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릉] 왕릉을 모시다.

산릉 제례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들의 능에서 직접 올리는 제사를 말하며, 오례 중 길례(吉禮)에 해당한다. 왕릉에서의 제사는 망자의 기일, 사시(四時, 1월, 4월, 7월, 10월 초순) 등 절기상 중요한 날에 올려졌다. 왕릉에서의 제사는 국왕이 직접, 또는 세자가 국왕을 대리하여 행차하여 올리는 경우와 관리들이 올리는 경우가 있었다. 국왕이 왕릉을 행차하는 일은 선대 왕들에 대한 예를 올림으로써 효를 직접 행하고 왕실의 권위를 백성들에게 알리는 정치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궁궐에서 모든 일정을 소화해야했던 왕과 왕실 가족들에게는 바깥세상을 돌아 볼 수 있으며,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능행에 큰 부담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 모시다
조선왕릉은 국왕이 선대 왕들에 대한 예를 다함으로써 유교적 통치 이념인 효를 행하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각종 의례의 장소가 되었다. 산릉제례는 왕릉에 모셔진 역대 왕과 왕비에게 올리는 제사로, 망자의 기일.생신이나 사시(四時).납일(納日).속절(俗節).삭망(朔望)의 절기 등에 치러졌다. 능행은 왕이 산릉제례나 참배를 위해 능에 방문하는 의례로, 왕이 궁궐 밖으로 나오는 흔치 않은 기회였으며, 많은 인력과 재정이 동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능을 옮기는 천릉 의례가 열 번 넘게 시행되었다. 천릉은 주로 기존 왕릉의 풍수적 길흉을 이유로 이루어졌으나 이면에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생전에 왕이나 왕비가 아니었거나 폐위되었던 인물을 사후에 복위시키면서 그 무덤을 능으로 만드는 것을 봉릉(奉陵)이라 하였는데, 이는 조선왕실의 권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중요한 의례 중 하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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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건원릉 제례

지극한 효심, 산릉제례
왕릉에서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인 산릉제례는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晨祭)로 나눌 수 있다. 속절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에 각 왕릉에 모시는 제례를 의미하며,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의 기일에 행하는 제례를 말한다. 산릉제례를 시행하기 이틀 전부터 왕은 몸을 깨끗이 하며 준비하고, 하루 전날까지 제사상 차림 등 모든 준비를 마쳤다. 제례 당일에는 왕이 축문을 받들고 나아가 절을 올리고 정자각에 차려진 상 앞에서 향을 피운 뒤 술잔을 올린 후 다시 절을 올리고 축문을 태우면서 의례를 마쳤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춘관통고, 1788년

정조의 명으로 예제와 의례 관련 업무를 오례를 기준으로 종합하여 정리한 책이다. 『국조오례의』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던 산릉에서의 기신제 의식들이 추가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홀기진설도, 1937년

OLYMPUS DIGITAL CAMERA홀기진설도, 1937년

67가지의 왕실의 정기제례.임시제례 절차와 25가지의 진설도를 수록한 책이다. 제례의 수에 비해 진설도가 적게 실려 있는 것은 동일한 진설은 생략했기 때문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현륭원향례진설도, 조선

사도세자와 비 혜경궁 홍씨의 묘소인 현륭원에서 지내는 제례의 진설도이다. 제수를 원형으로 표시하고 그 안에 제수명을 적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능침향례진설도, 조선후기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왕릉에서 거행하는 제례에 소용되는 제물의 종류와 진설 위치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제수(祭需)를 원형으로 표시하고 그 안에 제수명을 적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릉섭행작헌례홀기, 1927년 이후,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를 합장한 유릉에서 올리는 작헌례의 순서를 적은 기록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국기판(國忌板), 조선후기. 왕과 왕비의 제삿날을 새긴 현판이다.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기일과 능호, 위치 등을 적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릉 축식, 조선후기.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힌헌왕후의 능인 장릉에서 한식절 제례때 올리는 축문의 서식을 기록한 문서이다. 융릉축식, 조선후기, 사도세자의 묘소인 융릉에서 제례의식을 거행할 때 올리는 축문의 서식을 기록한 문서이다. 건릉축식, 조선후기.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에서 제례의식을 거행할 때 올리는 축문의 서식을 기록한 문서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 진설(陳設) 재현, 각 왕릉에서 올리는 기신제 떄의 상차림 재현

