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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건릉(健陵, 사적),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건릉(健陵)이다.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을 모신 능으로 화산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정조의 유지에 따라 왕릉의 조성은 융릉의 예를 따르고 있다. 원래는 융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는데,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효의왕후가 죽은 화산 서쪽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왕과 왕비가 하나의 봉분에 묻힌 합장릉이다.

현릉과 융릉(사적)는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를 복권하고 양주에 있던 영우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이라 하였다. 정조는 이곳에 현융원을 조성한 이후 여러 차례 능행을 했으며, 수원화성을 쌓고 화성내에 행궁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화산 아래에 용주사를 크게 중창하여 원찰로 삼았다. 현륭원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되었다.

<화성 건릉(사적)>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조성된 능역에 자리잡고 있다.  한양도성에서 비교적 먼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조는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차례 찾았다. 정조 사후 그의 유지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순조때 이장하면서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화성 건릉 들어가는 숲길>

<건릉 입구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영조 때 재정리된 <국조상례보편> 왕릉제도가 충실히 반영된 조선후기 왕릉 정자각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정자각 앞 수복방>

<정자각 뒷편 표석이 세워진 비각>

<봉분>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합장릉이다. 원래 현륭원 동쪽 언덕에 있던 것을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효의왕후가 죽자 현재의 위치에 합장릉을 조성하였다.

<현릉과 융릉 입구에 있는 재실>

<재실 앞 수령 100년이 넘은 향나무 고목>

<화성 화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용주사>

현륭원을 지키는 원찰로 사실상 정조대왕이 창건한 사찰이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유교식 사당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삼문에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던 호성전까지는 박돌을 깔아 놓은 신도가 조성되어 있다.

화성 건릉, 사적, 경기 화성시 안녕동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하다. 8각 장명등도 융릉과 같다. 문석인과 무석인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무석인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융릉 동쪽의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물색하던 중에 1821년(순조 21) 3월 9일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에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