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릉] 왕릉을 정하다.

조선왕릉의 구조는 크게 진입, 제향, 능침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왕릉의 공간배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와 고려 왕릉에서 볼 수 있는 공간 배치를 계승하고 있지만 원나라 때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제향공간의 기능이 크게 중요시되는 조선 왕릉의 독자적인 모습을 갖춘다. 조선초기에선 석실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 등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세조대 이후 석실대신 회격을 사용하고,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 등 간소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입공간은 제사를 준비하고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머무는 재실, 바깥세상과 격리해하고 성역임을 알려주는 금천교와 홍살문, 왕위 절을 하는 배위 등이 있다. 제향공간은 왕릉에 제사를 올리는 공간으로 높은 월대 위해 ‘ㅈ’자형으로 건물을 올려놓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참도,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수라간과 수복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자가 옆쪽에는 왕릉이 주인을 설병하는 비석이 모셔진 비각이 있다. 능침공간은 경사가 완만은 언덕에 조성된 봉분과 주위 영역을 말한다. 조선왕릉은 통일신라 왕릉에 비해 비교적 간소하면서도 단정하게 조성되어 있다. 조선왕릉에는 전대 왕릉에는 볼 수 있는 곡장이라는 담장으로 돌러싸여 있다. 봉분 주위에는 왕릉을 수호하는 상서러운 동물인 석호, 석양이 놓여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망주석, 난간석, 장명등 등의 석물이 놓여 있며, 그 앞쪽에 문인석, 문인석, 석마가 왕을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왕릉, 정하다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왕릉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왕릉의 공간은 크게 진입과 제향, 능침영역으로 바뉜다. 재실이 있는 진입공간은 제례와 참배를 준비하기 위한 속세의 영역이다. 왕의 혼과 참배자가 만나는 제향공간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그 뒤로는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 공간이 자리한다. 봉분은 매장 형태에 따라 단릉, 쌍릉, 동원이강릉 등 다양한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왕릉의 내부는 초기에는 석실 형태였으나 세조 광릉이후로는 회격(灰檄)구조로 조성되었으며, 의복과 명기 등 부장품도 함께 매장되었다. 조선왕릉은 『국조오례의』 등에 규정된 엄격한 예법에 따라 조성되어 큰 변화 없는 공간 구성과 상설 체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형적 특성과 당대의 시대적 상황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예외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왕릉도 조성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위치한 건원릉. 조선을 건국한 이후 처음으로 조성된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은 풍수지리설을 반영하여 조성한 단릉으로 봉분, 정자각, 신도비 등으로 구성된 조성왕릉의 표준이 되었던 왕릉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릉의 역사
능(陵)은 커다란 언덕처럼 무덤을 조성한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한나라 때 황제의 무덤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왕의 무덤을 능으로 부르며 왕실의 규범에 따라 조성하였다.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되었다. 대조비 신의왕후의 제릉(1391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나 태종의 즉위 이후 왕릉의 격식에 맞게 다시 조성된 왕릉으로서 조선 초기 능제를 잘 보여준다. 제릉의 왕릉 제도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1408년)으로 이어졌다. 건원릉은 고려왕릉의 기본 구조를 바타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조형요소를 도입하였고, 이는 조선초기 왕릉 제도를 확립하는 모범이 되었다. 세종 대 와릉에 홍살문과 제기고 등이 배치되어 유교적 제례의식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며, 조선왕릉의 석물 상설이 완성되었다. 이후 조성된 왕릉은 세조 대에 석실로 조성되던 능실을 회격으로 교체하고,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은 변화 외에 조선 초기에 완성된 큰 틀을 벗어 나지 않고 유지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국대전, 조선시대 통체체제의 바탕인 기본 법전으로, 계급에 따른 묘소의 조성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묘전궁릉원단묘지, 1936년

조선 왕실의 종묘와 주요 사당, 왕릉, 능원, 태실, 묘에 대한 기록으로 이왕직 예식과에서 간행되었다. 왕릉에 대한 기록은 47건. 원(園), 단(壇),묘(墓)는 13건이 수록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건축물
조선왕릉은 국왕이 선왕에 대한 효를 보임으로써 혈통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장소였기 때문에 유교적 의례를 준비하고 시행하기 위한 건축물이 다수 건설되었다. 제례를 시행하는 공간에는 제사를 모시는 건물인 정자각, 선왕의 업적이나 이름을 새긴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인 비각, 제향 시 음식을 임시로 보관하는 공간인 수라간, 능지기가 사용하는 건물인 수복방 등이 세워져 제례와 왕릉의 관리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제례에 사용되는 기물을 상시 보관하거나 왕릉을 수호하는 관리가 거주하기 위한 건축물인 재실은 홍살문 뒤쪽에 세워 사용하였다. 조선왕릉의 건축물들은 왕릉마다 큰 차이 없이 일정한 규모와 양식에 따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간혹 독자적인 양식과 규모의 건축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제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재실의 규모가 점차 확장되는 양상을 보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철인왕후예릉산릉도감의궤, 1880년, 보물 1901-3호