OLYMPUS DIGITAL CAMERA서광보 휘릉 단오제 전례관 녹패, 1843년

부사과 서광보를 인조비 장렬왕후의 휘릉에서 거행하는 단오제의 전례관에 임명하여 이에 대한 녹과(祿科)를 내린다는 문서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광보 휘릉 한식제 전례관 녹패, 1843년

부사과 서광보를 인조비 장렬왕후를 모신 휘릉에서 거행하는 한식제의 전례관에 임명하여 이에 대한 녹과를 내린다는 문서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제기연한책, 1792년 이후

장릉에 보관된 제기 등의 세부목록과 그 상태 등을 기록한 책이다. 장릉에 비치된 제기들의 목록을 제시하였고, 각 제기들의 수량과 제기를 구비한 시기를 적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제례의궤도 병풍, 조선

왕실의 각종 제례 관련 내용을 글, 그림, 표로 설명해 놓은 병풍이다. 제1폭에는 제기의 도설과 제수품을 정리한 도표가 있으며 2폭에는 각 왕릉별 제례 기록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궤(樻),

OLYMPUS DIGITAL CAMERA2) 향축궤(香祝樻),

OLYMPUS DIGITAL CAMERA3)작비(爵篦),

OLYMPUS DIGITAL CAMERA4) 술잔, 5)과일을 올려놓는 제기, 6) 약과를 담는 제기,

OLYMPUS DIGITAL CAMERA7) 산자(散子)를 담는 제기, 8) 중계(中桂)를 담는 제기, 9) 적을 담는 제기,

OLYMPUS DIGITAL CAMERA10) 손씻을 물을 담는 항아리, 11) 세작(洗勺), 12) 산과 구름, 우레를 새긴 술동이, 13) 덮개,

OLYMPUS DIGITAL CAMERA14) 용머리 장식 국자, 15) 술을 붓는 제기, 16) 향합, 17)향로,

OLYMPUS DIGITAL CAMERA18) 주걱, 19) 젓가락과 숟가락, 20)주병, 21)술의 양을 재는 제기,

OLYMPUS DIGITAL CAMERA22) 축판, 23) 문진,

OLYMPUS DIGITAL CAMERA24) 촛대, 25) 촛농을 담는 그릇, 26) 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 27) 등잔.등잔대,

OLYMPUS DIGITAL CAMERA28)망료쟁반, 29)화로

왕의 행차, 능행
선대왕의 왕릉을 방문하는 행차인 능행(陵幸)은 국왕의 효심과 왕권의 정통성을 만방에 알리는 의식이자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는 국왕이 백성들과 접촉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능행을 가장 많이 거행한 국왕은 영조로, 능행 횟수가 총 77회에 달하였다. 영조는 능행이 숙종과 경종을 잇는 ‘삼종혈맥(三宗血脈)’으로서 자신의 의무임을 강조하였다 그 뒤를 이은 정조는 63회에 달하는 능행을 거행하였고, 이 중 상당 부분을 영우원, 현륭원 등 아버지 장조의 묘소에 할애함으로써 어버지의 복권과 왕실의 권위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국왕은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하기도 하였으며, 정조의 경우 능행을 군사 훈련의 기회 및 수도권의 방위 상태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성원행도 병풍, 18세기 후반

정조가 1795년 윤2월9일부터 16일까지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거행된 주요 행사를 그린 8폭 병풍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현륭원 행차를 그린 반차도

OLYMPUS DIGITAL CAMERA원행을묘정리의궤, 1797년, 복제

1795년 윤2월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를 위해 행차했던 때의 기록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속오례의, 조선후기

『국조오례의』를 시대에 맞게 개정하고 추가하여 편찬한 책이다. 『국조오례의』에는 산릉제례 중 행릉의식이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지만 『국조속오례의』에서부터 행릉의식들이 추가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조가 명릉 참배 후 짓고 쓴 글을 새긴 현판, 1759년

영조가 숙종, 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을 참배한 후 직접 짓고 쓴 글을 새긴 현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조가 명릉과 소령원을 참배한 후 지은 글을 새긴 현판, 1787년

정조가 증조부인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과 소령원을 참배한 뒤 그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조가 광릉 주변의 백성들에게 내린 윤음을 새긴 현판, 1792년

정조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인 광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주 및 포천의 노인과 백성들에게 내린 윤음(綸音)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조가 명릉 참배 후 지은 글을 새긴 현판, 1758년

영조가 숙종,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을 참배한 후 영의정 이천보에게 적게하여 명릉 재실에 걸었던 현판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조가 효릉 제례 후 짓고 쓴 시를 새긴 현판, 1843년. 영조가 인종의 효릉에서 직접 제례를 올린 뒤 짓고 쓴 시를 새긴 현판으로, 효릉 재실에 걸려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조의 연보를 새긴 각석, 1757년

