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신림동 청춘] 고시촌 너머 신림동

신림동은 관악산 기슭에 자리잡고 서울 외곽의 작은 촌락으로 의성김씨 집성촌이었던 곳이다. 해방이후 한국전쟁까지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은 평범한 시골마을이었다. 이후 산업화과정에서 도심에서 밀려난 빈민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서울 외곽의 빈민촌 중 하나였다. 1970년대 서울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고시생들이 꿈을 찾아 모여든 고시촌이자, 서울대학생들의 생활공간으로 청춘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지역이다. 2000년 이후 로스클 도입과 함께 고시생들이 떠나면서 빈곤청년들의 주거공간으로 자리잡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고시촌 너머 신림동
신림동이 역사는 시대의 흐름을 연속적으로 반영하며,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쳐왔다. 1960~70년대 도시개발에 밀려 쫓겨나듯 정착한 철거민의 삶과 80년대 희뿌연 화염 속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젊은이들의 패기, 90년대 1평짜리 작은 방에서 꿈을 향해 숨죽이던 고시생들의 유예된 청춘, 그리고 200년대 방황하는 1인세대의 긴 한숨까지 신림동의 역사와 함께 한 삶의 모습들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성실로 답한 수많은 이들과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이들에게 신림동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도시-사라지는 풍경, 2015년, 정영주. 서울 신림동을 배경으로 한 그림. 1960년대 이후 산업화과정에서 밀려난 도시빈민들의 터를 잡고 살았던 판잣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성한 숲, 신림의 시작
관악산 기슭에 위치한 탓에 나무가 무성하여 ‘신림’이라 불렸던 이 일대는 의성김씨 집성촌(자하동)을 비롯해 여러 집성촌들이 있었다. 또한 안동김씨의 공동묘지 50기와 세조의 둘째아들인 창원군의 묘역도 위치해 있어 난곡 일대와 더불어 선조의 묘지를 모시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신림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일본 식민지 당국에 그다지 중요치 않았던 경성 외곽 지역에 불과했다. 다만 1930년대 전시체제에 들어서면 일본군의 야영장이나 물품배급소 등 군사 보급시설이 들어섰다. 한편 해방 후 6.25전쟁 당시에는 무성한 숲 덕택에 주민들의 피난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집성촌이었던 신림동의 옛모습.

집성촌에서 철거민의 마을로
조선시대 의성김씨의 집성촌으로 마을이 형성된 신림동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서울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 ‘무허가주택’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자 신림동은 이를 해결해 줄 묘안의 하나로 떠올랐다. 당시 서울시는 도심의 국공유지나 미개발된 사유지를 점거하여 살고 있던 이들을 서울 변두리 지역과 경기도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철거민들이 초기에 정착한 대부분의 지역은 1963년부터 경기도에서 서울시로 편입된 곳으로 관악구 신림동 일대가 그 중 하나로 지목된 것이다. 허허벌판 서울의 외곽 신림동에는 용산 해방촌, 청계천, 한강 주변, 이촌동, 대방동 등에서 떠나온 철거민들이 이주해왔고, 황량한 이곳을 또 다른 삶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도심에서 철거되는 판잣집, 1960년대, 국가기록원. 도심에서 밀려난 빈민들이 서울외곽과 경기도로 밀려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판자촌 철가, 1964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철거민촌의 형성
해방 이후 급증한 도시빈민의 일부가 관악산 기슭에 모여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이들과 달리, 60년대 중후반이 되면 서울시의 도심 불량주택 철거 정책과 개발에 떠밀려 온 철거민들이 신림동 일대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주는 구호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졌기에 주거와 교통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조건이 매우 열악했다. 더욱이 도심과 멀어진 터라 날품팔이를 하던 이들의 1/3은 생계를 위협받았고, 임시로 주어진 허술한 천막에서 개울물을 먹으며 견뎌야 했다. 또한 서울의 대표적인 도난우범지역이 되서 철거민촌 자체에서 서울시장에게 대책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철거민촌의 형성되던 시기의 신림동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천막촌, 1966년

몰려오는 도시빈민
1970년대 초 서울시는 도시개발계획을 더욱 가속화하며 서민주택난 해결을 위해 도심외곽지역을 중심으로 택지조성에 나섰지만, 철거민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림동을 비롯한 관악구 일대는 당초 이주시킨 철거민의 몇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었고, 정부가 마련한 철거민 이주 정착단지 외에도 산기슭이나 하천변 등에 무허가 불량주택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서울시 당국의 무허가 판잣집 단속은 연례행사처럼 신림동을 휩쓸어갔다. 철거민들은 시 당국에 주거 대책을 요구하였으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신림동에는 도시빈민의 무허가 건물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963년, 주택단지 조성.

