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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남산의 힘] 일제강점기 남산

일제강점기 남산은 통감부를 중심으로 남산 일대에 형성되었던 일본인 거류지에 살았던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으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남산에 한양공원, 왜성대공원, 장충단 공원을 설치하였다. 구한말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신사인 남산대신궁을 설치한 이래 노기신사, 경성호국 신사 등을 설치했으며, 1925년에는 남산 중턱 전망 좋은 곳에 메이지 일왕을 모시는 거대한 조선신궁을 건설하였다. 또한 구한말 고종이 을미사변 때 순국한 이를 기리기 위해 설치했던 장충단을 공원으로 전락시키면서 한일합방에 큰 역할을 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사찰을 건립하였다. 한양을 수호하는 사사산이었던 남산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의 침탈을 상징하는 다양한 시설들이 설치하여 서울사람들의 생활속에서 식민통치의 현실을 느끼도록 강요하였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설치한 조선신궁.

일제가 세웠던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

한강통삼각지광장계획도, 1930년대 말,

용산구 한강로 삼각지 부근 도로를 그린 지도로, 경성역과 용산역 사이를 가로질러 중간 우측 상단부로 뻗은 도로가 1936~38년 부설된 남산 주회도로다.

박문대주택지제2구 평면도, 1930년대 말,

장충단공원 일대 주택지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지도이다. 장충단공원 건너편 북쪽으로 장충단주택지가있고, 동쪽 성곽과 주택지들 아래로는 남산회유도로가 지나고 있다.

남산 소재 공원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공원’은 근대 문물과 함께 유입된 개념으로 1897년 세워진 왜성대공원을 시작으로 남산에는 한양공원, 남산공원, 장충단공원 등이 세워졌다.

경성부남산공원설계안, 1917년,

일본인 조영학자가 남산 일대를 조사한 후 공원건립에 대한 기본계획을 제시한 것이다.

남산의 소요, 일제강점기,

남산에서 바라본 시가지 사진과 남산 산책로 지도가 있으며 역사유적 등 남산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였다. 지점 간의 거리를 표시하여 도보시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충단공원 사진, 1935년,

장충단공원에 놀러온 학생들의 모습이다.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은 일제강점기 수학여행이나 소풍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고등주택지 신정대 주택광고, 일제강점기,

신정대는 현재 서울역에서 용산으로 넘어가는 후암동 부근으로, 병합 후 경성 최초로 일본인 주택단지가 들어선 지역이다.

경성명승유람안내, 일제강점기,

경성역에서 출발하여 남산을 둘러보는 유람버스노선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남산은 식민 통치의 중심지이자 이를 선전하는 주요 관광코스로 자리잡았다.

경성에 사쿠라가 이식된 최초는 1907년 도쿄에서 3년생 묘목 1500분을 가져와 남산 왜성대 공원에 500본을, 나머지는 각자 나누어 심게 된 때부터였다. 왜성대 사쿠라는 1914년에 가장 번성하여 하루에 10만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들 적이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 『경성일보』1933년. 4. 27 –

남산주회도로의 개통을 목전에 두고…… 남산 부근에 산재한 경성부의 유일한 자원인 부유지를 활용코자 하는 계획에서 개척하는 특설 도로인데 이 부근은 또한 전부 풍광명미한 관계로 신축가옥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 이 틈박이에 있던 세민들은 할 수 없이 집을 팔고 부외로 뚝 떨어져 속속 이주하는 정경에 있는 것이 많다 한다.
– 『새궁민은 쫓겨나고 문화주택만 격증』조선일보, 1938. 11.29 –

반도 1700만 백성의 수호신인 관폐대사 조선신궁은….. 그 후보지에 대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경성.용산의 중심지로서 경치가 뛰어난 땅인 남산 허리에 신성스러운 땅을 고르고 ….. 어진제가 감행되어 우리들 반도주민은 기뻐 춤추는 것을 그칠 수가 없는 바이며, 조선 병합의 뜻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고운 빛깔을 더하는 것이다.
– 「반도역사와 조선신궁의 빛나는 진좌제의 뜻」『조선과 건축』 1925. 11. –