영조가 자신의 연보를 기록한 각석이다. 왕실 어른들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올리거나 능행한 내용을 적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은경회록, 1764년,

영조가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올 때,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영은문 밖에서 맞이하자 영조가 이에 감동하여 지은 사언시(四言詩) 등이 실린 서적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사후에 지존이 되다, 봉릉
살아 생전에 왕이나 왕비로 등극하지 못했거나 폐위되었던 사람을 왕과 왕비로 모시면서 그 원묘를 능으로 추봉하는 것을 봉릉(奉陵)이라 한다. 추존 왕과 왕비로서 봉릉된 왕릉으로는 덕종(1438~1457년)과 소혜왕후의 경릉 등 6기가 있으며, 폐위되었다가 사후 추복(追復)되면서 봉릉된 왕릉으로는 단종의 장릉 등 3기가 있다. 봉릉된 왕릉의 경우, 기존 왕릉에 비하여 석물을 간소하게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경릉의 소혜왕후 능침이나 장조의 융릉처럼 능침 조성의 상황에 따라 왕릉의 예를 갖추어 조성된 경우도 있다. 봉릉은 조선왕실 선대 조상들의 추존과 복위라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왕실의 권위회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많은 논의를 거쳐 신중하게 결정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의 제20대 왕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이다.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였던 단의왕후는 경종 즉위 후 왕후로 추존되면서 그 묘소가 혜릉으로 봉릉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릉사보, 1914년. 단종에 대한 사적들을 모아 편집한 책으로, 1914년 청송군 방호정에서 6권 3책의 목판본으로 발행한 수정증보본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장릉도, 1791년경

영월에 위치한 단종의 장릉과 관련된 주요 사적들을 8폭의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의 제1폭으로, 단종의 능인 장릉의 전경을 회화식 지도로 표현한 그림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혜릉석물추배도감의궤, 1722년, 보물 1901-3호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에 왕릉의 격식에 맞춰 석물을 설치하는 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의궤이다.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였던 단의왕후는 경종 즉위 후 왕후로 추존되면서 그 묘소가 혜릉으로 봉릉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온릉봉릉도감계병, 1739년, 복제

중종의 비 단경왕후의 능을 단장하기 위해 설치된 온릉봉릉도감 관원들이 역사(役事)를 기념하여 제작한 계병이다. 병풍의 앞면에는 <무이구곡도>를 그리고 뒷면에는 제시와 좌목을 적어 넣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단종비 정순왕후 옥책, 1698년. 정순왕후에게 ‘정순’이라는 시호와 ‘단량제경’이라는 휘호를 올리며 제작한 옥책이다. 단종비 정순왕후 금보, 1698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될 떄 함께 부인으로 강봉되었던 정순왕후를 1698년에 왕비로 복위하며 제작한 어보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단종 옥책, 1698년, 1698년 단종에게 묘호와 함꼐 ‘순정안장경순돈효’라는 존호를 올리며 제작한 옥책이다. 45행에 걸쳐 단종의 복위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단종 금보, 1698년 단종이 복위되자 시호를 올리고 제작한 어보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릉을 옮기다, 천릉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이유로 왕릉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능이나 원을 옮기는 것을 천릉(遷陵) 또는 천봉(遷奉)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총 17번의 천릉이 시행되었고, 이중 풍수적 길흉을 이유로 천릉이 단행된 예는 세종의 영릉, 중종의 정릉, 장경왕후의 희릉 등 총 8회이다. 그러나 천릉은 국장에 비견할 만큼 막대한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었으므로 풍수적 논란으로만 천릉을 단행할 수 없었으며,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권신 김안로가 정적을 축출하기 위해 희릉 천릉을 추진했으나, 결국 중종에 의해 실각한 사건은 조선시대 천릉의 정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이전에 폐출되었던 왕이나 왕비를 복위시키면서 천릉이 이루어지지도 했는데, 이는 주로 왕실의 권위를 높이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단행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고양시 서삼릉에 위치한 중종계비 장경왕후 희릉이다. 김안로가 정적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인 동기로 내곡동에 있던 능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원래 중종의 능이 이곳에 조성되어 정릉이라 불렸으나 명종대에 문정왕후에 의해 강남으로 옮겨지면서 장경왕후의 능만 남으면서 희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순조인릉천봉도감의궤, 1838년, 보물 1901-1호. 순주의 인릉을 파주 교하에서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헌릉 근처로 천릉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