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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남산의 힘] 돌아온 남산

1990년대 이후 남산은 일제강점기와 개발독재시대의 어두운면을 벗고 옛모습을 되찾기 시작한다. 정권을 수호하던 안기부와 수방사는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였으며, 개발독재시대에 세워진 남산의 경관을 막고 있던 외인아파트의 철거는 이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90년대 이후 남산은 점차 원래의 기능이었던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복구되고 있으며,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다시 한번 자리매김하게 된다.

 

시민의 품으로: ‘남산 제모습 가꾸기’
남산은 오랜 시간을 거쳐 결국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1990년 발의된 ‘남산을 제모습으로 가꾸어 시민들에게 되돌려 준다’는 ‘남산제모습찾기(1992년 남산제모습가꾸기로 변경)’ 사업은 남산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계획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권위주의 정치의 상징이었던 수방사와 안기부가 남산을 떠났고, 남산의 얼굴을 가린 외인아파트가 폭파.철거되었습니다. 잠식시설물의 철거와 이전은 고도성장기 우리의 손에 의해 훼손되고 고립된 남산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은 지역주민, 시민, 전문가 등이 제기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시행되었습니다.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남산도 시민에게 훌쩍 다가온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90년 이후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 결과 원래의 모습을 찾고 있는 서울성곽.

출발과 과정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은 1990년 고건 전 서울특별시장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의 훼손과 국가 혼란기에 잠식되어 시민으로부터 멀어진 남산을 정도 600년과 광복 50주년에 즈음하여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여, 시민에게 되돌려 준다는 취지였다. 비록 위로부터의 출발이었지만 시민 의견 수렴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남산제모습찾기 100인시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자연보전, 역사문화, 경관관리 3개 분과 전문가와 일반시민 73명, 지역주민 30명으로, 전문성이 확보되면서도 각계각층의 의견이 수렴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배경의 시민이 참여하였다. 분과회의 외에도 ‘내가 바라는 남산’ 학생 글짓기, 시민의견 조사 등을 반영하여 추진계획이 수립되었다. 잠식시설 이전 및 공원화, 자연생태의 보전과 자연학습 공간화, 역사환경 보전 및 문화기능 도입, 보행 접근성 강화를 4대 핵심과제로 하여 진행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계획도

잠식시설 철거
남산의 모습을 회복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은 남산의 자연과 경관을 해치는 잠식시설의 철거였다. 특히 예장동과 필동에는 권위주의 시설물인 안기부와 수방사가 자리하여 남산으로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1991년 먼저 수방사가 남태령으로 이전하였고 4년 뒤 안기부는 서초구 내곡동으로이전하였다. 한편 남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외인아파트는 1994년 11월 20일, 단 15초 만에 광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발과 성장제일의 논리가 무너진 것이다. 떠나간 수방사 자리에는 전통문화동네 조성계획에 따라 남산골 한옥마을이, 외인아파트 자리에는 남산 야외식물원과 야생화공원이 조성되었다. 바야흐르 시민 휴식과 자연녹지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으로 남산에 있던 잠식시설 총 89동이 사라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남산 야외식물원 조성, 1994년.

하얏트호텔 뒷편 외인아파트가 철거된 자리에 조성된 공원이다.

서울 외인아파트 철거장면.

남산골 한옥마을 조성, 1998년.

수방사가 이전한 자리에 조성된 곳으로 서울에 남아 있던 전통한옥을 옮겨 놓았다.

남산 봉수대 복원, 1993년. 남산의 상징이었던 서울 봉수대.

남산공원 이용시민 및 조망저해시설 현황, 1990년대

남산제모습찾기 100인 시민위원회 구성계획, 1990년,

1990년 8월 17일 100인 시민위원회 구성 기본 방침이 확정된 후의 계획이다. 3개의 분야별 분과위원회, 6개의 지역.보행축별 분과위원회로 구성되었다. 100인 시민위원회 회의자료, 1990년. 1990년 12월 중에 있었던 100인 시민위원회 회의자료들이다. 각각 지역위원 간담회, 자연보전 분과, 지역.보행축 분과별 내용이다.