OLYMPUS DIGITAL CAMERA철거민 이주주택, 1964년

OLYMPUS DIGITAL CAMERA이주주택 조성, 1966년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옛모습

관악캠퍼스와 신림동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대학교를 ‘후세에 자랑할 수 있는 국제 수준의 대학으로 발전시킬’계획을 지시함에 따라, 1968년 ‘종합화 10개년 계획’과 더불어 관악캠퍼스 건립을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캠퍼스 부지는 ‘한강이남 수원지북’의 원칙에 따라 태릉, 신갈 일대, 과천과 안양사이 등이 물망에 올랐으마 1969년 11월 초, 관악골프장이 있던 신림동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1970년 3월,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전 발표를 했고, 곧이어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교통과 도시환경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1975년 2월28일, 동숭동에서 관악산 중턱으로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이전 완료됨에 따라 신림동은 이제 ‘빈민촌’이 아닌 ‘대학동네’로 새로이 변모하게 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서울대학교 신축지 시찰, 1973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OLYMPUS DIGITAL CAMERA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전경, 1975년, 서울대학교 기록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울대학교 전경, 1977년 국가기록원

OLYMPUS DIGITAL CAMERA옛 관악골프장과 서울대학 이전

대학문화의 유입
1975년,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학교가 신림동으로 옮겨오면서 일명 ‘관악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어두운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새롭게 펼쳐진 캠퍼스에 적응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80년대 학내는 신군부의 집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가 활발하게 벌어졌고,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규모가 커진 학생운동은 서울대학교 정문과 신림동 일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대학 내 불고 있던 민주화 운동은 전국의 각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었으며 동맹휴업, 수업거부, 시위, 서클 활동을 통한 학회구성, 단체 가두행진 등은 80년대 대학가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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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해제 시위, 1980년, 경향신문사.민주화 기념사업회

OLYMPUS DIGITAL CAMERA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1984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OLYMPUS DIGITAL CAMERA교정에 진입한 경찰, 1986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OLYMPUS DIGITAL CAMERA교내 집회, 1987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저항문화의 중심공간, 녹두거리
‘녹두거리’는 서울대가 이전해 온 이후 황량한 벌판에 생겨난 학사주점 ‘녹두집’이 있었던 거리다. 이곳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주점, 인쇄소, 당구장, 서점, 사진관, 슈퍼 등이 생겨났고 기존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삶의 공간과 혼재되면서 대학가의 풍경이 펼쳐졌다. 80년대 녹두거리는 단순한 대학가의 풍경만 지닌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을 반대하며 민주항쟁을 외치던 저항의 공간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은 이곳을 의식화하는 공간과 ‘은신’의 장소로 삼았다. 녹두거리 근처 자취방은 이들이 집회와 시위에 사용할 유인물과 화염병을 만드는 곳이었으며, 지명수배를 당할 경우 경찰을 피해 은신처로 이용했다. 또한 학생운동의 학습교지인 사회과학서적을 파는 곳도 녹두거리일대에 다수 밀집해 있었다. 서점 역시 단순히 책을 파는 곳만이 아니라 학생운동의 매개체 역할을 하며, 민주화 투쟁의 또 다른 공간이기도 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녹두거리

신림동을 감시하라
1970~80년대는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영장없는 체포와 구금이 빈번하였고,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수사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던 시대였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젊은이들이 감옥에 넘쳐나고, 억누르는 정부와 그들에게 저항하는 이들의 갈등은 끊임없이 오고갔다. 그리고 1987년 1월 14일 오전 8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박종철이 신림동 녹두거리 근처에 있던 자취방에서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동아리 선배인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받으면서 10시간이 넘는 물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했다. 주먹으로 책상을 ‘탁’하고 치며 혐의 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고 책상 위로 쓰러졌다는 수사기관의 발표는 그동안 군사독재의 그늘에 숨죽여 지내던 사람들을 분노시켰고,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6월항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박종철 초혼장, 1989,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OLYMPUS DIGITAL CAMERA새서울약도, 1970년, 1970년대에는 서울시의 도시개발이 급속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변두리지역으로 취급받던 신림동 역시 강남개발과 더불어 점차 도심지가 되는 변화를 맞이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시계획전시회 안내지, 1966년, 지도와 삽화가 수록된 서울시의 도시계획전시회 관련 안내지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대학교 종합건설계획 추진현황 보고, 1973년, 서울대학교 신림동 이전의 단계별 계획과 당시 추진현황을 기록한 보고서다.