황국 신민서사의 언덕
일본의 강제 병합 후 남산은 일본의 국교인 신도(神道)에 점령되었습니다. 일본은 대만, 사할린, 만주 등 식민지마다 신사(神社)를 건립하여 천황숭배 사상을 주입하였습니다. 1898년 일본 거류민들은 왜성대공원에 남산대신궁(후에 ‘경성신사’)을 창건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한양공원 부지에 신사의 총본산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설립하였습니다. 조선신궁은 일왕가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와 1912년 죽은 메이지 일왕을 모신는 곳으로, 서울 어느 지역에서나 잘 보이는 능선에 압도적인 규모로 지어 조선인의 정신과 일상을 지배했습니다. 일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하고 개인 사당으로 격하하였습니다. 이밖에 남산에는 노기신사(1934), 경성호국신사(1943), 동본원사 등 각종 종교시설들이 난립하여 조선의 목멱신과 무속신앙을 몰아내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남산 중턱에 세워진 조선신궁.

조선신궁 진좌제
1925년 10월 15일 조선신궁에 신을 맞이하는 날, 일제는 이를 경성 최대의 이벤트로 화려하게 기획하였다. 10월 13일 경성역, 조선신궁에 모실 신체(神體)를 일본으로부터 받아오는 열차가 도착하였다. 이는 경성역 개장 이래 첫 열차 운행이었다. 진좌제가 열리는 날 일본 동궁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여 건립된 경성운동장도 개장하였고, 이튿날부터 조선신궁 경기대회가 열렸다. 조선인들도 일본 신 앞에서 경기를 펼치게 한 것이다. 경성역에서부터 조선신궁에 이르는 길에는 등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일본은 경성역-조선신궁-경성운동장을 연계하여, ‘일본이 새로운 문명을 조선에 가져온다’는 이미지를 선전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신궁 진좌제 사진

신궁건축지, 1907년,

신궁봉경회건축소에서 발행, 일제와 친일파들이 단군과 마아테라스오미카미 및 조선의 태조를 함께 모시는 일한신궁을 건립하려고 한 계획안이다.

조선신궁기, 1926년,

조선신궁의 성립과정을 소개한 책으로 신궁 건축 이듬해에 발간되었으며, 진좌지의 선정부터 설립 후 봉축행사까지 그 일련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조선신궁사진도집, 1925년.

관변단체인 조선건축회에서 발간한 사진집으로 신궁에 이르는 길인 참도, 신궁계단, 건물 세부까지 50여 장의 사진을 싣고 있다.

조선신궁 사진.

조선신궁 사진.

조선신사서원문 및 축사사 지도, 복제, 1919년 추정,

정전 입구에 건립한 서원문과 축사사의 설계도로,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신궁 관련 도면에서 유일하게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관폐대사조선신궁신역 및 부근 남산산림구역도, 1926년, 복제,

남산 서북쪽 기슭(당시의 한양공원)에 일자형으로 배치된 조선신궁의 구획도이다. 3개의 광장과 각 광장을 잇는 돌계단, 그리고 참도가 표시되어 있으며, 조선신궁의 세 영역을 구분하고 흐릿하게 각 건물의 배치를 표시했다.


조선신사표참도 신설공사 설계도, 1919~25년 추정.

중심 참도이 표참도의 설계도이다. 중광장과 상광장 두 광장을 잇는 참도, 상광장에서 이어지는 조선신궁의 첫번재 영역의 도리와 테미즈야, 신부소, 제기고 등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조선신궁조영지, 1927년,

조선신궁 건립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자료집이다. 신궁의 창설 경위와 공정별 주요 행사 등을 소개하여 건설 당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한양도성을 훼손하며 공사를 진행하는 모습이 실려 있다.