시민의견조사 자료, 1990년대,

1990년 12월, 1991년 2월 학생들과 시민들의 남산 및 남산제모습찾기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자료이다. 남산주변 5개 학교의 350명의 학생, 일반시민 1550명을 대상으로 하였다.

 남산제모습찾기 구상 원고, 1990년초,

남산제모습찾기의 이념에 대한 원고다. 남산제모습찾기 구상 스케치, 1990년 초, 경관관리 기준을 구상한 스케치이다.

광역접근성 강화, 1990년대 초,

남산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안기부와 수방사를 지나는 보행진입로를 신설하여, 필동축의 접근성을 강화하고자 한 계획이다.

고건 시장 지시사항, 1990년,

1990년 7월 12일, 남산의 회복에 대한 고건 시장의 지시가 적힌 메모이다. 이후 8월 17일 대통령 보고를 통해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이 시작되었다.

남산 되찾기사업 관련사항, 1990년,

남산 회복사업에 대한 추진경위와 이슈, 사업의 의의 등을 기록한 문서이다. 남산 회복사업은 1990년 6월 27일 기공식날 대통령이 시장에게 지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서울 도심의 작은 명산 남산, 1천만 시민의 사랑을 받고 시민을 푸르름과 넉넉함으로써 감싸줄 남산은 산봉우리와 산허리, 산자락이 찢기고 할큄을 당한 지 거의 1세기에 이른다. 서울의 명승지로 첫 손꼽히는 남산의 훼손사는 바로 시민의 수난,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 ‘공원 용지 해제 57년 이후 36차례, 한때 25만 평까지 잠식, 일제 신사가 훼손 효시, 민족 수난의 단면’, 『경향신문』1990.8.17.

회복과 소통: ‘남산르네상스’
남산제모습가꾸기 미완의 부분은 남산르네상스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보호에 치우쳤던 공원관리는 이용 증대, 관광 활성화로 방향을 전환하여 2004년 이용실태 분석 및 개선방향 연구 등 여러 계획을 종합하고 2009년 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생태.역사성의 지속적인 회복과 시민과의 소통을 통한 새로운 남산 자락문화의 창조”라는 기조 아래, 다가가기 쉬운 남산, 오르기 편한 남산,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전통과 문화,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남산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또 장충과 예장, 회현, 한남 자락 등 남산 진입부와 N서울타워 등 모두 다섯개 지구로 나눠 재정비사업이 실시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 한양도성의 발굴과 복원
    남산르네상스 계획 아래 그동안 복원되지 못했던 회현자락 한양도성의 복원이 추진되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아동광장, 백범광장, 중앙광장, 회현자락 부지내 유적이 차례로 발굴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이미 멸실됐다고 생각했던 태조~숙종연간 이후 한양도성 266m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성곽 훼손의 주된 원인이었던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의 배전지, 황국신민서사지주 기단석을 비롯하여 이승만 동상의 하부 콘크리트 기초부가 확인되었다. 이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준비 중인 한양도성의 원형에 대한 진정성을 입증하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남산이 겪었던 수난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발굴지에 대해서는 성곽의 복원과 함께 시민의 휴식.산책공간을 조성 중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신궁 배전지, 이승만 동상 기초부

남산 중앙광장(발굴조사 전)

중앙광장 발굴현장,

황국식민서사지주

남산제모습찾기 시설이전계획(안), 1990년대 초,

남산 내 잠식시설 이전에 대한 추진계획이다. 안기부, 수방사, 국악고등학교, 외인아파트 등 이전대상 잠식시설과 시설별 보상방안 및 법적절차 등 추진일정을 담고 있다.