OLYMPUS DIGITAL CAMERA기공식 치사, 1971년,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기공식을 축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이다, 국가기록원

OLYMPUS DIGITAL CAMERA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건립현황 앨범, 1974년, 1972년 착공한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의 전경과 건물모습을 담은 사진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대학교 교지, 1975~6년, 서울대학교 기록관, 신림동으로 이전한 서울대학교가 종합캠퍼스로서 첫회를 맞아 발간한 대학축전 팜플렛과 교지 창간호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유언론> 제10호, 1984년, 서울대학교 소식지로, 교내 학생운동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권인숙 성고문사건 유인물, 1986년, 서울대 의류학과 82학번 권인숙이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민주화의 길> 제5호, 1984년, 1984년 상반기에 진행된 민주화운동을 주도단체별로 분류하여 정리했다. 구속자 현황표, 1985년, 구속자들의 신상이 기록된 자료다. 구속자 중에서 대학생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 박종철군 고문살인사건 관련 자료, 1987년, 서울대학교 기록관,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 박종철의 죽음으로 인해 6월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위용품 사진, 1991년, 1990년대 초반에도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은 활발했다. 당시 사용한 각종 시위용품 사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부편지, 1991~1994년, 서울대학교 기록관, 199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서울대 학생들이 고 김진균 교수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민중가요 자료, 1990년대, 민중가요 악보집과 테이프다.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그날이 오면’등이 실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대학교 출입증, 1980년, 서울대학교 기록관, 1980년 계엄령 당시, 학교 출입 통제를 위해 발급된 출입증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타자기, 1972년, 민주화운동이 고조되던 시기, 대학생들은 교내 동아리방이나 하숙집 등에서 타자기로 몰래 유인물을 제작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허가건물 단속과 정비현황보고, 1972년, 국가기록원, 서울을 비롯한 5개 대도시의 무허가건물 현황과 단속 내용이다. 서울시 무허가건물 철거계획, 1975년, 국가기록원, 서울시 무허가 건물의 현황과 지역별 철거가구수, 철거민 대책 등이 정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극 리플릿.도서, 1980년대, 1970년대 무허가 주택 철거로 발생된 도시빈민층의 삶과 애환을 다루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부순환도로 사진, 1970년대, 1970년 신림구획정리지구에 착공된 남부순환도로로 인해 신림동의 교통이 보다 편리해지고 택지로서의 가치가 높아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개정 서울특별시전도, 1974년, 영등포구에 속했던 신림동이 1973년 신설된 관악구로 편입된 후의 지도다. 서울대학교 이전 계획이 진행되던 시기로, ‘관악산칸추리클럽’자리에 새로 지어질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가 표기되어 있다.

지금 신림동
2013년 행정명 변경으로 ‘신림9동’이 아닌 ‘대학동’으로 불리는 이곳은 고시촌으로서의 명성을 점점 잃어가는 중이다. 2000년대 중반 사법시험 영어대체제 도입, 2008년 로스쿨제도 도입, 2017년 사법시험 폐지 등은 많은 고시생들이 이곳을 떠나는 이유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고시생들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시설들이 폐업을 하거나 규모를 축소하고 있어 침체되어 가는 동네를 우려하는 주민들이 많다. 현재 고시촌은 ’1인세대’로 대표되는 이들이 새롭게 모여들고 있다. 기존의 고시촌이 고시생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지금 이곳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주거부터 일상생활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면서 또 다른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최근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간적 변화와 구성원 유입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점차 늘어나는 ’1인가구’가 모인 지역의 시대적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고시촌 골목에서 볼 수 있는 빈방이 있다는 안내문들.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고시원 구조. 대지 50평, 지하1층, 지상2층 1984년에 건축된 고시원이다. 총 28개의 방을 두고 있으며 월임대료는 13~15만원 수준이라 한다. 상당히 열악한 환경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지 47평, 지하1층, 지상3층 1990년에 건축된 고시원이다. 총 18개의 방을 두고 있으며 월임대료는 50~60만원 수준이라 한다. 일반적인 원룸과 비슷한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지 140평, 지하1층, 지상5층 2000년에 건축된 고시원이다. 총 80개의 방을 두고 있으며 월임대료는 40만원 수준이라 한다. 고시원과 원룸의 중간형태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초기 고시원. 197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198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199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2000년대.