일본식 종교신설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①~②경성신사, ③노기신사, 민족문제연구소, ④남산과 한강 부근의 신사, ⑤경성신사의 섭사 천만궁, ⑥동본원사 경성별원. 남산에는 조선신궁 외 경성신사와 그 섭사, 노기신사 등 신사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도 전파되어 동본원사 경성별원 등이 건립되었다.

조선신궁어진좌제 기념사진첩, 1925년,

1925년 10월 거행된 조선신궁 진좌제 당시의 각종 행사 모습과 신축한 조선신궁의 모습, 경성의 거리 경관등의 기록 사진을 수록하였다.

조선신궁 기념물,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진좌제 기념주화와 조선신궁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잔이다. 잔 바닥에 ‘조선신궁’ 명문이 시문되어 있다. 어대전기념잔, 1928년, 성곽(회현지구) 내 유적에서 출토된 왜사기 소형 잔으로, 붉은 색으로 ‘어대전기념’ 명문이 시문되어 있다. 여기에서 ‘어대전’은 1928년에 있었던 쇼와천황 즉위식을 일컫는다.

조선신궁헌영가, 1930년대 말,

조선신궁을 찬양하는 단카모음집이다.

조선신궁 전경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항공촬영한 조선신궁의 전경으로 남산을 훼손하고 자리잡은 모습을 담았다.

남산과 신궁 사진, 일제강점기,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조선신궁은 경성 시내 어디에서든 선명하게 보였다.

경성의 근대미 그림엽서,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장충단공원, 박문사 등 일제강점기 당시 남산의 명소 그림엽서이다.

은뢰(恩賴), 1939년,

조선신궁 어진좌 10주년 기념 화보집으로 1925년부터 1936년까지의 조선신궁 사진을 수록하였는데,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신궁의 신성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었다.


노기 마레크케 기념화, 일제강점기,

상단에 메이지천황 부부 묘, 하단에 노기 마레스케 대장 부처와 노기신사가 있다. 일제는 군신으로 추앙받는 노기의 신사를 남산에 세워 조선인들의 충성을 강요하였다.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인고 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 황국신민서사 –

남산에 뿌리박은 ‘황국신민서사’
1930년대 중반 일본은 침략의 야욕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조선을 교두보로 하여 대륙침략을 꾀하였고,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위해 신사참배 등 황민화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어린 학생들까지도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했으며 이를 철저히 시행하고자 1939년 조선신궁 입구에 황국신민서사지주를 설치하였다. 또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아침마다 일본 천황을 향해 절을 하게 하는 등 조선인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고자 하였다. 남산 조선신궁 앞에서 조선인을 통제했던 황국신민서사지주는 해방 후 곧 파괴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가 2010년 발굴을 통해 웅대한 기단석이 발견되면서 그 폭악했던 식민지의 기억을 드러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농가일기, 1938년,

고시추의 일기이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일상을 꼼꼼히 기록하고 ‘황국신의 서사’를 쓰는 등 일제가 요구한 ‘모범 부락 청년’ 또는 ‘농촌 중견인물’에 적합한 조선인 농민이었다.

초등수신 권5,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초등교육 수준의 도덕교과서로 내부에 신궁 그림을 실었다.

싸우는 조선, 1945년,

전시 상황을 선전하는 잡지 안에 황국신민서사지주의 위압적인 모습을 실었다. 앞에 도열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황국신민서사, 1937년,

일제가 교학진작과 국민정신 함양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1937년에 만들고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이다. 신사참배 홍보전단. 일제강점기, 황국신민서사지주 엽서, 일제강점기, 황국신민서사지주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돌에다 새긴 기둥이며 조선총독부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의 글씨를 새겼다.