철종비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의 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산릉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왕릉의 정자각.재실.옹가.수도각 등 주요 건축물에 대한 도설과 내용이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조 건원릉 표석 탁본, 표석건립 1900년, 탁본제작, 1970년대

고종이 건원릉 신도비 옆에 세운 표석의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1900년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전면과 표셕 뒷면에 새긴 글은 고종의 친필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여주 영릉). 능역의 향어로(香御路)가 시작되는 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구조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여주 영릉), 평면의 형태가 ‘丁’자와 닮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과 정면 1칸, 측면 2칸의 배전(拜殿)이 월대 위에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각(여주 영릉), 승하한 왕과 왕비의 시호와 왕릉명을 기록한 비를 보호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라간(여주 영릉), 제향시 음식을 임시 보관하는 건물로 사용한 곳이며, 내부에는 탁자 및 화로와 제기들이 진설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복방(守僕房, 여주 영릉), 수직방이라고도 부르며,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복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재실(여주 영릉), 평소에는 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거주하는 곳으로, 제례를 행할 때에는 제례 준비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릉의 향대청에 걸었던 현판, 1756년

영조가 1756년 가을에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을 참배했던 일을 돌아보며 느낀 감회를 적은 시를 새겨 명릉 재실의 향대청에 걸었던 현판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홍릉의 재실에 걸었던 현판, 1758년

영조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 재실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조가 홍릉에 처음으로 거동하여 느낀 감회를 적은 글로 1758년에 정휘량의 글씨로 새긴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구조
초기 조선왕릉의 내부는 이전 왕릉의 조성 방식에 따라 돌로 방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형태인 석실 구조로 만들었다. 석실은 사후 관리가 용이한 반면 대형 석재를 구조에 맞게 제작하여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 공정에 많은 기간과 인력이 소모되는 것이 단점이었다. 예종 대에 이르러 세조의 광릉을 조성하면서 유언에 따라 처음으로 회격구조를 도입하였고, 이는 후대 왕릉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어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회격구조로 조성되었다. 회격 구조는 왕의 관을 이르는 내재궁(內齋宮)을 덮는 외재궁(外齋宮)을 만들고, 그 위를 석회 혼합물인 삼물로 덮어 굳힌 후 그 옆에 다신 구덩이를 파서 관을 넣고 다시 삼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회격 구조는 석실 구조에 비해 인력의 소모가 덜하고 도굴의 위험성이 적은 것이 장점이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릉의 단면도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실 재궁, 20세기 전반

국장시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관으로, 왕의 관을 재궁(齋宮)이라고 한다. 재궁은 왕의 즉위 시에 제작하여 해마다 옻칠을 더해 사용하였는데, 이 재궁은 여분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석물
조선왕릉의 능침 공간에는 여러 석물이 배치되어 왕릉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봉분 주변에 각종 석물을 배치하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이어진 전통으로, 조선왕릉의 석물 제도는 고려 왕릉의 전통을 계승하여 완성되었다. 조선왕릉의 석물은 호랑이.양.말의 모습을 조각산 석수(石獸), 문인과 무인의 모습을 조각한 석인(石人), 사후 세계를 밝히기 위한 장명등(長明燈), 봉분 앞의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인 망주석(望柱石) 등이 있다. 석물의 종류와 위치, 개수 등은 조선 초에 제도가 정착된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으나 크기와 양식은 각 왕릉의 성격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조 장릉이 석물 배치. 1) 문석인, 2) 무석인), 3) 석마, 4) 장명등, 5) 석양, 6) 석호, 7) 혼유석, 8) 망주석

OLYMPUS DIGITAL CAMERA여주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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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인(여주 영릉), 장명등 좌우에 위치한 공보차림의 문관의 형상을 한 석물이다. 왕명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양손으로 홀을 쥐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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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석인, 문석인 아랫단에 위치한 무관의 형상을 한 석물이다. 왕을 호위하는 의미로 갑옷을 입고 장검을 짚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마, 문석인과 무석인 옆에 배치되어 있는 말모양의 석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장명등과 석상(여주 영릉), 장명등은 능침의 앞에 위치하는 석물이다. 명당을 오랫동안 밝힌다는 의미로 왕조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형태는 팔각 및 사각형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석상(石床, 혼유석魂遊石)은 봉분이 정면에 놓이며 혼이 나와 머물며 노니는 돌이란 의미이다. 족석(足石,고석鼓石), 그 아래에는 4~5개의 북모양의 석물인 고석이 받치고 있으며, 잡귀를 쫓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석양(石羊, 선릉), 봉분을 중심으로 석호와 함께 4쌍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양은 죽은 이의 명복믈 빌며 악귀를 쫓기 위해 설치하였다. 석호(石虎, 선릉), 석호는 왕릉을 수호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석양과 함께 능침 밖을 지켜보는 형태로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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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주석(望柱石), 한쌍으로 이루어진 석물로 다람쥐 모양의 세호(細虎)가 조각되어 있는데 한쪽은 올라가고 다른 한쪽은 내려가는 형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조 구릉지 명기, 1800년, 1) 앵(罌), 4) 주준(酒樽),

