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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치조, 정전인 중화전(보물)과 조정

덕수궁 중화전(보물)은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조례, 외국 사신 접견 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궁궐의 정전으로 1902년에 완공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처음 중화전을 세웠을 때는 경복궁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2층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규모가 축소되어 단층으로 지어졌다. 구한말 조선의 경제력을 보여주듯이 다른 궁궐의 건물에 비해서 웅장한 멋이 덜하다는 느낌을 준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축물로 단층으로 지어져서 그런지 다른 궁궐 정전에 비해서 약간 왜소하다는 느낌을 준다. 황제국을 선포한 이후에 지어진 건물로 전체적으로 황금빛을 띠고 있으며, 추녀마루의 잡상 또한 궁궐건물 중에서 가장 많은 13개를 올려 놓고 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정전 영역은 국가적인 큰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를 조정(朝廷)이라 한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크게 중건하였지만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하면서 그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전각이 없어졌는데 정전 영역을 둘러 싸고 있던 행각은 허물어지고 모서리에 일부만 남아 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이 곳에는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행궁이었던 것을 광해군때 그 규모를 확장하여 경운궁이라 하였다. 실제로 덕수궁은 구한말까지는 그 규모가 크지 않은 별궁으로 유지되어왔으나, 1897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이 곳 경운궁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식궁궐로 바뀌었다.

<덕수궁 치조(治朝)>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1902년에 중화전을 건축하고 궁궐의 정전으로 삼았다. 대화재 이후 1906년 중건하는 과정에서 그 규모가 축소되고 행각 대부분이 없어져 왜소한 느낌을 준다.

<중화문>

설명대로 균형미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위에 회랑이 없어 어색해 보인다.

<덕수궁 중화전(보물)>

덕수궁 중화전(보물)은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정전이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붉고 황금빛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 기술로 지어진 거의 마지막 건물에 해당한다.  원래는 2층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단층으로 바뀌었다. 20세기초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의 건축기술로 지어진 마지막 궁궐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중화전 월대를 오르는 답도와 계단>

월대를 오른는 계단 중앙에는 국왕의 가마가 지나는 길인 답도에 소맷돌과 석수가 설치되어 있다. 하월대는 5계단, 상월대는 3계단으로 되어 있다.  국왕의 권위를 느끼기에는 경복궁에 비해서 부족해 보인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과 고종의 위상을 보는 듯 하다. 황제국을 표방했음에도 월대는 자금성 태화전과 달리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월대 소맷돌>

<상월대 소맷돌>

 하월대 소맷돌에는 봉황이 새겨진 다른 궁궐과 달리 두마리의 용이 새겨,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줄려고 하고 있다. 반면에 상월대에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두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다.

<중화전 월대>

중국 자금성과는 달리 장식성이 강한 의기들을 올려 놓고 있지는 않다. 또한 경복궁 근정전에는 있는 사신상이나 십이지신상이 없다.

<처마와 공포>

<기둥과 창호>

<추녀마루 잡상>

경회루 다음으로 많은 10개의 잡상이 올려져 있다.

<중화전 내부>

중앙에 닫집형태로 만들어진 어좌가 놓여 있고, 내부는 비어있다고 할 수 있다. 어좌 뒤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천장>

중화전 천장에는 봉황장식을 하고 있는 다른 궁궐과는 달리 용문양 장식을 하고 있다. 황제국의 위상을 표현하고 있는 장식이다.

<중화전 월대에서 내려다 본 조정 마당>

조정 마당은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회랑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진다. 중앙에 삼도가 있고 그 양쪽에 문.무반 신료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한다. 실제로 평상시에 사용하는 공간은 아니고 국가적인 공식행사를 치루는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조정 중앙의 삼도>

국왕이 지나가는 어도와 그 양쪽에 신하들이 지나가는 길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공식행사를 진행할 때 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의미와 걸을때 몸가짐으로 바르게 가지도록 일부러 울퉁불퉁한 박석을 깔았다.

<품계석>

 품계석은 정전 앞에 세워전 표지석으로 공식행사때 직위에 따라서 도열할 수 있도로 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이 도열하며, 종1품에서 종3품까지 6개, 4품에서 9품까지는 정,종 구분없이 6개씩이 세워져 있다. 실제로 고위직만 내조에 도열해 있었으며, 4품 이하 하위직은 중화문 앞 외조에 도열한다.

<회랑을 구성하는 행각>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영역 또한 다른 궁궐 정전과 마찬가지로 행각으로 둘러진 회랑형식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대부분의 행각은 훼손되었고, 모퉁이에 일부만 남아 있다. 덕수궁 중화전의 대한제국 황실 정전으로 지어졌다고 하지만, 행각이 비롯한 궁궐의 구성요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사방이 뚫린 개방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마, 궁궐 정전같은 느낌이 부족하다.

<석조전에서 보이는 중화전>

행각이 없어 개방된 느낌을 주고 있다. 주위의 고층건물, 정원 등과 어울려 색다른 느낌을 준다.

<뒤에서 본 모습>

중화전 일원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건축해 궁궐의 중심영역으로 삼았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대화재로 이 일대가 모두 불타 버린 후, 1906년에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재건하였다. 중화문과 행각도 함께 다시 세워졌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둥이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그 앞마당인 조정은 국가 의례를 치르기 위한 상징 공간이다. 2단으로 월대를 마련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으며 품계석과 삼도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 격식을 따랐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