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의 휴식공간이었던 남산은 구한말 일본의 침략과 함께 침탈의 현장이 일본은 한양의 내사산으로 백성이 출입과 개발이 제한되었던 남산 일대에 핵심 통치기구인 통감부와 총독부를 비롯하여 각종 기관과 일본거류민들을 위한 주거지, 상업시설 등을 배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조선신궁, 신사, 이등박물을 위한 사찰인 박문사 등을 설치하였다. 해방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많은 시설들은 철거되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서 일제의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식민통치의 현장
신성하고 친근했던 남산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일본은 남산을 기점으로 토지를 침탈하여 그들의 거점으로 삼고, 점차 서울의 중심부로 또 남쪽의 신시가지로 세력을 확장하여 ‘대경성’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특히 남산 북록인 예장동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지와 식민재배의 핵심통치기구를 지속적으로 증설하였습니다. 남산 산록 중 가장 눈에 잘 띄는 회현자락에는 조선신궁을 세워 조선인을 정신적으로 옭아매고자 하였습니다. 남산은 빼어난 경승지이자 그들이 야심차게 꿈꾸는 경성-용산 축의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경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반대로 경성 어디에서도 보이는 랜드마크였습니다. 바로 이 남산에 일본은 식민권력의 상징물을 이식하여 여기에 새겨졌던 조선인들의 기억을 해체하고자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자리. 일제강점기 이후 KBS에서 사용하다가 그 건물들을 애니메이션센터에서 사용하고 있다.
수난의 그림자
일본은 남산을 거점으로 조선을 잠식해갔습니다.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해서 ‘왜성대(倭城臺)’라고 불렸던 남산의 북록, 예장동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습니다. 1885년 일본공사관의 이전 후 일본인 전용 거류지로 공인되었고, 거류민은 1885년 19호 89명에서 10년 만에 500호 1,839명으로 빠르게 증가하였습니다. 거류지는 점차 확장되어 이 일대는 ‘경성 속의 동경’ 즉 일본인들의 중심지가 되어 상업시설, 백화점, 극장, 유흥가 등 근대식 문화의 전파 장소로 조선인들의 마을인 ‘북촌’과 대비되는 ‘남촌’으로 그 위세를 이어갔습니다. 또 러일전쟁을 앞두고는 남산 서남쪽 용산 일대에 병영을 배치하면서 일본인들이 거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산으로부터 전방위적인 침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성 일본영사관 신축설계도, 복제, 1906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체결된 한성조약에 의거해 일본은 조선정부로부터 남산 기슭의 공사관 터와 건축비를 받았다.
거류민의 석물어(제1편), 경성 사교단체인 ‘조선이석회’ 회원 30여명이 조선에 살면서 겪은 생활경험담으로, 한양공원의 창설이야기와 개원식 기념사진이 실려 있다.
경성회고록, 1922년, 오무라 유노죠가 쓴 책으로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경성의 자치행정.교육.경제.위생.토목 등에 대해 기록했으며, 남산 아래에 자리한 거류민 단체에 대한 기록도 실려 있다.
본정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본정(충무로)을 비롯한 남촌은 내지인과 식민정부를 위한 근대시설로 번영을 누렸고, 조선인 중심의 북촌은 낙후지역으로 인식되는 등 지역차별이 극심했다. 용산 식민통치기구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조선주차군사령부, 용산 총독관저, 용산병영 전경
통감부 자리 아래에 일제강점기 중심 상업지구였던 본정(충무로).
경성항공사진, 일제강점기, 남산 서남쪽으로 일본 병영들이 넓게 자리잡은 모습을 항공촬영하였다. 용산에서 경성 시내에 이르는 대경성 구축의 야욕을 엿볼 수 있다.
경성 용산시가지 전도, 1909년. 통감부와 육군사령부 외 경성이사청, 공원, 용산의 병영, 유곽 등이 나타나 있는 지도로, 한일병합조약 이전 남촌과 용산일대에 이미 일본이 깊숙이 침투해 왔음을 보여준다.
식민통치 거점.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감독하는 통감정치가 실시되면서 남산은 본격적으로 식민통치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왜성대에는 통감부(병합 이후 총독부)가 설치되었고 일본공사관은 폐지되어 통감관저(병합 이후 총독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이후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세 통감을 거치는 동안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 외에도 내정 간섭을 통해 단계적으로 한국을 병탄할 준비를 추진해 갔습니다. 한편 1904년에는 통감부 동쪽에 헌병대사령부가 설치되는데, 이는 후에 일제 무력통치의 중추기관이 됩니다. 이외에도 남산 일대에는 경성이사청, 정무총감 관저, 일본 적십자사 등이 총집결하여 식민통치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국권 상실의 현장, 통감부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이것은 1910년 8월29일에 공포된 한일합병조약의 첫번째 조항이다. 이로써 조선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한일합병조약은 공포 일주일 전인 8월22일,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데라우치 마사다케통감과 총리대신 이완용 간에 조인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총독부청사증축설계도, 복제, 1910년 추정, 왜성대의 통감부청사는 이후 총독부청사로 바뀌어 1926년 경복궁 신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식민통치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 1910년,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된 화보로 오사카신문에서 발행하였다. 남산 통감관저에서 조인된 병합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주권은 박탈되었다.
항일의거의 현장: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
1919년 3.1운동으로 항일감정이 고조된 가운데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은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등 일제 요인을 처단하기 위해 총독부 건물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첫번째 것은 불발하였지만 두번째 것은 굉음을 내고 폭발하여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다. 식민지 조선인의 항일 감정을 만천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통감부 초대장, 1900년대, 천장절(천황 생일) 축하 원유회 등 남산에 자리한 통감부에서 개최된 각종 행사 초대장과 봉투이다.
한국병합기념 메달, 1910년, 일본 천황가를 상징하는 16꽃잎의 국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한일병합 기념엽서, 1910년, 제1대 이토 히로부미, 제2대 소네 아라스케, 제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의 초상사진과 남산의 통감부청사 사진이 있다.
문교의 조선, 1927년, 관변교육단체인 조선교육회의 잡지로, 1927년5월 은사기념과학관 개관 특집호이다. 은사과학기념관 안내지도와 실내 모습등이 실려 있다.
경성헌병대 보고서, 1907년, 한국주차헌병대의 보고 규정을 담은 책으로, 한국주차헌병대는 금위영 남별영터에 편성되었다.
은사기념 과학관 안내, 1927년, 은사기념 과학관의 유래와 배치도 및 관람순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은사(恩賜)’란 천황으로부터 은혜로이 하사받는다는 뜻으로 일본이 과학을 전한다는 지배담론을 담고 있다.
데라우치 마사카케 글씨, 20세기 초, 이완용 글씨, 1924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에서 물러날 때 지은 합작시. 각 구의 말미에는 이토 히로부미, 모리 오노리, 소네 아라스케, 이완용 4인의 호를 써놓았으며, 일본과 조선이 하나임을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