행각으로 둘러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후궁들의 거처를 비롯하여 많은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조선후기 동궐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행각 건물들은 없어지고 지금은 넓은 마당으로 남아 있다.

<통명전과 양화당이 있는 공간>

통명전과 양화당
통명전(보물)은 1833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위의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의 물길을 돌로 공들여 만든 정원이 있다. 1833년에 중건한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환궁하면서 여기에 거처한 일도 있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