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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남산의 힘] 해방 직후 남산

해방 이후 남산에 있던 일제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조선신궁을 비롯한 다양한 상징물들은 자연스럽게 철거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상징물들을 제외한 남산 일대의 다양한 시설들은 적산으로 민간에 적산으로 불하되었으며, 남산 일대에는 해방촌을 비롯하여 월남민들이 터를 잡게 되었다. 서울 시민의 휴식공간이었던 남산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해방 이후 이념대립의 공간이 되었다가 이승만 독재정권을 상징하는 이승만 동상을 비롯하여 여러 시설들이 자리잡게 된다.

해방이후 남산 중턱에 있었던 조선신궁 사진.

공원으로 남아 있는 최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신궁 앞에 있는 미군의 모습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였던 조선신궁은 1947년 철거된다.

분단과 남산
일본인들이 떠나간 남산은 더 이상 식민지배의 상징공간이자 전유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우리에게 강요된 분단체제 아래서 남산은 통일된 나라의상징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하기까지 좌.우로 나뉘어 치열하게 전개된 이념투쟁 속에서 수도 서울의 공간 역시 좌.우익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함께 경축해야 할 해방 후 첫 3.1절 기념식을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따로 치렀습니다. 심지어 1947년 3.1절에는 남대문에서 유혈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적산 점거와 남산 잠식
해방에서 한국전쟁 이후 혼란기 동안, 일본인이 떠나간 남산일대의 귀속재산들은 무분별한 잠식과 점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군정기의 혼란스러운 적산처리 과정을 틈타 많은 사람들이 무단으로 점유하였고,학교 등은 천막교사를 세워놓고 공원을 훼손하였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행위를 방치하거나 묵인했고, 조건부로 가건축을 허용하는가 하면 공원용지를 변경하는 특혜를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토지 공개념과 제도가 부재했던 시기, 남산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잠식, 개발되었고 자연경관은 광범위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3.1절 기념행사 전단, 복제, 1947년,

1947년 3.1절,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남산에서, 조선건국청년회는 서울운동장에서 기념행사를 각각 치뤘다. 당시 남산은 서울 시내에서 몇 안되는 군중이 운집할 수 있는 장소였기에 정치행사의 장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남산공원용지내 유.무허가 건축물조서, 1960년,

남산공원 내 건축물에 대한 조서로, 한국신학교와 기독교박물관이 당시까지도 남아 있던 조선신궁 부속건물에 들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서울지도, 미군정기, 신궁과 성곽,

경성신사와 노기신사, 해방 후 시정기념관 대신 자리한 국립민족박물관 등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노기신사는 러일전쟁의 전리품이자 신사에 있었던 유탄포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숭의학원 국유재산 매매계약서, 복제, 1955년,

서울국세청장과 숭의학원 이사장 간에 체결한 적산의 매매계약서이다.

통감부가 있던 자리 뒷편에 위치한 숭의학원.

TIP, 1947년, 당시 주한미군이 발행했던 군 소식지,

남산에 있던 한 신사의 모습이 표지에 실려 있고, ‘아름다운 신사’로 묘사하였다.

주택지 경영지구 지정 요청 문서, 복제, 1955년

, 서울특별시장 김태선이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남산 아래 이태원동.한남동 일대에 외국인 주택지 건설을 위한 주택경영지구 지정을 긴급 요청한 문서다.

남산과 이승만 대통령
해방 뒤 식민통치의 중심공간이었던 신궁의 일부는 신학교, 기독교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후 복구사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제1공화국 정부는 남산과 조선신궁 자리에 건국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정을 건설하고, 박물관 등으로 쓰이던 신궁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는 거대한 동상을 세웠습니다. 약25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상은 단명했습니다. 건립 4년 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제1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동상도 철거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동상의 머리 부분만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4.19혁명 이후 철거된 이승만대통령 동상.

남산공원 의사당터 도면, 복제,

1950년대 추정,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의 동상 앞에 세계 최대 규모의 의사당 건립을 지시하였고 공사비용 절감을 위해 육군 공병단을 대거 투입하였다. 그러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공사는 이승만 하야 이후 백지화되고, 이후 공원시설이 들어섰다.

개헌홍보물, 1954년,

초대대통령 당선 무제한.정부의 민의원 해산권 부여 등의 내용을 담은 홍보물이다. 이후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이 조항들이 실현되고 이승만정권이 연장되었다.

선거벽보, 1960년,

3.15부정선거 당시 사용되었던 벽보로 추정된다. 이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의 정권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대통령 하야 결의 발표 기사, 동아일보 1960년 4월 26일자.

제3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기념 우표, 1956년, 백환 동전, 1959년,

한국은행의 백환 동전으로 앞면에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지화 천원, 1950년대,

1950년부터 4.19혁명 전까지 이승만 대통령 초상이 인쇄된 지폐를 사용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전기, 1955년

남한 서울 입체전경경도, 1962년,

관광지도로 1962년에 발행되었지만, 지도 승인은 1958년에 받았기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그려져 있다.

광복, 그 이후 남산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남산 역시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남산기슭 조선신궁과 신사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고 신궁의 도리이와 황국신민서사지주 또한 1947년에 철거됩니다. 남산 둘레의 일본 점거시설은 적산으로 불하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해방된 남산은 통일된 독립국가가 아니라 냉전으로 분단된 나라를 상징하는 공간이 됩니다. 남산은 좌.우익의 대립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고 북쪽으로 유리된 월남민들의 마을 ‘해방촌’이 둥지를 틀기도 합니다. 그러한 정국 속에서 남산을 신생국가의 상징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건국 대통령을 형상화한 초대형 동상이 세워지고, 동양 최대의 국회의사당 건설을 위한 부지조성 공사가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뒤 10년, 남산은 동시대 역사를 닮은 듯 혼란과 대립, 꿈과 좌절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