조선신궁 방문기념 도장첩,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도장은 방문 기념을 남기는 용도뿐만 아니라 부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총동원 그림엽서, 일제강점기,

여성에게 적용된 동원정책이 그려진 엽서로 애국하는 국가의 표상에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내핍생활, 방공생활 생활화 등을 주내용으로 한 엽서이다. 가운데에는 황국 신민의 서사가 실려 있다.

무운장구 속조끼, 일제강점기,

부산공립고등여학교 애국자녀단 제2학년 야마구치 사치코가 손으로 만든 속조끼다. 조끼 안쪽면에 조선신궁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 도장은 부적과 같은 역할로 사용되기도 했다.

내선일체표어, 일제강점기,

‘내선일체’는 조선인들을 일본 국민으로 편입시켜 전쟁에 원할히 동원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은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다. 신궁대마, 일제강점기, 각 가정의 신사인 가미다나에 넣어두고 숭배하게 하는 일종의 신주로 일제는 태평양전쟁 전시체제에 들어서며 집집마다 가미다마를 갖추게 하였다.

조선박람해 조감도,

1929년, 박람회 당시 제작된 일종의 관광 가이드이다. 여기에는 행사가 열린 경복궁 일대뿐만 아니라 남산의 조선신궁을 크게 강조해,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이용했다.

박문사가 된 장충단
고종이 충군을 기려 만든 장충단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1919년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전락하더니 1932년에는 조선 식민지화의 일등공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가 들어섭니다. 일제는 조선의 항일의지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듯 조선 궁궐과 기념 건물들을 해체하여 그 부재를 건립에 사용하였습니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박문사의 정문으로, 그 난간에는 광화문의 석재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경복궁의 선원전은 통째로 박문사의 고리(庫裡)로, 고종황제으 성덕을 칭송하여 만든 돌북을 안치하였던 석고전(石鼓殿)은 박문사의 종루로 변신하였습니다. 조선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파괴되어 하루 아침에 이토를 추모하기 위한 들러리가 된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박문사 공사 및 이전 관련 설계도, 복제, 1930년대

박문사 공사 및 이전 관련 설계도.

박문사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박문사 역시 경성의 명승지 중 하나로 불려 내.외부를 담은 엽서가 다수 제작되었다.

충열폭탄삼용사, 1932년,

상해사변 당시 세 군인이 폭탄을 갖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한 사건을 기념.홍보하기 위해 발간한 책으로 일본은 장충단공원에 이들의 동상을 세우는 등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박문사 사진, 1950년대 초,

박문사의 정문인 흥화문과 종루인 석고전 등을 촬영한 사진이다. 흥화문은 경희궁에서, 석고전은 남별궁에서 이전해온 것으로 각각 1988년 경희궁, 1966년 창경궁으로 옮겨졌다.

노기신사 수조,

노기신사 자리에 위치한 남산원에는 신사에서 사용한 수조인 데미즈야와 잔여 석재들이 역사의 증거물로 남아 있다. 수조는 신사입구에 설치되어 손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는 용도이다. 한쪽 면에는 ‘세심’, 다른 쪽면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전원
조선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유람의 공간이었던 남산은 일본인들의 공원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일제는 남산 주변의 거류지 확보 후 왜성대공원, 한양공원, 장충단공원 즉 남산의 북, 서, 동쪽에 공원의 설치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침탈하였습니다. 자국 거류민의 행락과 휴식을 위해 왜성대 일대 부지를 영구적으로 대여하여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거류민이 급증하자 남산 서쪽 자락에 한양공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일본은 경성의 시가지 확장으로 남산이 점차 경성의 중심 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1917년에는 대삼림공원계획을 수립힙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은 고종이 충군의 제사 목적으로 설립한 장충단 역시 공원으로 개조하여 본래 장충단이 가진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부 일본인들을 위해 남산 남록의 조망이 좋은 곳에 고급주택을 짓고자 신당에서 삼각지에 이르는 남산 주회도로가 부설되기도 하였습니다. 남산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본의 전원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