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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남산의 힘] 개발독재시대 남산

1960년 5.16쿠데타 이후 남산은 개발독재시대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남산 일대 성곽 주변에는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은 공간이 많았던 까닭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서게 된다. 반공교육을 상징하는 자유센터, 어린이회관, 국립극장 등 이념교육을 위한 시설들과 정권을 수호하는 수방사, 중앙정보부 등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개발시대 편의 시설들인 재벌기업들의 호텔, 외국인들을 위한 외인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남산의 자연경관은 크게 훼손되었다.

「민족중흥」의 국민교육장
5.16 군사 쿠데타에서 문민정부 등장에 이르는 30년의 세월 동안 한국은 압축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서울은 거대 도시가 되었으며 남산은 콘크리트 바다 한가운데 푸른 섬이 되었습니다. 남산은 그 속에서 근대화를 위한 국민교육장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국시(國是)’를 구현하는 거대한 반공교육장 자유센터가 산자락에 들어섰고, 산마루에는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하는 동산들과 ‘민족문화의 요람’ 국립극장이 세워졌으며, 산 아래에는 국가와 정권 수호의 방패,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부의 경제발전 드라이브 속에서 외인아파트가 남산의 허리를 두르게 되었고 재벌기업들이 고급호텔들이 경관 좋은 곳마다 들어섰습니다. 그 사이 남산의 자연과 역사는 훼손되어 갔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반공이념교육의 공간인 자유센터

자유세계로부터의 힘, 1950년대,

한국과 미국의 ‘혈맹’을 통해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을 재건하자는 포스터이다.

반공방첩 표어.노래, 1960~70년대

반공 교과서, 1964년,

반공교재연구실에서 펴낸 반공 교과서이다. 주요단원으로는 ‘8.15광복절’, ‘공산주의는 왜 나쁜가?’, ‘원한의 38선’ 등이 있으며, ‘민주국가’, ‘공산국가’, ‘중립국가’의 국기가 실려 있다.

자유 수호의 길, 1969년,

문교부에서 발행한 동명의 고등학교용 반공이념 교재의 부록이다. 교과서에서는 주로 ‘반공’에, 본 부록에서는 ‘방첩’에 초점을 맞추었다.

국민교육헌장 풀이, 1978년,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제정된 교육지표로 이 책은 그에 대한 풀이책이다. 표지의 남산 어린이회관을 통해 어린이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는 듯하다.

국제보도, 1960년,

표지사진은 경성신사터에 세워진 안중근의사 동상 모습이다. 이 동상은 1967년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민족의 얼, 1979년,

안중근 행적과 기념물 등에 대한 화보다. 1974년에 다시 세워진 안중근의사 동상 사진이 표지에 쓰였으며, 남산 안중근기념관 내.외부 사진도 실려 있다.

백범 김구선생 동상 제막식, 1969년,

1969년 8월 23일 남산 야외음악당 광장에서 있었던 백범 김구선생 동상 제막식의 식순 안내이다.

어깨동무, 1973년,

1967년 창간된 최초의 본격적인 어린이잡지이다며 발행인은 육영수다. 따라서 행정부의 대재적 지원을 받아 어린이 모두에게 호평받는 잡지가 되었다.

뉴우스리포트, 1977년,

1977년 5월 방정환에 대한 특집기사를 실은 잡지로 표지에 어린이회관과 방정환동상이 있다. 어린이 성금으로 제작된 방정환선생 동상은 1971년에 어린이회관 옆에 건립되었다.

새나라의 어린이, 1969년,

아세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동요 음반으로, 새로운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었다.

어린이회관개관기념우표, 1970년,

남산에 세워진 어린이회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체신부에서는 2백만 장의 우표를 발행했다.

어린이회관 승공관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1970년

어린이회관 층별 안내

남산 어린이회관

개발 열풍 속의 남산
서울이 거대도시로 커지는 사이 남산에의 접근성 개선과 함께 개발이 요구되었습니다. 남산 주변으로 도로가 확장, 신설되고 고가도로와 지하철이 생겼으며 남산순환도로가 정비되었습니다. 남산 주변의 땅들도 속속 개발되었습니다. 전망 좋은 남산에 대한 개발 열풍이 불면서 정부가 앞장서서 공원용지를 해제하고, 건축규제를 완화해 공공 또는 민간사업을 유치했습니다. 대한주택공사의 외인아파트 건설, 재벌들의 호텔 건설사업, 서울타워 건립 등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개발 열풍 속에서도 정경유착도 있었지만 국민교장장 남산은 관광지로서의 기능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 지나친 개발의 반대편에서는 남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각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남산야외음악당배치도, 1960년대, 복제,

1962년 서울시가 발표한 남산자연 공원화 계획에 따라 국회의사당 신축예정지에 야외음악당이 설립되었다.

