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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릉(貞陵, 사적),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서울 성북동 정릉2동 북악산 동쪽편 자락에 위치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 사적)이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능을 덕수궁 부근(현 영국대사관부지)에 자신의 능역과 함께 조성하고 원찰로 부근에 흥천사를 세웠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으로 고려의 왕릉제도를 참조하였다. 태종은 정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석재 일부를 청계천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하고 목재들을 태평관 건축에 사용하는 등 홀대하였다고 한다. 태종 때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었기때문에 오랜기간동안 일반 무덤처럼 관리되었으며 조선후기 현종 때(1669년) 송시열 등의 상소에 의해 신덕왕후로 복권되면서 종묘에 배향되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조성되었다. 정릉을 처음 조성했을때의 석물들은 장명등, 고석, 상석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 왕릉 중 가장 오래된 석물이라고 한다.

<서울 정릉(사적)>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사적). 정릉은 서울 도심에 덕수궁 부근에 있었는데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은 신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능을 이곳으로 옮겼다. 일반 무덤처럼 있었는데 조선후기 송시열 등의 상소로 지위가 복권되면서 현재와 같이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홍살문>

<참도>

정자각과 능이 동쪽을 향하고 있어 참도가 ‘ㄱ’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연환경에 순응하여 조성한 왕릉 조영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정릉 정자각>

앞면 3칸의 정전과 2칸 규모의 배위청이 연결되어 있는 전형적인 정자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자각 내부>

<정전내 산릉제례 진설 모형>

<정자각 월대에서 본 모습>

<정자각 오른편에 위치한 수복방>

<수복방 내부에 전시된 제관의 복식>

<표석이 세워진 비각>

<정릉 봉분>

조선후기에 다시 조성된 것으로 원래의 모습은 아니다. 석물 중 장명등은 덕수궁 부근 옛 정릉에 있던 것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신덕왕후는 고려시대 권문세족이었던 곡산강씨 일족인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중앙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최초로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방번, 방석 두아들과 경순공주를 낳았다. 왕자의 난 직전에 병환으로 죽자, 태조는 경복궁에서 가까운 덕수궁 부근에 정릉을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발한 전처 소생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이 살해되고, 이후 태종은 신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능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정릉 아래 마을에 남아 있는 고목>

<정릉 입구>

<정릉 앞을 흐르는 금천과 금천교>

왕릉과 바깥세상을 분리해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북악산 계곡을 잘 활용하여 금천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 왕릉은 상당히 넓은 지역을 능역으로 삼고 출입을 금하였는데, 정릉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고, 권문세가들이 능역 숲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허락하는 등 조선후기 신덕왕후가 복권되기전까지 상당히 홀대하였다고 한다. 원찰이었던 흥천사 또한 조선초기까지는 수도 한양의 큰 절로 계속 유지되었으나, 연산군대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쇠락하였으며, 정조 때 현재의 위치인 정릉 입구 부근에 중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조가 흥천사를 세우면서 만든 흥천사종은 원래의 위치와 가까운 덕수궁 경내에 남아 있다.

<정릉 부근에 있는 흥천사>

흥천사는 태조가 발원하여 정릉의 원찰로 세운 사찰로 원래 덕수궁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연산군대에 화재로 소실한 이후 크게 쇠락하였다. 조선중기까지는 원각사와 함께 한양 도성안에 있는 큰 사찰이었다. 현재의 사찰은 정조대에 절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크게 중창한 것이라 한다.

<덕수궁 경내에 있는 흥천사종(보물)>

태조가 1462년 신덕왕후를 위해 왕실에서 발원하여 만든 것이다. 중국종의 특징이 전통 범종 양식에 반영된 것으로 ‘흥천사’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흥천사와 정릉이 있었던 덕수궁 부근 영국대사관 들어가는 길>

현재 이름인 ‘정동’ 또한 정릉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초 이곳은 능역으로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나 태종이 당시 세도가들에게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좋은 터로 여겨졌기때문에 조선초 풍수에 능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하륜이 주도하여 권문세가들이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앞쪽에 중국사신이 머물던 태평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계천 광통교에 사용된 옛 정릉 석물>

왕자의 난’으로 등극한 태종이 계비였던 신덕왕후를 미워했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신장상은 원래 정릉을 구성하는 석물 중 하나로 병풍석이었다고 한다. 태종은 수해를 입은 광통교를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정릉 석물을 광통교를 복원하는데 사용하였다. 고의로 신장상을 거꾸로 세워놓고 있다.

<광통교 석물, 바로 세워진 신장상>

<광통교 석물>

정릉, 사적,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정릉은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현비가 되었고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왕후가 태조 5년(1396)에 돌아가시자 능을 꾸미고 그 이듬해 능 이름을 정릉으로 정했다. 이 능은 원래 중구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9년(1409) 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능을 돌보지 않아 처음의 모습을 잃었으나 현종대에개축하여 다소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덕왕후의 신위도 태조묘에 모시게 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