남산제모습찾기 전통문화동네 조성 추진계획, 1990년대 초,

필동 군부대 및 정부기관 이전적지의 활용 계획 수립을 위한 학술용역의 시행계획이다. 조선시대 도성 내 주민들의 휴식과 오락장소였던 남산일대의 역사성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남산제모습찾기 사업 추진계획 변경시행, 1992년,

외인아파트 이전에 대한 현금보상이 결정된 후 세부 추진계획 변경에 따른 시행문이다. 보상내용 및 협의방안 등에 대한 내용을 첨부하였다.

단국대부지 풍치지구 관련문서, 1995년,

단국대 부지의 풍치지구 해제 철회 요청에 대한 서울시의 회신문이다. 환경운동연합은 풍치지구 해제는 남산 제모습 회복을 위해 외인아파트를 철거한 서울시의 녹지정책에 위배된다는 항의 서한을 제출하였고, 결국 시가 이를 받아들여 철회되었다.

남산제모습찾기(가꾸기)계획, 1990년대 초

남산공원의 실태 분석 및 개선방향연구, 2004년,

남산제모습가꾸기 사업 후 시대변화와 이용자 증가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증대됨에 따라 실시된 연구이다. 이 연구를 통해 부적격 잠식시설로 파악된 남산식물원이 2006년에 철거되었다. 남산 르네상스, 2009년, 기본구상은 서울의 랜드마크로서 남산으 상징성을 회복하고 남북 녹지축과 한강과 연결하며, 시민의 소통을 통해 남산 자락문화 창조한다는 것이다.

남산 회현자락 발굴 관련 자료, 2010년대

잊혀진 기억의 복원
자연녹지 복원과 시민 휴식 공간 조성으로 귀결되는 남산 회복사업은 역사보존 논란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이 논란은 자연을 훼손하는 잠식시설 철거가 남산에 새겨진 엿사를 지워버리게 된다는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안기부 건물을 폭파 해체하거나 행정기관으로 전용한 사실은 시민단체의 반발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안기부 본관 건물은 2006년 서울유스호스텔로 전환되었으며 최근에는 안기부터를 인권기념관 등 평화의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2005년 통감관저 터가 발견되면서 그 자리에 시민단체가 주도하여 경술국치의 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건립하였습니다. 통감부와 안기부, 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그 기억의 복원에 나섰던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과거 역사를 덮어두면 오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서 그것이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뼈아픔을 절대로 피해서는 안 됩니다.
– 리하트르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1985년 국회 연설 –

남산 옛 안기부청사 폭파 해체 모습, ‘남산 안기부터를 인권.평화의 숲으로’ 캠페인

통감관저터 가는 길, 통감관저터 표지석

정부는 민주공원 건립부지를 남산 구안기부터로 즉각 확정하라!, 2002년

(구)안기부건물의 사용계획에 대한 반대결의문, 2002년,

서울시의 구 안기부 건물 소방방재본부 사용계획에 대한 중구의회의 반대 결의문이다. 구 안기부 건물을 도시공원법에 맞게 도서관이나 유스호스켈 등 시민의 편의를 제공하는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4월 22일 1시 남산!, 1990 지구의 날 한국행사 일정 포스터

세계 환경의 날 기념 남산껴안기 대회 관련 자료,

1993년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시민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의 주최로 ‘남산껴안기’운동이 추진되었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부터 회현자락까지 7.2km에 이르는 남산 순환산책로를 따라 인간사슬을 만들어 남산을 껴안고 자연보호에 앞장서자는 것이었다. 심각한 산림파괴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서울의 상징인 남산을 되살리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자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일상이 된 남산, 오늘날의 남산 풍경
오늘날 남산은 우리들의 삶의 일부를 구성하며 함께 숨을 쉬고 있습니다. 출근길 높은 빌딩 사이로 보이는 남산은 잠시나마 짙푸른 녹음을 안겨주며 활력을 심어줍니다. 퇴근길 남산타워의 조명은 하루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을 줍니다. 우리 곁으로 온 남산은 역사의 복원이나 자연으로의 회귀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과 일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가장 남산다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2000년대 이후 남산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쏟아졌습니다. 또 남산과 함께 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산자락마다 펼쳐지고 있습니다. 남산은 ‘산’이라는 자연에만 그치지 않고 문화, 그리고 사회구성원과 소통하며 완성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집단이 참여함으로써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도 하지만 모두 진지하게 가장 남산다움을 고민하며 그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걸으며 느끼며: 거북이 마라톤대회, 100만인 걷기대회