남산공원 용지 해제 내용.

서울도시계획도집, 1965년,

1940년, 1959년, 1962년의 공원계획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공원법에 따라 남산공원.장충단공원 등의 행적적 변화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조건부 공원용지 해제, 1975년,

1975년 6월16일 남산공원 2,116㎡가 공원용지에서 해제되었다. 잠식 시설이 들어서고 수십차례 용지 해제가 되어 남산의 공원면적은 점차 줄어갔다.

서울 홍보 잡지, 1970~80년대,

개발된 남산의 모습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상징 중 하나로, 홍보 책자에 자주 실렸다.

외인아파트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진입하면 바로 보이는 남산의 얼굴은 한때 외인아파트로 가려져 이었다. 외인아파트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당시 외국인을 수용할 거주지가 없으면 경제개발 계획에 큰 차질을 빚는다는 논리에 의해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주택공사에 의해 지어졌다. 1969년 중앙도시계획위원회가 비상으로 소집되어 남산 남쪽 한남공원의 용지해제가 결정되었고 3년 만에 16, 17층짜리 아파트 두 동,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고급 아파트가 남산 비탈에 세워지게 되었다. 남산을 병풍처럼 가린 외인아파트는 남산 경관 보호의 분기점이 되어 훗날 사라지게 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90년대 서울 외인아파트 폭파장면

재벌기업의 호텔건립
1970년대는 정부의 관광 진흥정책 아래 민간기업들의 도심 호텔 신축 붑이 일었다. 장충동 일대에 자유센터의 숙소로 건축되어 한국관광공사에 매각된 타워호텔이 민간인에 매각되어 개방되었고, 외국 귀빈의 숙소였던 영빈관이 삼성그룹의 자회사에 불하되어 호텔신라로 개관하였다. 한편 남산의 서북쪽 아래에는 힐튼호텔, 동남쪽 기슭 한남동에는 하얏트호텔이 건설되면서 남산은 그야말로 호텔 공화국으로 변모하였다. 높은 건물들이 남산의 전망 좋은 자리들을 속속 차지하면서 남산은 계속 훼손되어 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새서울약도, 1970년,

1970년에 인창서관에서 발행한 지도로 남산1호터널과 2호터널 건설계획이 표시되어 있다.

남산 동쪽 영빈관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신라호텔

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하얏트호텔

서울타워 관광 자료, 현대

서울타워 관광 자료

국립극장 영문 안내, 1973년,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계획’ 중 하나로 ‘민족문화의 창달’의 사명을 띠고 한국의 대표 극장으로 자리잡았다.

유료도로 통행권,

남산1호터널은 민자사업으로 건설되었기에 그 건설비를 회수하기 위해 1970년 개통부터 1994년까지 통행료를 징수하였다.

남산 2호터널 기공식, 1969년,

남산 2호터널 기공식 사진으로, 좌측부터 서울시부시장 차일석과 박정희 대통령, 서울시 시장 김현옥의 모습이 보인다.

남산 1호터널 공사 사진철, 1970년,

남산 1호터널 제 1,2,3차 공사 현장 사진 모음집으로 굴착, 앵글 부착, 철재 지보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국민교육장 남산
1961년 5월16일, ‘반공을 국시로 삼고 지금까지의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하겠다’고 공약한 군사 정부는 바로 그 다음해 남산의 공원용지 122,000㎡을 해제하고 김수근 설계로 거대한 반공연맹 자유센터를 건설하게 됩니다. 한양도성을 밟고 들어선 이 거대한 구조물은 2년만인 1964년에 준공되어 반굥교육의 요람이 됩니다. 한편 조선신궁 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안중근 동상을 근처로 옮기는 등 15기에 달하는 선열들의 동상과 기념비가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의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애국 애족’ 정신을 고취하려 했습니다. 1970년에는 대통령 영부인의 주도로 동양 최대의 18층의 거대한 어린이회관도 세워졌습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어린이들을 근대화의 역군으로 키우기 위한 시설이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