정조가 승하하고 처음에 묻혔던 구릉지에서 출토된 부장품이다. 2011년 발굴을 통해 융.건릉 동남쪽에 위치한 구릉지에서 백자 명기, 칠기함과 같은 왕실 부장품이 다수 출토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주병(酒餠), 6) 잔(盞), 7), 작(爵), 8) 보(盙), 9) 궤(簋), 10) 반발(飯鉢), 11) 시접(匙楪), 12) 향로(香爐),

OLYMPUS DIGITAL CAMERA2) 정(鼎), 3) 부(釜), 13) 종(鐘), 14) 경(磬), 15)훈(壎), 16) 주칠합(朱漆盒), 17) 증옥(贈玉)

OLYMPUS DIGITAL CAMERA정조국장도감의궤, 1800년, 보물 1901-1호.

조선 22대 왕 정조의 국장 절차를 기록한 의궤로 왕릉의 부장품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대한제국의 황제릉, 홍릉과 유릉
고종은 1897년(광무1)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후 자신과 명성황후의 능을 황제릉으로 새롭게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그리고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의 유릉은 조선왕릉과는 다르게 황제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릉과 유릉은 배위(拜位)의 위치, 석물의 종류와 위치, 주요 건축물의 형태와 명칭이 기존의 왕릉과 달라졌다. 능역 주변을 담장으로 두르고 일자형의 침전을 세우는 등 황제릉의 격식을 갖추려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황제릉으로 조성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기존의 왕릉과는 달리 정자각 대신 ‘-’자형을 지어진 침전을 두고 있으며, 그 앞에 다양한 종류의 석물들이 도열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 1898년, 보물 1901-3호

고종비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의 조성 절차를 기록한 산릉도감의궤이다. 각종 도구와 건물의 평면도, 석물 등의 채색 도설에서 황제국으로서의 변모를 살펴볼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빈전혼전도감의궤, 1898년, 보물 1901-3호

고종비 명성황후 국장 당시의 빈전과 혼전에 관한 내용을 의궤이다. 각종 제구와 물품 등의 채색도설에서 황제국으로서의 변모를 살펴볼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릉 천봉 만장, 1926년

순종비 순명황후의 만장으로, 수백명의 관료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쓴 것을 엮은 것이다. 본래 유강원에 묻혔던 순명황후를 순종 승하 후 유릉에 합장하면서 제작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실 가족의 무덤, 원과 묘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였고, 왕세자 또는 왕세손과 그 배우자, 왕의 생부와 생모의 무덤을 원(園), 왕자와 공주.옹주.일반 후궁 및 폐위된 왕들의 무덤을 묘(墓)라고 불렀다.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승하고 손자인 의소세손의 묘를 의령원으로 봉함으로써 조선왕실의 능.원.묘제도를 정립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두 차례에 걸쳐 영우원.현륭원으로 추승함으로써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파주 소령원.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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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도, 1753년 경, 보물 1535호, 복제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을 그린 지도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묘소를 배치하고 있으며 좌측에는 제청, 우측에는 비각, 아래에는 전답을 묘사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문효세자 효장원 부장품, 1786년 경.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인 효창원 부장품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궁원의, 18세기 후반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신 경모궁과 영우원에 관한 의식과 절차를 수록한 책으로,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책에는 궁원의도설을, 2책에는 전례에 관한 절차를 담았다. <출처: 고궁박물관>

능.원.묘를 모두 가진 사도세자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는 1762년(영조 38)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는 폐세자되었다가 사망 이후 다시 왕세자의 신분을 회복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 황제로 추존되면서 신분의 격하와 회복, 추승 과정 중에 무덤으로 능, 원, 묘를 모두 가지게 되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현 동대문구 배봉산 자락에 묘소를 조성하였으며 이름을 수은묘라 하였다. 수은묘는 영조의 명에 따라 간소하게 만들어졌으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한 이후 개건되면서 3배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의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올려 영우원이라 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현재의 화성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현륭원은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사도세자 융릉. 정조대에 현륭원으로 추승되었다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도세자 묘지, 1762년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위해 직접 지은 묘지이다. 사도세자의 탄생, 어머니, 세자시절, 죽음, 장례, 장지, 혼인, 자손 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