텅빈 고시촌
2008년 로스쿨이 대학에 도입되었다. 암기로 지식을 습득한 법조인 양성을 탈피하고, ‘고시낭인’을 막으며,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들을 훈련시켜 다변화되는 법률서비스에 대응하고자 한 취지였다. 이에 사법고시 합격자는 2015년 200명, 2016년 150명, 2017년 50명을 끝으로 점점 선출 인원이 줄어 2017년 폐지된다. 오랜 기간 ‘신림동 고시촌’에 머물렀던 고시생들은 사법고시로 선발하는 인원이 대폭 감소하자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고, 고시열풍이 불어 한때 5만여 명에 달하던 고시생의 수는 절반으로 격감했다. 이에 고시원과 원룸의 공실률은 40%에 달하고 고시와 관련된 서점, 헌책방, 복사집들은 사라지고 있으며, 학원과 독서실은 규모를 축소하거나 다른 교육 시설로 대체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울시 1인가구 비율.

또 다른 청년들
대한민국에서 ’1인가구’가 가장 많은 곳은 서울시 관악구다. 현재 신림동은 고시를 준비하던 이들이 떠난 뒤 각종 국가고시 준비생을 비롯하여 취업준비생, 서울대생, 외국인 유학생, 새내개 직장인, 저임금.불안정 노동자, 기초생활대상자 등이 ’1인가구’를 구성하며 살고 있다. 실업, 불안정한 고용, 학업, 취업준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타 동네에 비하여 저렴한 집세와 생활물가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러나 이들 역시, 여의치 않는 상황으로 이곳에 왔지만 목표하던 계획이 이루어지거나 여건이 나아진다면 이곳을 떠나길 원한다. 때문에 생활터전으로 오랫동안 이곳에 정착할 생각이 없으며 ‘잠시 머물기 위한 동네’라는 의식이 지배적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청춘 고시원
현재 ‘고시원’이라는 명칭은 고시생들이 치열한 자기 싸움을 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외로움과 불안이 감도는 현대인의 1평짜리 불편한 주거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1997년 IMF 이후부터는 1인가구 중 도시빈곤층이 주로 이용하는 공간이자, 청년들이 많이 거주하는 하나의 저렴한 임시 숙소가 되었다. 2015년, 약40%에 이르는 주거 빈곤 청년들은 고시원과 옥탑방, 반지하로 쳇바퀴 돌 듯 이어지는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수가 고시원에 머물고 있다. 그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어 정부는 전세금대출제도, 민자 기숙사확대, 기숙사 확대보급 등으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중이나 큰 성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민달팽이 주거 협동조합’이란 사회적 주택을 만들어 청년들 스스로가 주거문제를 직접 풀어보고자 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청년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적 약자로 내몰리는 청년들이 가진 주거문제 역시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대학동 살리기 프로젝트
관악구에서는 2007년 사법고시 폐지가 결정된 후, 급격히 진행되는 고시촌의 ‘공동화’ 현상을 막고 슬럼화를 우려하는 주민들을 위해 ‘고시촌 교육 특성화거리’ 조성사업을 계획했다. 기존의 고시촌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교육 인프라를 활용하여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공간으로 만들고, 도림천을 생태공간으로 변모시켜 고시생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자는 취지였다. 더불어 ‘클럽하우스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스토리텔링 작가들에게 고시원의 임대료를 일부 지원하여, 고시촌을 문화콘텐츠 생산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융합형 작가 하우스 성격으로 모여든 영화감독, 연출가, 시나리오 및 희곡작가, 방송작가, 공연기획자 등이 신림동 고시원에 입주하여 작품을 창작하며 고시촌을 새로운 창작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학동살리기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