사랑의 자물쇠

‘사랑의 자물쇠’는 연인들이 남산에 오르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랑의 자물쇠는 2005년 남산타워 리모델링 시 타워 옆 절벽에 로프테라스가 설치된 후, 외국인 관광객들이 철제 난간에 하나 둘 자물쇠를 채우면서 시작되었다. 입소문을 타고 연인, 부부들이 만남을 기리거나 사랑을 다짐하기 위해 찾아오면서 남산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저마다의 사연으로 빼곡이 채워진 이곳은 자물쇠나 열쇠가 버려지면서 환경오염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N서울타워 조명의 비밀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남산타워는 전파송출을 담당하는 전파탑으로, 1975년 완공했다. 보안상 일반에 공개하지 않다가 1980년에야 개방하였다. 이후 2000년 리모델링을 거쳐 YTN에 인수됨으로써 ‘N서울타워’로 명칭을 바꾸며 휴식공간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2011년 N서울타워는 서울시와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일몰후부터 자정까지 타원의 조명을 통해 서울시의 공기질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가 보통인 날에는 파란색 조명을, 나쁜 날에는 연두색 또는 붉은색 옷을 입는다. 파란색일 때 전망대에 오르면 경기도까지 보이고, 붉게 물들면 가급적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N서울타워 조명

산책하기 좋은곳: 남산 북측 순환로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시작해 동국대, 필동약수터를 거쳐 교육과학원까지 이어지는 남산 북측 순환로 3.3km구간은 시각장애인과 마라토너의 달리기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곳곳에 점자안내도, 음향유도신호기, 목재안전펜스 등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적거와 이륜차의 통행도 금지하여 시각장애인들이 아무 도움없이도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하였다. 더욱이 순환로 한쪽을 고무 칩이나 우레탄으로 푹신푹신하게 탄성 포장하면서 마라톤 동호회원들도 번갈이 이곳을 찾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남산 북측 순환로.

서울의 기억을 담은 타임캡슐
1994년 한양 정도 600주년을 맞아 당시 서울의 사람들과 도시를 대표하는 물건 600여 점을 넣은 타임캡슐을 남산한옥마을에 매설했다. 이는 한양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 11월 29일 개봉할 예정이다.

남산 타입캡슐.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 중구 예장동 산 5-6번지 남산공원

돌아온 남산
지난 백여 년간 남산은 자연 그대로의 산이 아니라 권력과 이념이 집중적으로 투영된 장소로 자리해 왔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한계와 과도한 개발, 도시화가 부른 남산의 자연환경 문제가 제기되면서 1990년대 남산은 ‘이대올로기’의 옷을 벗고 ‘자연’, ‘사람’, ‘역사’의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남산을 훼손했던 잠식시설들이 철거되었으며 보다 다가가기 쉬운 남산이 되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전통과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 갔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부와 시민들은 함께 정책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고, 자연환경의 보존, 시민 휴식공간의 확보, 역사현장의 복원 등의 측면에서 서로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진통을 겪으며 남산은 그 ‘힘’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정도 600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남산은 항상 서울시민과 함께 유대를 갖고 그 가운데 형성되어 왔습니다. 어느 시점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현재까지 이렇게 거쳐 온 그 자체가 남산입니다.
– 주남철, 남산제모습찾기 역사문화분과위원회,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